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년 총선과 대선 그리고 사람들
        2010년 12월 02일 11: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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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 바람처럼 번개처럼 /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 // ….백번을 세월에 깎아도 / 나는 늙을 수가 없구나 / 찬바람 여지없이 태질을 한들 / 다시 끝이 없는 젊음을 살리라 / 구르는 마루 바닥에 / 새벽이 벌겋게 물들어 온다” (백기완 시 ‘젊은 날’ 중에서)

    두 개의 진보정당이 생기다 

    이제 두 개의 진보정당이 생겼다. 민중당과 한국노동당. 당연히 합쳐져야 했다. 사실 지하에서 나오기까지 많은 고민과 논쟁이 내부에서 있었다. 나오더라도 92년 4월에 예정되어 있는 국회의원 선거 후에 나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지하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주대환 등 지도부가 검거되고, 검거된 지도부가 기존의 사회주의 혁명노선이 가졌던 많은 부분을 폐기한다고 공개선언하면서 논란이 증폭되기도 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몰락은 더 많은 논쟁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합법적인 당이 되려면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2% 이상의 득표를 해야 한다. 아니면 당이 해산되게 된다. 해산된 당의 이름도 사용핳 수 없다. 당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진보정당에게는 큰 장벽이었다. 민중의 당도, 한겨레민주당도 그렇게 사라져갔다. 

    나는 반대했다. 그러나 민중당 지도부와의 정치협상을 통해 그 해 2월 양 당은 통합한다. 그리고 이어진 선거에서 불과 51명의 후보만이 출마한다. 출마한 사람들은 평균 6.45%를 얻었지만 후보수가 적어 전국적으로 보면 1.5%밖에 안되어 결국 당을 해산하게 된다.

    선거 이후 이우재, 이재오 등 민중당 지도부는 통합 약속을 깨고 당의 형식적 해산이 아닌 조직적 해산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어 4월 5일 민중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직 해체안을 다수결로 결의해 버린다. 그러나 이보다 상급조직인 중앙위원회는 4월 9일 이것을 뒤집고 조직을 유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자 과거 민중당의 주요 지도부는 퇴장해 버린다.

    이우재, 이재오 약속을 깨다

    이때부터 이재오와 김문수는 진보의 편에서 보수 정치인으로 변모를 시작한다. 역사를 길게 보기 보다는 ‘자기를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정치인들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준 사건이다. 수년에 걸친 진보정당 운동과 지하운동이 한 순간에 공멸하는 순간이었다. 남은 우리는 진보정당을 위해 4월 15일 진보정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나는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울산중구지구당 위원장이 된다. 

    그와는 다른 측면을 위해 그 때 얘기를 좀 더 할 필요가 있다. 민중당과 통합한 이후에 우리도 총선에 후보를 출마시키기로 했다. 후보는 내가 울산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현대자동차 해고자인 이상도였다. 2%의 관문을 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성지에서 후보를 낼 필요가 있었다.

    이상도는 생기기도 잘 생겼고 후보로서 모자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울산에서의 진보정당 운동은 소위 ‘비판적 지지 세력’에 의해 고통받고 있었다. 울산 노동운동의 대부(代父)라 할 권용목도, 이전에 민중후보로 출마했던 김진국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았다.

    조직의 리더였던 신지호(지금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다. 그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말하기로 하자)는 권용목과의 담판 결과를 가지고 우리를 설득했다. 권용목은 현대중공업의 전신인 현대엔진 노조 위원장 출신으로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포문을 연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후에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뉴라이트로 변신하여 민주노총을 비난하는 책을 쓰다 결국 비교적 이른 나이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인생이 무상하다. ‘삶의 가치’를 처음부터 일관되게 가지고 살아가기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뉴라이트로 가버린 사람들

    어쨌든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 권용목이 진보정당 운동에 함께 하는 대신 우리는 김대중 정당으로 출마하는 송철호라는 변호사를 지지하기로 하고 결국 후보를 사퇴시켰다. 그러나 선거 이후 권용목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후 신지호는 울산을 떠났고, 이어 ‘그대 아직도 사회주의를 꿈꾸는가?’라는 제목의 공개적인 반성문을 발표했다.

    그러든 말든 운동은 계속된다.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운동이란 아예 처음부터 없다. 그러나 소련의 몰락, 그리고 급속하게 진행된 조직의 발전적 해체는 개인들에게 고민과 과제를 남겨 두었다. 조직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전 같으면 함께 고민하고 해결했을 많은 일들이 개인의 몫이 되었다. 

