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투사와 착한 중산층, 누가 폭력적?
        2010년 11월 19일 11:11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어제 오슬로에서 아주 노르웨이적인 겨울의 하루를 보냈습니다. 영하권 추위로 땅이 얼어버리고 시무룩한 하늘에서 햇빛도 별로 안보이고 곳곳에서 눈이 꽤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울적한 하루가 끝을 향하고 있었을 때에 노르웨이의 얼어붙은 땅보다 더 울적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노르웨이에서 나는 ‘유령’이다

    저희 학과의 가장 착한 선생으로 알려지신, 저의 가장 친한 동료 류백사(劉白砂)선생님께서 항암 치료 끝에 유명을 달리 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집에 와서 오랫동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제 몸둥이가 식량을 축내면서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이 소위 ‘삶’의 의미 – 내지 그 의미의 결여 – 에 대한 생각만을 자꾸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 옆 연구실에 계셨던 류 선생님께서는 저보다 춘추가 두 배 높으신 분이셨기에 "우정을 나누었다"고 이야기하면 느낌이 좀 이상합니다. 그런데 나이 차이나 인생경험의 차이가 대단했음에도 저와 류 선생님으로 하여금 매일 저녁마다, 모든 동료들이 다 퇴근하고 나서 같이 만나서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게끔 하는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었습니다.

    저도 류선생님도 – 사민주의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본질상 자본주의적 사회인 – 노르웨이에서는 말 그대로 ‘유령’이었습니다. 유령이라는 게 딴 게 아니고 어느 곳에서 ‘물리적으로’ 살고 있음에도 그 곳에 속하지 않는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몸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전혀 딴 곳에 있는, 그런 존재 말이죠. 우리 둘은 그러한 유령이었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우정 이상의 우정을 나누었다 해도 어폐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 류 선생님도 그러셨지만 자본제 사회의 근본부터 수용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입니다. 인권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것이야 다 좋은데, 석유를 팔아서 번 돈을 저임금 노동력을 쮜어짜는 중국대기업에 투자하면서도 ‘중국 인권’을 만날 들먹이고 사는 노르웨이 정치인들을 볼 때마다 저나 류선생님은 역겨워했을 뿐입니다.

    인권? ‘나’만 내지 ‘우리’만 누리는 인권은, ‘나’ 내지 ‘우리’의 번영을 위해 희생되는 타자가 그 어떤 인권도 향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과연 무슨 뜻이 있는 것인가요? ‘나/우리’의 인권만큼이나, 누군가에게 그 생존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 때에 그 누군가와 연대해야 하는 의무감은 중요하지 않나요?

    타자들의 고통에 잠못 들다

    한 개인, 내지 한 집단의 고립적 생존이라는 것이 만물이 다 얽히고 설킨 인연으로 연결돼 있는 인드라망과 같은 세계에서 아주 무의미하다는 것, 몸둥이를 타고 나 또 다른 몸둥이들과 부딪치면서 사는 이상 타자에 대한 의무가 권리보다 훨씬 일차적인 것이라는 부분을 우리가 굳게 믿었어요.

    여기에서 한 가지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연주의’나 ‘관계론적 세계관’은 그 누명 높은 국가주의나 집단주의와 아주 무관한 – 또는 국가주의와 집단주의의 반대편에 서는 – 것입니다. 제가 남한의 국가와 자본가들을 혐오하는 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류 선생님도 중국의 ‘자본화된 공산당’ 통치배들을 경멸하셨습니다.

    그녀가 생각하셨던 타자는, 일차적으로는 중국의 ‘화평적 굴기’를 위해 심신의 모든 힘을 다 바쳐 폐기처분돼야 할 선전(深玔)의 민공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고국의 무수한 생명들이 국가와 자본의 이중적 억압과 착취를 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 한 그녀는 불행했습니다. 아주 불행하셨습니다.

    아무리 직장과 가정에서 모든 것이 다 잘 이루어져도 평안하게 사실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일찍 떠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역만리에서 누군가가 고생한다는 사실에 잠을 편안하게 잘 수 없는 이 심리를, 자본제 사회의 일반적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도 소련 초기의 혁명가요 한 곡을 듣지 않고서는 작업도 못하고 잠도 못드는 것처럼, 류선생님께서도 40~50년 전의 중국 영화들을 아주 애호하셨고, 그 시대의 노래들을 자주 들으셨습니다.

