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와 노점상을 하다"
        2010년 11월 29일 09:54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누가 우리를 메말랐다 하는가 / 누가 우리를 증오로 뭉쳐졌다 하는가 / 만약 우리가 메말라 있었다면 그 이유는 / 너희들이 우리를 착취했기 때문이다 /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파업을 통해서 인간을 얻었다 / 아 살아 있는 시간을 얻었다…” (백무산 시 ‘동지의 눈물’ 중에서)  

    인민노련

    그 즈음해서 네 엄마와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이 보자고 했다. 대략 알고 있었던 조직이었다. 엄마는 89년 말, 최근까지  진보신당 대표였던 노회찬 등이 연루되어 21명이 구속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노회찬 전 대표는 이 사건으로 2년 넘게 감옥에 있었다.

       
      ▲인민노련 발행 [정세와 실천] 

    알지? 네 동생 은수가 "호빵맨"이라고 부르는 그 아저씨다. 인민노련은 이후 인천지역의 다른 조직은 물론 대구의 ‘프롤레타리아’ 등과 통합하여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이라는, 정부가 모르게 몰래 활동하는 소위 ‘지하당’을 만들었다.

    이미 그 조직에서 발간하던 [노동자의 길], [정세와 실천], [사회주의자] 등을 읽고 그 내용에 깊이 공감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주저되는 게 있었다. 

    경찰에 한번 끌려간 경험, 그것도 치안본부 옥인동 분소에서의 기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일단 잡히면 아는 것은 모두 실토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재주를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그게 두려웠다. 빨간 방, 파란 방, 노란 방의 기억이 다시 떠 올랐다.

    다른 하나는 굳이 지하당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었다. 물론 새로운 사회, 자본주의를 넘어선 세상을 바라는 꿈은 포기할 수 없는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하’라는 공간은 어둡고, 침침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당시 민중당이 내세우고 있는 다양한 강령은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삼갔을 뿐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전위 정당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은 전노협과 같은 노동조합 조직, 노동단체, 민중당과 같은 대중정당에 조직원을 파견하고 있었고 전국적인 지도 라인을 구축하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당시가 소련이 몰락하기 전이었다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었다. 여전히 러시아 혁명을 모범으로 삼고 있었을 때였다. 전국적인 대중 봉기, 그것을 효과적이고 적절하게 지도하는 ‘전위’가 있는 정당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러시아의 혁명적 시인 마야꼬프스키는 이렇게 그 당을 묘사했다. “당이란 – / 결집된 목소리들이 / 구속력을 갖추어 일으키는 폭풍 / 붙임성 있고 밝은 것 /…당이란 – / 수백만명을 이고 있는 어깨 / 하나가 되어 돌진하려는 노력의 산물 / 당은 건축물이 자라 하늘이 되도록 한다 / 우리가 서로서로 / 보살펴 주고 독려하게 한다 / 당은 – / 노동계급의 척추 / 당은 – / 불멸의 사명 / 당은 – / 유일하게 완성을 보증한다….” (마야꼬프스키 시 ‘내가 아는 한 노동자’ 중에서) 그런 당만이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시기였다. 

    나는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이 펴내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그들의 현실인식이 과장되지 않고, 실사구시적인 풍토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공감했다.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내가 가입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조직은 내게 울산으로 내려갈 것을 권유했다. 물론 부부가 함께.

    사실 권유라기 보다는 조직의 방침이었던 셈이다. 나는 마쳐야 할 일이 있어 먼저 네 엄마가 내려갔다. 돈이 없어 트럭을 한 대 빌리고 친구가 운전을 해서 울산으로 이사했다. 이삿짐을 내리는 데 거센 바람이 불어 신혼 때 산 장롱이 트럭에서 떨어져 부서져 버렸다. 그만큼 울산의 바람은 거셌다. 91년 초였다. 

    91년, 울산으로 가다

    울산. 노동운동의 메카.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포문을 연 곳. 90년 초 현대중공업 골리앗 농성 투쟁으로 주목을 받았던 곳. (참고 : 골리앗이란 높이 15미터 이상이 되는 배를 들어 올리는 거대한 기중기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싸운 거인 골리앗에서 따 온 듯하다) 결국 육, 해, 공군이 모두 동원된 공권력 동원에 의해 투쟁은 끝났지만 대공장 중공업 남성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곳.

