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력-훈육 부수고 성적 감수성 탈환하라"
        2010년 11월 23일 09: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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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학》은 더 이상 “커피 한 잔 하실래요?”라는 말로 접근하는 남자들이 사라져버린 한국 사회의 풍경을 환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남자들은 왜 사라졌나?

    정작 자신은 그런 경험을 못했지만, 어린 시절 선배들이 그런 경험담을 털어놓을 때면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기를 은밀하게 꿈 꿔왔던 목수정은, 4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2003년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런 풍속이 절멸해버린 서울의 거리를 목도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오로지 직관 하나로 사랑에 발 들이고 몰두할 수 있었던, 살아 있는 존재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모험이자 자기 확장의 과정인 야성의 사랑법을 잃어버린 것일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첫 번째 장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인류의 축적된 경험으로 물려받은 성적 감수성, 야성의 사랑법이 ‘훈육’이라는 명목 하에 어떻게 억압당하고 훼손되는지를 말해준다. 두 번째 장 ‘위선, 연애불능의 사회’는 어릴 적부터 우리를 억압한 소위 ‘성 모럴’이 부모를 포함한 모든 권력의 지배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논리임을 말해준다. 과거에는 유교나 기독교 등 종교적 탈을 썼으나 지금은 ‘스펙’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논리와 보다 노골적이고 뻔뻔하게 결합한 현실을.

    마지막 장 ‘야성의 사랑학’에서는 감추어 두었을 뿐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생득적인 사랑의 감수성을 발현하는 것이야말로, 성과 사랑의 문제에서 발생되는 억압뿐 아니라 자기 삶 전체를 쇼윈도 속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타자적 시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길임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이 책에 걸쳐 있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는 ‘부끄러움’, 혹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해방이 아닐까? 언제부터 우리는 거절당하는 사랑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우리는 사회에 거절당하는 우리의 존재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통찰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수치로 여기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 우리 부끄러움의 역사가 나 자신이 품고 있는 거울이 아니라 부모나 사회가 설정한 거울에 비추어봄으로써 작동하기 시작했을까? 아니 나 자신의 거울이란 게 있기나 했을까?

    부끄러움 혹은 타인의 시선

    그 부끄러움의 정체 모를 강박의 역사를 이제는 대면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으로 부끄러워야 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 못하는 속에서, 고작 70~80년을 살다 가고 마는 우리 삶은 광활한 우주가 주는 기회와 모험의 에너지를 감지하지 못한 채 오로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시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블로그가 등장하면서 아이를 낳은 여성들의 육아일기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 안엔 익숙한 희생적 모성 체험도 있지만, 막 말을 배운 아이가 내뱉는 표현에서 깜짝깜짝 놀라는 어머니의 경이도 토로된다. 그런 어머니들은 말한다. 아이에게서 삶을 전면적으로 만나는 방법을 배운다고.

    어떤 어머니들은 그런 아이의 날것의 말에 ‘천재적’이라는 관형사를 붙여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자신이 그보다 더 천재적인 표현을 구사했는지도 모른다. 하늘은 파랗고 새는 운다는 그 고정적인 표현을 배우기 전에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방문하는 블로그 중에 놀랄 만한 육아일기를 쓰는 여성이 있었다.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는 딸아이가 언제부턴가 자신의 자그마한 성기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만지작거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때부터 딸의 그 성적 놀이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의식 저편에 묻어두었던 자기 생 최초의 성적 즐거움도 그런 혼자만의 놀이에서 출발했음을 기억해냈다. 그러면서 아기를 낳은 후 자신의 가슴이 단지 우윳병으로만 사용되면서 서서히 사라져간 자신의 여성성도 회복하려 애쓴다.

    딸의 성적 놀이와 어머니의 결심

    그제서야 결심한다. 어머니이기 이전에 매력적인 한 여성이었던 자신을 되찾을 거라고, 여성과 적대적인 세상에 맞섰던 결혼 이전의 자신의 용기를 회복하겠노라고. 내 자식에게 물려줄 가장 소중한 자질 역시, 세상의 편견과 맞서왔던 자신의 용기라고.

    그 어머니는 자신의 성적 에너지를 되살림으로써 잃어버렸던 자신의 야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지배 윤리로 겹겹이 싸여 있는 이 세상에 포박당하지 않고 스스로가 설 수 있는 야성을 자식에게 물려주리라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그 결심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는 이후 대안학교 교사가 되어 그 이전 대기업에 다닐 때보다 더욱 직업적 자부심을 느끼는 삶을 살고 있다.

    어떻게 만으로 갓 세 살을 넘은 딸이 자기 성기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면서 이 어머니가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삶을 되찾는 동시에 직업적 삶의 변화까지도 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학》을 꼭 읽어봐야 한다.

    세상의 모든 금기가 사실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기에, 단 하나의 금기에 복종하는 습관이 드는 순간 다른 모든 금기에도 복종하기 쉽기 때문이란 걸, 이 책은 통렬하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수정은 더 위험한 지점으로 나아간다. 아무리 진보적인 사람일지라도 쉽사리 건드리기 힘든 ‘효’라는 지점으로. 그녀는 어린 시절 ‘효숙’이라는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이름에 있는 ‘효’라는 글자 때문에 불편했던 자기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우리 사회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인 ‘효’가 불편했음을 고백한다. 효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실은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기 쉬운 질문이다.

    나의 ‘효’ 함정 돌파기

    개인적으로 그 ‘효’라는 함정을 어떻게 돌파했는지를 털어놓겠다. 30년 동안 나와 반목했던 우리 부모님과 나와의 화해는 뜻하게 않게 찾아왔다. 40년 동안 국가 공무원으로 살며 그것을 자랑으로 알았던 우리 부모님은, 그 후 퇴직 10년의 삶을 살더니 갑자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마라. 지금부터라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라 여기며 평생을 ‘찍소리’ 안 하고 그 직업에 희생하며 살던 부모님은, 퇴직 후 10년을 통해 스스로의 지나간 삶에 어떤 영광도 즐거움도 없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와 부모님의 화해가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부모님은 그토록 싫어하던 자식의 삶의 방식을 더 고수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목수정의 말마따나 효의 지표가 경제적으로 좌우되면 결국 허무해진다. 그 저변에는 자신의 야성과 직관을 누르며 살아온 한스러운 삶이 있고, 그 삶을 무작정 대물림하면 부모와 자식이 진정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순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부모가 자식에게 강요했던 ‘효’라는 관념은 내 부모 스스로가 자기 인생을 통렬하게 되돌아보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그때부터 나와 부모 사이에는 진정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성립했다.

    목수정은 말한다. 야성과 야만은 다르다고. 남들이 세운 질서나 관념에 그저 익숙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간이야말로 스스로를 야만의 존재로 머물게 한다.

    우리는 이미 수만 년 인간의 역사 속에서 물려받은 야성이 있다. 그 어떤 곳에서도 위협을 감지할 수 있는 생존의 더듬이, 그 어떤 달콤한 상황에서도 나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을 직관하는 능력 말이다. 그 더듬이를 세우는 것 자체가 위험일 수 있다. 더듬이가 없는 존재는 거부당하지도 않고 공격당하지도 않는다. 단지 죽은 듯 사는 무덤 안의 삶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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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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