    공산투사와 선량한 중산층

    그 시대의 폭력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미 시대에 맞지 않은 집단주의적 사고를 흠모하는 것도 아니지만, 저나 류선생님에게 노동계급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허름한 군복을 입고, 고장난 총을 잡고 반동 백군과의 싸움터로 나가는 붉은 군대 병사나, 일본 졸병들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쳐주어서 일본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주겠다는 각오로 항일항쟁에 나섰던 연안시절의 팔로군 영웅들이 형제자매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시대적으로 불가피했던 폭력성이 있었다 해도, 그들에게는 타자가 유의미하게 존재했던 것이고, 그들이 타자와 자기자신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고, 타자를 위해서 자율적으로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서 자신이 속하는 계급의 여타 타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에 노출시키면서 불가피한 폭력을 행하는 그 당시의 공산투사보다는, 비록 본인이 총을 잡을 일이 없어도 아프간에 파병되는 살인자들의 살육 행위를 가능케 만드는 세금을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내는 미국이나 노르웨이의 ‘선량한 중산층’은 더 악질적으로 폭력적이지 않은가요?

    전자의 경우에는 폭력과 몸으로 부딪치면서 그 문제에 대한 성찰이라도 해볼 수 있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제력이 저지르게 하는 폭력에 대한 관심마저 없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런데 저도 그렇고 류선생님도 그러셨지만 왜 ‘전체주의적’ 공산투사들을 흠모할 수밖에 없는지를 대다수의 우리 노르웨이 제자들에게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걸 시도할 때마다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 부딪치곤 하는 것이죠. 그러한 의미에서는 우리는 여기에서 철저하게 타자, ‘유령’들이었습니다. 뭐, 어디를 가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과 같은, 특유의 반동성이 아주 짙은 나라로 가면 더욱더 그렇겠지요?

    공산주의와 이성적 삶의 방식

    가장 가깝게 소통했던 분이 조상들을 뵈러 가셨기에 초혼의 예를 하면서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제가 느끼는 감정은 통상적 슬픔과 약간 다릅니다. 사실, ‘저 세상, 시공간이 없는 영원의 세상을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차라리 해방감에 가깝습니다.

    ‘거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우주의 존재 자체가 아주 아주 미미한 한 티끌, 아주 짧은 한 순간에 불과할 것이고, 이 지구별에서 나고 자라고 크고, 병들고 결국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는 수많은 몸둥이들이 그저 가을에 지는 나뭇닢과 똑같이 보일 것입니다.

    인간 몸둥이의 태어남도, 자람도, 생존도, 병듦도, 죽음도 결국 고통입니다. 태어날 때도 우는 소리 내고, 돌아갈 때가 되어도 끝내 공포를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고, 고통을 받을 때가 많은 게 중생의 몸둥이죠. 그러한 우리 삶의 조건들을 생각해보면, 몸둥이들끼리 그 고통을 약간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서로를 타자가 아닌 자신의 분신으로 알고, 서로를 챙기고 서로의 아픈 것을 만져주는 게 가장 이성적인 삶의 방편으로 보일 것이겠죠.

    공산주의란 사실 다른 게 아니고 바로 이와 같은 사바세계에서의 이성적 삶의 방식, ‘고통’이라는 일차적 사실에 대한 철저한 앎에 기반되는 삶과 죽음의 태도죠. 공산주의란, 죽음이라는 궁극적 진리를 직시하고, 이해하고, 그 진리의 입장에서 세상의 나머지 부분들을 보고 있는 중생들이 할 운동일 것입니다.

    그러면, 네가 죽고 내가 살자는 식의 우승열패적인 자본제 사회적 삶의 방식은 과연 무엇인가요? 무명(無明)과 아집, 집착, 탐진치로 인한 집단적 정신착란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특징이란, 자본제적 정신착란이 심한 사람일수록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의사도 간호사도 없는 정신병동

    그러니 4대강이 파괴되는 것부터 세계대전들이 벌어지는 일까지, 인류의 역사가 의사도 간호사도 없는 정신병동의 역사를 방불케 하는 부분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신병동을 다스리면서 결국 살인방화할 수밖에 없는 가장 태심한 환자를, 그나마 정신이 비교적으로 맑은 사람들이 제압하려고 시도할 때에 세상이 그걸 보고 ‘과격’이니 뭐니 비난하니 참 한심한 일입니다.

    하여간, 슬퍼하기보다는 시공간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서 영원으로 돌아가신 분을 어쩌면 축하드려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픈 게 이 정신병동에서 남은 우리들의 가까운 미래입니다. 확언컨대 여기에서 권세를 부리고 있는 가장 태심한 중환자들이 이제 머지 않아 서로간의 텃싸움을 벌이면서 우리까지도 거기에 총동원시키려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 때에 가서 그들을 제압하여 우리 전체에 대한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