    울산 동구 만세대(만세 부를 때의 ‘만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세대수가 10,000이라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옆에는 이천세대가 있다) 로 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현대자동차를 보았다. 

    버스로 몇 정거장이나 가야 끝이 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현대 정공. 남목 고개를 넘어서야 현대 프랜지와 현대 중공업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공장을 보았지만 한마디로 정말 장관이었다. 아침이면 오토바이 부대가 출근길을 가득 메웠다. 바로 신문에서나 보았던 바로 그들이었다.

    울산 민중당에도 조직원들이 있었고, 현대정공과 현대중공업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민중당에서 1차로 학습을 마친 사람들을 지하조직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나는 현대 자동차를 맡았다. 내려간지 얼마 안되어 현대자동차 해고자 한명을 소개받아 다방에서 만났다. 함께 학습할 것을 권유했다.

    “나랑 같이 사회주의 학습 한번 해 보실래요?”
    “아니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요?”
    “왜요? 뭐가 문제가 있어요?”
    “아니요. 다른 사람들은 사회주의 얘기할 때 입을 가리고 작게 말하곤 해서요”
    “사회주의가 무슨 죄예요? 괜찮아요.”

    <공산당 선언>을 공부하다

    그렇게 그를 만나고, 그의 소개로 다른 사람들 2명을 더 만나서 학습모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교재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었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쁜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마르크스만큼 현대에 영향을 준 인물은 없다. 통계에 따르더라도 세계를 움직인 100인을 뽑을 때 항상 선두에 그가 있다.

    특히 <공산당 선언>은 그 명쾌한 논리로 인해 유명하다. 너희도 시간이 되면 한번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이제는 세상이 좋아져서 쉽게 책을 구입할 수 있다. 정부가 책을 읽지 못하게 할 때는 기를 쓰고 복사하고, 번역해서 보다가 이제는 책을 안 읽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마르크스의 모든 책은 거의 다 번역이 되어 있다. 소련 등 동구권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했던 사회주의가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돈’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폐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다. 물론 동구권의 몰락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인지, 자본주의를 넘어서 대안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지는 지속적인 과제다. 

    당시 울산에는 모든 정파가 다 모여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남한 노동운동의 성지이니까. 조직에는 나 말고도 학생출신 운동가들이 많았다. 지금은 진보신당의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조승수를 만난 곳도 바로 거기였다.

    그는 울산 출신으로 아는 사람이 많았다. 돌아보면 웃기는 일이지만 지금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하는 ‘꼴통 보수’ 신지호도 있었다.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전개한 허동욱, 김형광 같은 사람도 있었다. 지금도 울산에서 계속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김호규도 있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전에 울산으로 내려간 사람이었다. 우리는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현대자동차 등 모든 계열사에 조직원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부부

    전국적인 망을 가진 조직에서는 월간지로 [길]을 펴내기도 하고, 지금도 나오고 있는 [매일노동뉴스]라는 것을 처음으로 만들기도 했다. 우리는 울산의 상황을 분석하고, 올바른 생각을 전하기 위한 지하 팜플렛을 발행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었을 때여서 주로 워드프로세서로 제작된 문서를 복사해서 사용했다. 기록이 거의 안 남아 있는 이유다.

    워드프로세서는 특히 출력할 때가 문제였다. 그걸 전담하는 친구는 출력할 때마다 고역을 치러야 했다. 워드를 칠 때도 소리가 거의 무전기 소리와 비슷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인쇄할 때에는 “찌익 찌익”하는 소리가 매우 커서 이불을 뒤집어 써야 했다. 한 여름에 마음을 졸이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작업하는 풍경을 한번 상상해 봐라. 

    만세대 아파트를 얻은 우리 부부는 돈이 없었다. 주위에는 현대자동차 하청회사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하고 현대백화점 앞 등에서 노점상을 했다. 옷을 팔았는데 옷은 엄마가 동대문 평화시장 등에서 사왔다. 한번은 한 종류의 아기 옷이 정말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었다. 

    "우리 앞으로 이 옷만 가져다 팔면 되겠다"라고 좋아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우리가 원가계산을 잘못했던 거였다. 결국 원가보다 싸게 판 셈이었다. 아줌마들은 귀신같이 그걸 알았다. 