       
      ▲92년 대선 당시 백기완 후보. 

    총선이 끝나고 민중당이 해산되었지만 진보정당을 향한 꿈마저 접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그 해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는 조직이 서로 다르지만 진보정당을 목표로 하는 조직들과 대화를 통해 4개 단체가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하고 내가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대책본부 울산본부장’이 된다. 

    누구보다 자기가 자신을 잘 아는 법이다. 나는 지도자감이 안된다. 다만 실무보조자로서 활동이 딱 맞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나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했다. 결국 맡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울산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 즈음 해서 전국 각지에서 울산으로 모였던 사람들도 하나둘 울산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미 지하조직이 없어지고 민중당으로 합치면서 신분이 공개된 마당에 굳이 연고도 없는 울산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터였다. 선거운동 역시 자신이 연고를 가진 곳에서 하면 더 잘할 수 있었다.

    마침 그 즈음 아내가 임신을 했다. 지하운동을 하면서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신분이 불안정했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은지 너를 임신한 엄마는 입덧을 시작했지만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살던 울산 동부시장 앞에서 참외를 팔고 있었다. 그걸 먹고 싶어했지만 단돈 1,000원도 없어서 결국 사줄 수가 없었다. 버티다 못한 네 엄마는 결국 처갓집이 있는 서울로 올라갔다. 

    대통령 선거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맞붙은 꼴이 되었다. 역사의 비극이고, 이후 지역감정이라는 민족의 비극이 생겨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영남권의 사투리가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우리는 두 사람의 차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김대중의 편에 섰다. 권용목도 그랬다. 울산에서 그 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던 ‘울산 새날을 여는 청년회’ 회장을 만났다.

    “비판적 지지가 맞는지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맞는지는 역사가 판명할 일이다. 다만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상처를 주지는 말았으면 한다. 울산 같이 작은 도시에서 선거를 치르면서 감정을 쌓지는 말자.”
    “동의한다. 서로 열심히 하자”

    백기완 후보 2%를 넘지 못하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대통령 선거이기 때문에 후보가 전국을 순회했다. 울산에 오는 일정도 잡혔다. 우리는 3만 명이 들어가는 울산에서 제일 큰 축구장을 빌렸다. 들어가는 돈이 적었기 때문이다. 겨우 스피커 사용료와 기타 소소한 경비만 지불하면 되었다. 울산을 만들다시피 한 현대그룹의 정주영도 출마하여 직원들에게 아산 경작지에서 재배한 쌀을 나눠주던 그 곳이다. 

    나는 “언제 우리가 이런 장소를 써 보겠느냐?”고 설득하여 통크게 3만 명짜리를 얻긴 했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우리는 그만한 동원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육지책으로 전국의 현수막을 다 내려 보내달라고 해서 스탠드를 메웠다.

    그런데 마침 백기완 후보가 울산에 도착하던 날 같은 시간에 비판적 지지 세력은 현대자동차 앞에서 인기있는 국회의원들이 내려오는 행사를 현대자동차 정문 앞에서 열었다. 권용목도 그 편에 서 있었다. 어차피 선거이기 때문에 ‘신사협정’ 같은 것은 없었다.

    당시 비판적 지지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민주노동당을 하고 있다. 그것도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울산에서 시도의원을 하기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대선을 치렀다. 혼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접전 속에서 백기완 후보는 2%를 넘지 못했다. 그만큼 힘들었다. 너희가 오늘 보고 있는 진보정당은 바로 그런 과정과 헌신적 노력을 통해 성장해 온 ‘역사적 산물’이다.

    진보정당 ‘바지락’을 기대하며

    물론 그들이 그 정신을 제대로 살려가고 있는지 역시 역사적으로 평가될 문제다. 그러나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운동을 이어갈 몫은 이제 너희들의 것이다. 네가 다니는 학교는 학생회장 선거를 하려면 ‘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듣고 놀란 기억이 새롭다. 그 당을 통해 선거운동을 하고, 당선이 되면 당원들이 책임지고 이끌어 간다. 너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은지야, 니네 당 이름은 뭐니?”
    “바지락.”
    “엥, 그게 무슨?”
    “바꿀 건 바꾸고, 지킬 건 지키고, 즐겁게(樂, 혹은 rock) 하자는 뜻이야.”

    앞으로 너희가 만들 당의 이름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너희들이 그동안 진행되어 온 진보정당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어 내기를 소망한다. 진보정당 ‘바지락’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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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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