• "대한민국은 조폭국가다"
        2010년 12월 03일 10: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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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에 숙환으로 돌아가신 컬럼비아대학의 찰스 틸리 교수님께서 한 때에 아주 재미난 글을 쓴 바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국가 건설’과 조폭의 ‘보호세 갈취’를 비교하면서 유럽에서의 절대왕권의 기원을 설명해준 논문이었습니다.(https://netfiles.uiuc.edu/rohloff/www/war%20making%20and%20state%20making.pdf)

    국가 건설과 보호세 갈취

    정확하게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도 아니고 다소 이론성이 약하지만, 중세 이후 유럽에서의 국가 기원에 대한 정치학적 설명으로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이 설명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중세 후기의 유럽은 크고 작은 봉건 영주들이 싸우고 또 싸웠던 하나의 큰 전장이었는데, 이들 영주들이 농민, 상인으로부터 세금을 뜯어먹을 수 있었던 명분은 결국 ‘보호’였다는 것이죠. 누구로부터의 보호냐 물어보면 결국 서로로부터의 보호인 셈인데, 어쨌든 A시나 B후국의 양민으로서 그 해당 지역의 후작이나 남작 내지 대주교의 ‘안정된 수취’는 이웃 지방 C백작에 의한 점령과 점령지에서의 과도한 징세보다 더 좋았을 수도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해서 봉건 세력들이 일종의 ‘보호 서비스 시장’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그 논리상 과일장수나 대마초장수로부터 텃세를 뜯어내는 뒷골목 왈짜들의 ‘징세 명분’과 다를 게 없다는 것입니다. 한데, 화기가 고도화돼서 중세 ‘골목 짱’들의 요새들을 쓸어버릴 만한 대포들이 등장되니, 마르크스의 ‘시장 독과점화 경향’ 논리대로 보호서비스 시장에서 제일 큰 보호 서비스 제공자만 살아남은 것이죠. 큰 대포들을 살 만한 ‘업자’들만 살아남은 것인데, 그게 바로 우리가 익히 아는 불란서, 서반아, 포도국(葡萄國) 등등 절대왕권 국가들입니다.

    이걸 보고 혹자가 제게 "국가와 조폭의 차이도 모르냐, 국가는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는 공공기관의 총체이며, 조폭은 비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익집단일 뿐이다"라고 반문하겠지만, "공공성이 있는 공권력으로서의 국가" 운운은 어디까지 부르주아 혁명을 거쳐 나름대로의 시민권력이 확립된 근대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전의 유럽 국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권력’과 사실 사이가 좀 멀었어요. 1572년 불란서 파리 등지에서의 성바돌로매 대학살, 조총을 들고 ‘개신교도’라고 의심되는 자신의 백성들을 사냥했던 임금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근대적 공법 논리와 단두대

    ‘공민, 공법’의 논리보다 "우리 천주교파냐, 저 개신교도파냐"의 논리가 우선이었다는 것이죠. "짐은 곧 국가"와 같은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수 있었던 절대왕권 아래에서는, 근대적 공법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작동될 수 없었지요.

    그 논리가 작동되기 위해서는, 명색상의 공권력을 사실상 사적으로 이용해온 국왕이나 귀족들에게 한 가지 약이 필요했던 것이죠. 단두대(斷頭臺)라는 이름의 명약 말에요. 뭐, 그 약물 투입 과정을 거친 나라라고 해도, 꼭 전근대적 권력 사유화 시대로 퇴보하지 않겠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반동의 시대에는 언제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번에 위키리크스에서 폭로된 미 국무성의 비밀보고서에서 러시아를 "완전히 부패한 마피아 국가"라고 – 매우 옳게 – 규정했지만, 이는 10월혁명과 그 후속 정권(스탈린주의 정권)의 역사적 패배 및 몰락에 따른 전근대적 국가구조로의 후퇴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미 국무성 관료들의 말대로, 지금의 러시아는 푸틴 휘하의 관벌들의 사유물이고, 저들이 국가적 세금을 횡령할 뿐더러 정기화된 상납제도를 통해 ‘사설 세무서’들까지 운영한다는 것도 맞습니다. 단,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을 솔직히 말씀드리면 미 국무성이 좋아할 리는 없을 것이죠. 근대 자유주의 부르주아국가들이 단두대를 그 ‘자궁’으로 하고 있지만 그 탄생의 고통을 망각하려 하는 것이지 적극적으로 사고하려 들지 않는단 말입니다. 

    러시아는 그렇다 치고, 단두대라는 천하명약의 맛을 제대로 모르시고 계시는 아등(我等) 동방예의지국의 대감님네나 영감님네, 그리고 그 이하의 거상(巨商) 벌족(閥族)들도 아무래도 중세후기에 사병들을 거느리고 평민들을 마음대로 칼로 치곤 했던 구라파주 후작과 남작들의 흉내를 열심히 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SK왕국 왕자님의 거동

    예컨대 SK왕국 왕자님의 거동을 한 번 보시지요. 감히 왕자님의 궁궐 앞에서 불평불만을 나타내는 등 그 무서운 불경죄를 저지른 나이 든 백성에게 손수 곤장을 친 왕자님에게는, 16세기의 불란서와 달리 호위하는 사병(私兵)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조총을 든 사병보다 더 무서운 무기가 있는 것에요. ‘매값’이라는 표현방식에서 보여지듯이, 그에게는 국가가 제대로 과세하지도 못하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그 화력이 그 어떤 조총이나 대포보다 더 센 무기가 주어져 있는 것이죠.