    옷 파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했다. 그럴 때면 엄마가 설문조사 같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기도 했다. 한번은 정말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내가 용접하는 조그만 공장에 취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활동을 위해서는 두 달만에 그만 두어야 했다.

    항상 돈이 문제였다. 그런 경험을 한 나는 지금도 이주노동자단체나 비정규직, 장애인활동가 단체에 작은 돈이지만 후원을 한다. 너희들도 시민사회단체나 ‘가치’를 가지고 운동하는 단체에 대한 작은 지원을 하면 좋겠다. 의외로 그 작은 돈들이 큰 힘을 주기도 한다. 이상하게도 친한 친구들은 술을 사주기는 했지만 돈을 주지는 않았다. 

       
      ▲백골단에 체포되는 노동자. 

    백골단 해체 투쟁

    울산에 내려간 지 얼마 안 된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미 그전에도 경찰의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학생들이 있었다. 백골단 해체를 위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백골단이란 하얀 화이바를 쓰고 집회 도중 체포를 전담하는 특수부대였다. 그들의 폭력은 아주 잔인했다. 

    이후 결국 그들은 역사의 무대뒤로 사라졌지만 최근 이명박 정부는 백골단과 비슷한 경찰 체포조를 부활시키고 있다. 울산에서도 투쟁 집회가 열렸다. 현대중공업에서 시작해서 남목고개를 넘어 현대자동차에 다다르자 이미 대열은 수천명에 달했다.

    효문 사거리를 넘어 작은 언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최루가스 냄새를 중화하려고 폐타이어를 태우는 연기가 자욱했고, 화염병이 날았다. 오토바이 부대는 이와 별도로 시내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 광경을 한번이라도 보여 주고 싶다. 정말 장관이다. 여기까지는 여느 집회와 같았다. 그런데 다른 하나가 있었다. 대오 뒤에 있는 나이 먹은 고참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아직도 못 뚫었나? 허. 우리가 조금 젊었으면 바로 뚫었는 데 지금 놈들은 힘이 없어.”
    “머라 카노? 술이나 한잔 하자”

    그러면서 대오 뒤에서는 막걸리를 한잔 하는 거 였다. 신기했다. 그들이 가진 여유를 보았다고 할까? “형님, 조금만 기다리소. 내 가서 뚫고 올테니”하고 달려가던 젊은 노동자들도 떠오른다. 결국 5월 2일 노태우는 간접적으로 사과했지만 백골단 해체를 위한 투쟁은 계속되었다. 

    지하실에서 벗어난 노동당

    91년 12월 15일 한국사회주의 노동당은 지하실에서 벗어났다. 그즈음 해서 소련이 붕괴했다. 지도부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한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이행 등으로 이제 더 이상 비합법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노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합법정당을 통해 의회민주주의의 정치공간을 적극 활용하여 노동자들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해 나가는 방향으로 대대적인 노선 전환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달았다. 

    실사구시를 중요시한 조직은 그 직전에 “소련 공산당은 노태우 군부정권과 비슷한 독재집단이다”라는 글을 실어 조직 내외에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조직에 대한 믿음을 가졌었다. 그리고 그런 정세를 고려하여 그 전까지 러시아 혁명을 모범으로 한 ‘전통적인 당 건설 노선’을 폐기하고 ‘한국노동당’을 준비하는 ‘노동자정당건설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92년 1월 19일 마침에 공개적으로 5,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었다. 

    나는 조직 내 소수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것은 그리 쉬운 게 아니었고, 많은 고민과 갈등이 따르는 것이었다. 여러가지를 따져 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동에 있는 무역전시관인 코엑스에서 열린 이 대회에 함께 참석한 나는 가슴이 저미는 기쁨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웅장하게 불려졌던 "가자, 가자, 저 자유의 땅에 억센 팔과 다리로 / 수천년 이어온 생산의 힘으로 새 세상 만들어내리 / 가자, 가자, 저 폐허의 땅에 푸르른 생명 위해 / 참자유 평화 참평등 위한 새 세상을 위해…."라는 노래는 지금도 좋아하는 노래고, 그 노래를 들을 때 마다 그 감격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는 발기인 대회 직전인 1월 11일 주대환 대표 등 4명을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 결성사건’으로 구속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