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알바인생 고백록, 자유 또는 불안
    2010년 11월 23일 09: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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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헤드라인이 비정규 투쟁 소식으로 가득 차 있다. 현대자동차 하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문제가 폭발한 것이다. 먼저 투쟁의 대열에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위기극복이니 고용문제 해소니 입으로만 떠들어대고, 실제로는 비정규직을 영원히 비정규직으로 묶어두려는 자들에게는 역시 가운뎃손가락을 날린다.

과외에서 패스트푸드점까지

여기서 잠시 또 다른 비정규직의 이야기를 전한다. 멀리 갈 것 없이, 그저 내 얘기다. 돌이켜 보면 상경하고 10년 내내 비정규직을 헤맸다. ‘20대’라는 틀로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 것이고, 뭐 그리 생색내느냐 싶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다’ 겪어온 일 아니겠나. 다만 ‘같은 비정규직’이지만, ‘각기 다른 경험’ 위에 서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글이 작은 연대라도 될 수 있다면 좋겠다.

2001년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한 알바는 과외였다. 그러나 사촌동생을 상대한 것이었으니 알바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것이다. 그저 말 안 듣는 꼬맹이랑 놀아주었을 뿐이니까.(한 학기 내내 신림동에서 화양동, 화양동에서 일산, 일산에서 다시 신림동으로 도는 생활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제대로 알바를 시작한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서울역 패스트푸드점 알바. 알바 입문에 ‘단계’가 있다고 하긴 뭣하지만, 편의점, 패스트푸드, 주유소, PC방이 거진 그럴 것이다. 여느 알바들처럼 주방을 청소하고 패티를 굽고 햄버거를 ‘조립’했다.

당시 ‘돈까스 버거’가 제일 안 팔렸는데, 덕분에 점심은 상부의 지시로 언제나 돈까스 버거였다. 급여야 최저 시급으로 받았으니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땐 그것도 고맙다고 넙죽 받으며 일한 것 같다. 학생회에서 활동하다가 ‘뭔가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라고 생각하던 시점에서, 나는 뭐든지 일하고 싶었고, 배워보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생계보다 호기심이 더 컸던 것 같다.

평범한 알바였지만, 그 안에서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알바들은 대부분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었지만, 매니저들은 대개 연상이기 마련이었다. 이들은 또 알바에서 매니저로 올라간 케이스였기 때문에, 그만큼 알바들과 곧잘 친해지곤 했다.

"노조? 그런 거 만들면 큰일 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일해야겠다고 생각했건만, 매니저 누나와 잠깐 같이 있게 되었을 때 문득 질문해버렸다. “알바들은 시급도 되게 낮게 받는데, 알바나 매니저들은 노조 같은 거 안 만들어요?”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노조라니. 그런 거 만들면 큰일 나!”

겨울방학이 끝나면서 일도 그만두었다. 이미 학생회에는 마음이 떠나간 상태였고, 어느새 고시원 방세며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활동하던 만화단체에 더 마음이 끌려서 학교생활은 점점 방치하던 때이기도 했다.

마침 만화단체에서 같이 활동하던 녀석이 알바 자리 하나 소개해줬다. 캠프에서 애들이랑 좀 놀아주면 되는 알바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지, 싶어서 녀석과 같이 간 곳은 ‘어린이 경제교육 캠프’. 애들한테 ‘기업가 정신’을 길러주는 훌륭한(?) 프로그램에 어쩌다 끼어들고만 것이다.

K자동차 공단 노동자의 아이들에게 CEO니, CFO니 하면서 역할을 나눠주고 회사를 만들어서 시장에 뛰어들라고 가르치지만, 아이들은 다행히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만약 너무 잘 이해한 애가 있었으면 머리를 몇 대 쥐어박았을 거다. 자본가를 타도하자!) 그저 애들이 다치지 않고 재밌게 보내기를 바라는 걸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애들을 한 군데 모아놓고 K자동차 홍보 영상을 틀었을 때, 그걸 바라보는 아이들이 환호하면서 오로지 K자동차 밖에는 연호하지 않았을 때, 나는 귀를 틀어막는 수밖에 없었다. 교육을 빙자한 세뇌를 일상적으로 받아서인지, 회사 이름을 지어보라고 할 때도 K자동차, 상품 이름(상품이라고 해봤자 찰흙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이지만)에도 K자동차를 어김없이 붙여버리고 마는, 경직된 상상력에 또 한 번 슬퍼졌다.