    대한민국에서는 이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소(小)왕국이나 그 왕자님들은, 정말이지 못할 게 없습니다. 감히 일회용 소모품이 아닌 당당한 노동자로 인정해달라고 집단행동을 취한 ‘머슴’들에게는 음식물 반입을 금지해 ‘하찮은 상것’들을 마음대로 굶겨도 되고, 용역이라는 이름의 ‘사병이 아닌 사병’을 풀어서 그들의 갈비뼈를 뿌러뜨리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면, 재미삼아 말 안듣는 동업자를 포로로 잡아 물고문까지 해도 되는 것이고, 음주운전을 단속하려는 경찰에게 중상을 입혀도 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불패의 무기만 보유하면, 양민들을 구타하든 굶기든 짓밟든 하등의 손실을 볼 일이 없단 말이죠. 약 3년 전에 약간의 약주를 잡수셨던 그 왕자님을 감히 건드린 한 평민에게 하도 멋지게(?) 곤장을 친 한화왕국 군주님을 기억하십니까?

    한 때에 그 활극(?)을 보고 전국이 분노로 들끓고 있었지만, 과연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가장 진보적(!) 대학에 자랑스럽게 위치하는 ‘승연관’의 명칭은 바뀐 바 있었습니까? 바뀌지도 않았지만, 확언컨대 군주님께서 평민을 매로 가르치는 중대한 교화사업하시다가 아예 살인을 저지른다 해도 절대 바뀔 일은 없습니다.

    수령님과 대통령

    이 나라 대한민국은 그러한 크고 작은 군주님들의 사유물이고, 이 나라에서 서식하고 있는 소위 글 배운 이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배고픈 강사생활이나 비주류 삶을 살거나 이민가고 싶지 않는 이상 이를 다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조폭들이 다스리는 골목에서 건강히 잘 살자면 앞가림을 조심스럽게, 잘 해야 하는 법이죠.

    여러분, 딴 건 몰라도 자기기만이라도 하지 맙시다. 우리가 상식과 공법이 통하고 시민들에게 존엄성이 허용되는 근대적 사회에서 사는 게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복잡한 경쟁/담합 관계에 있는 수많은 영주님, 짱, 보스 들이 공동 관리하는 영토에서 살고 있는 것이죠.

    똑같은 논리로 운영되는 북조선과의 차이라면, 이 쪽에서는 ‘수령님’들이 단수가 아닌 복수고, 우리가 그들이 내세우는 대리인들 중에서 몇 사람을 골라 소위 ‘대통령’으로 만들거나 ‘국회’로 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반대자의 목소리를 완전히 죽일 수가 없다는 것, 이 정도입니다.

    공정선거가 있다는 게 마침 우리와 북조선의 아주 큰 차이처럼 보는 이들이 있지만, 대학이나 교회부터 주요 신문까지 사회의 모든 기관들이 그 ‘영주님’들의 손에 쥐어진 상태에서는 선거, 선거직 공무원의 역할이란 영주님들 사이의 교통정리이지 그들의 난폭한 ‘보호세 뜯어먹기’에 대한 그 어떤 본격적인 억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주님들도 문제지만, 매값을 매겨 평민을 거의 죽음으로 몰아간 ‘나쁜 주인’을 죽으라고 욕해도 총체로서의 ‘주인들’이 소위 국민경제를 잘 이끌어나가, 우리 모두를 살찌울 성장을 보장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고 사는 백성들이야말로 더 큰 문제입니다.

    현대판 봉건영주계급

    바스티유가 국민의 요새가 아닌 부르봉 왕가의 성곽이었듯이, 대한민국의 경제란 국민과 무관한 이씨 족벌, 정씨 족벌, 최씨 족벌 등등 ‘소왕국’의 사유물에 불과합니다. 남의 사유물들을 이렇게도 애지중지하고 자기 것처럼 여기는 이 동방예의지국의 백성은 참 착한 백성이죠?

    최씨 왕자님에 대한 분노는 지금 하늘 찌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지배자에 대한 도덕적 분노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현대판 ‘봉건 영주계급’ 전체를 그 안락한 자리에서 몰아낼 수 있는 노동계급이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조직화돼 있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 계급의식으로 무장돼 있는가 입니다.

    적어도 주인네들 만큼이나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뚜렷하게 의식해야 주인네들과 힘겨루기라도 할 수 있단 말에요.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 노동자계급은 ‘봉건 영주님’들에 비해 한참 떨어져 있는 것이죠. 그들은 이미 대자적 계급이지만, 우리의 계급적 각성은 아직 시작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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