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념할 때마다 생각나던 사람”
        2010년 11월 17일 03: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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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40년 전 자신의 버스비를 털어 시다 여공들의 고픈 배를 채웠던 청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거침없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그다. 그리고 그의 이름 뒤에는 자연스레 ‘열사’란 말이 따라 붙었다.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엔 여전히 청년, 비정규직, 여성, 고령이란 이름으로 무수한 현대판 시다들이 존재하고 있다. 노동계는 “열사정신 계승”을 외치며 그가 몸소 실천한 ‘기득권을 버린 연대’를 담고자 한다. 하지만 그 ‘열사’라는 이름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이에 <레디앙>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는 공동으로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2010년을 살아가는 각 세대와 현대판 시다들을 통해 ‘전태일’과 그의 ‘정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0대에서부터 50대까지 각 세대가 바라보는 ‘세대공감, 전태일’, 기륭전자, 동희오토 등으로 상징되는 비정규직 ‘현대판 시다와 전태일’, 다양한 세대를 통해 들어보는 ‘오늘 왜 전태일 정신이 필요한가’에 대한 시선 ‘전태일, 그리고’ 등 3가지 각기 다른 소재로 2010년 전태일을 만나보자. <편집자주>

    내게 노조활동은 신천지 충격

    스물여섯의 가을이었습니다. 노동조합의 ‘노’자도 몰랐던 제가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랜드노동조합 창립발기인이 되어 노조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노조간부가 되었습니다. 근로기준법부터 하나하나 배우면서 노조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때 전태일 평전조차 읽어보지 못한 제게 노조활동은 신천지와 다름없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가장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던 곳은 바로 전태일이 목숨을 바쳐 탄생시킨 ‘청계피복노조’였습니다. 노조 창립 후 두어 달이나 지났을까. 당시는 전노협 시절이었는데 서노협에 서울지역의류업종 노조들이 연대하는 협의체가 있었습니다. 이랜드노조도 이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간부수련회에 참석하고자 찾아간 곳이 허름한 청계천상가 건물에 위치한 청계피복노조였습니다.

       
      ▲홍윤경 전 사무국장(사진= 이선옥) 

    그날 밤, 저는 그 동안 제가 얼마나 온실 속에서 살아왔는지 느끼고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노동조합의 소중함, 절실함,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슴 깊이 느끼고 눈물 흘렸습니다. 아마도 그 때 느꼈던 전태일의 뜨거운 숨결이 저를 16년간 쉼 없이 달려오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물아홉, 노조를 만들 때부터 멘토가 되어주시던 활동가 한 분이 40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미소와 격려를 잃지 않으셨던 그분의 장례식 날, 흩뿌리는 비와 함께 무척이나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모란공원에 처음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먼저 자리 잡고 계신 전태일에게, 저를 격려해주시던 선배에게, 부끄럽지 않은 활동을 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서른, 첫 장기파업에서 승리를 거두다

    서른, 첫 장기파업 끝에 완전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노조 창립 4년 만에 거둔 노조인정 싸움의 승리였습니다. 이제야 꿈꿔 오던 제대로 된 노조활동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가 지나기 전에 찾아온 IMF경제위기는 노동자들을 극심한 차별과 절망의 늪인 비정규직으로 내몰았습니다.

    서른셋,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걸고 했던 두 번째 장기파업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냈습니다. 그러나 장기파업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많은 이들이 승리의 성과를 누리지 못하고 떠나갔습니다. 이랜드를 필두로 한 자본들은 더욱 악랄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비정규직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습니다. 전태일이 반복해서 느꼈던 희망과 절망의 굴곡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서른여덟, 이제 잠시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 노조 위원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랜드노조 첫 여성위원장이었고, 거센 신자유주의 물결의 중심에 있는 유통산업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대변해야 한다는 부담스런 과제가 주어진 자리였습니다.

    그날 밤 밤새 뒤척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났는데 온 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간 함께 했던 동지들이 생각났습니다. 먼저 가신 선배 활동가가 생각났습니다. 전태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이 흰 눈 속에서 제게 얘기하는 것은 ‘희망’이었고 ‘동지애’였습니다.

    저는 제 안에 시들해져가고 있던 불꽃이 부끄러웠습니다. 다시금 주먹을 움켜쥐었습니다. 그 날부터 8살, 4살 어린 딸들은 엄마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잠드는 날이 많아졌고 엄마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묵념할 때마다 전태일을 생각하다

    마흔, 까르푸노조와 통합하여 이랜드일반노조를 만들고 사무국장이 되었습니다. 그 첫 선물은 회사의 해고였습니다. 그러나 해고가 제 발목을 붙잡지는 못했습니다. 대량해고를 예견하게 하는 비정규직법 시행을 코앞에 둔 시기, 정신없이 현장을 다니며 조직하고 투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510일 이랜드 파업, 제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장기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백회 이상 진행된 집회를 시작하며 묵념을 할 때면 항상 전태일을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더라면 무엇을 가장 크게 외쳤을까요? 그것은 너무나 당연히도 “비정규직을 철폐하라!”가 아니었겠습니까? 이러한 생각은 눈물 흘리지 않은 날이 별로 없을 만큼 힘겨웠던 510일 동안 저를 버티게 해 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흔 셋, 이제 전태일을 잃었을 당시 이소선 어머니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후 40년 동안 이소선 어머니가 치열하게 살아오신 길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찌 보면 제 인생에 가장 큰 고민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금 저는 16년간 쉼 없이 달려온 노조활동과 투쟁의 길을 잠시 내려놓고 쉬고 있습니다. 이제 13살, 9살로 훌쩍 커 버린 아이들은 무척 좋아라 합니다. 남편까지 셋이서 서로 제 옆에서 자겠다고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면서 작은 행복을 느껴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지난 16년을 돌이켜보았습니다. 세 번의 장기파업과 구속, 해고, 아이들과의 생이별, 이 모든 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 봅니다. 목표만을 향하느라 바로 옆에서 울고 있는 한 명의 동지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자신감에 충만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무엇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또 다른 출발점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전태일이 ‘아름다운 청년’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배고픈 한 명의 여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사랑, 추워 떠는 동료에게 자신의 점퍼를 선뜻 벗어줄 수 있는 사랑,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비난이나 냉소가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와 격려가 아닐까요?

    전태일이 그 젊은 나이에 온몸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은 암울했지만 절망만 하고 있을 순 없었기에 우리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그는 불꽃이 된 것입니다.

    전태일이 깊은 울림을 주고 떠나간 지 40년, 우리가 그의 진정한 후예가 되기 위해서는 혹독한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희망을 제 자신의 삶 속으로 가장 먼저 집어넣고 싶습니다.

    전태일은 아직도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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