"군대는 2년짜리 알바"

그 다음해, 모처에서 하던 청소년 참정권 운동을 마치고 난 뒤에는 신림동(녹두거리)에 있는 보드게임 카페에서 일했다. 낮에는 학교, 밤에는 알바를 병행하다가 결국 휴학을 하고 일에만 몰두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일로 도피하면서 삶을 방기했던 때가. 마냥 재밌는 일만 하고 싶어 하는 습성은 못 버린 채로.

S대 출신이거나 고시생인 알바들과 어울려 영어로 된 매뉴얼을 해석하며 내 해석이 맞네, 틀리네 하던 생활이었다. 1년 반 뒤 가게가 문을 닫고, 예의 군대 문제가 코앞에 다가왔다. 아직 군대 가는 게 무서웠던 나는(정확히는 군대 가서 맛이 갈 게 무서웠던 나는), 편의점이나 보드게임 판매 알바를 전전하며 시간을 미뤄왔다. 그것도 한계에 부치던 2005년에야 겨우 마음을 다잡고 군대에 갔다. 군대도 2년짜리 알바라고 생각하면서.

2년 단기 계약직 알바를 마치고 다시 상경해서는 프랜차이즈 주점에서 보름쯤 일하다가 모 공기업에 들어갔다. 순전히 친구 덕이었는데, 직함도 ‘위촉연구원’이니 꽤 그럴싸해보였다. 막상 들어가서 한 일은 특허 자료를 요약해서 서버에 입력하는 게 고작이었다.

주말에는 틈틈이 다른 친구가 일하던 바(bar)에 가서 잡일을 했다. 그때부터 알바에 ‘경험’이라는 고상한(?) 수식을 붙이지 않았다. 고생은 그냥 고생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단정지을 뿐이었다. 그저 통장 잔고가 쌓여가는 게 낙일뿐인 답답한 생활이었다.(그조차 새 학기 등록금으로 깔끔하게 날아가 주셨다. 땡큐!)

주말도, 목적도 없는 생활에 지쳐갈 때, 광화문에 촛불이 켜졌고 나도 가끔씩 광장을 찾았다. 그러나 다시 생활에 쫓겨 이내 자리를 뜨곤 했다. 그 즈음 회사를 그만 두고 바에서 밤새 일했다. 복학할 때까지만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일은 그 다음해 여름과 그 다음다음해(그러니까 올해) 봄 여름까지 질기게 이어졌다.

자유와 불안정

홍대는 어쨌든 홍대다. 내가 일한 곳은 말이 바(bar)지, 주말에는 클럽이 되어버리는 가게였다. 인파를 헤치며 손님이 비운 병을 모으고, 바닥에 깨진 맥주병을 쓸어 담고, 칵테일을 만들고, 안면 익힌 손님이랑 수다를 떨다 보면 문득 허무해지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나, 하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에서 도망친 채 당장의 돈벌이에 급급해오지는 않았을까.

낮밤도 바뀌고, 사고방식과 생활패턴도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는 통에, 나는 번번이 다시는 그 가게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돈이 모자란다 싶을 때는 어김없이 다시 가게를 찾았다. 그저 해온 대로 하는 게 편했을 뿐이다. 그걸 깨달았을 때, 다시 그만두었다. 또 다시 일하게 될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들은 일관되지 않다. 또 죄다 서비스업, 그러니까 감정 노동이었다. 써놓고 보니 역시 지금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에 비해 턱없이 얄팍하고 보잘 것 없는 경험이다. 두드러지게 차별받은 적도, 또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고 요구할 것도 없었다. 그저 자유롭고 유연한 비정규노동 시장에서, 그야말로 자유로이 노동력을 판 한 사람의 감정 노동자로서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자유’일까? 생활이 불안정할 자유, 마음이 불안정할 자유, 타인과의 관계가 불안정할 자유. 그것이 나의 자유라면 그런 자유는 이제 그만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 자유는 쉽게 내게서 떨어지려 들지 않을 것이다. 현대차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른 비정규직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불안에 맞서 연대 투쟁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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