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운동에서 민중당으로"
        2010년 11월 17일 10: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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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발 두발 전진이다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아래 총진군 /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 총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 노동자해방의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노래 ‘전노협 진군가’ 전문) 

    1990년 1월 22일

    1990년은 두 상징적인 사건이 같은 날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1월 22일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태우 등과 3당 합당을 했다. 같은 날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으로 전노협이라고 한다)가 결성되었다.

       
      ▲90년 1월 22일 602개 단위기업노조, 14개 지역노동조합협의회, 2개 업종노동조합협의회가 참여하여 전노협을 출범시켰다. 사진은 창립대회 모습.

    앞의 사건은 야당으로 대표되는 정치세력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김영삼은 80년대 내내 김대중과 더불어 민주화 투쟁의 정치적 상징이었다. 그런 그가 군부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대통령이 되는 대신 보수 세력의 이익을 지켜주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점차 군부가 정치에서 손을 떼더라도 자본의 이익을 지킬 수 있고, 그동안 군사 정부 아래서 이익을 본 보수집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던 셈이다.

    돌아보면 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이 물러갈 때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역사는 기록한다. 분신하여 죽고, 시위 도중 떨어져 죽고, 군대에 끌려가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고문당하다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똑똑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 투쟁의 산물로 민주화가 되자 언제 우리가 같은 편이었던가 싶게 돌아서고, 결국 김대중, 김영삼의 배신으로 인해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김영삼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멋진 말을 남긴 투사 중의 하나였다. 79년 박정희의 몰락을 가져 온 YH 여공들의 투쟁을 지원하기도 했고, 탄압에 맞서 단식투쟁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꿈꿔 온 새벽과 우리가 만들어 갈 새벽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의 새벽과 우리의 새벽은 달랐다

    역사란 냉정한 것이다. 누가 우리 편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저들은 ‘노동’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하루 14시간 일하고 돌아오는 길의 달빛이 왜 그리도 처량한지, 불 꺼진 차가운 방에 들어설 때마다 ‘벗어나고 싶다’고 자기도 모르게 읊조릴 때 다가오는 외로움, 초코 케잌에다 성냥개비를 꽂고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가 왜 그리도 즐거운지, 철야를 마치고 철길 옆 수박밭에 앉아 먹는 맛이 왜 그리 달콤한지, 잔업이 끝나고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어 먹는 ‘막사’의 맛과 그 속에 담긴 인간애를 모른다.

    아니 그들은 시위를 하기 위해 자기를 길러 준 가족을 버리고, 0.72평 감옥에서 면회도 직계가족 혹은 결혼할 사이가 아니면 안 되는 그 속에서도 꿈꿔왔던 새로운 세상의 꿈을,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과정을 써라”며 백지 다발을 놓고 지켜보는 뱁새눈을 가진 형사 앞에서 한없이 웅크러 들면서도 조직을 지키고, 사람을 지키기 위해 고뇌하는 그 마음을 모른다.

    오직 정권을 잡기 위해, 그리고 그 정치를 통해 자기와 비슷한 부류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에 노동자는 없다. 한국통신 노조가 파업을 했을 때 김영삼은 “그들은 국가전복세력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진실이다. 김대중이 대통령을 할 때 공공부문의 노동3권을 제약하는 법적 체계를 만든 것도 진실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과 한 때 같은 배를 탔으나 서로 다른 꿈을 꾼 것이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전노협 건설은 80년대 내내 노력한 노동운동의 총 결산이었다. 이미 노동운동은 학생운동을 넘어 성장하고 있었다. 불과 10년도 안 걸렸다. 학생들이 공장으로 간 영향도 부분적으로나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노동자 스스로의 각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80년대 중반 공장으로 갈 때 “학생운동이 10이면 노동운동은 겨우 2 내지 3밖에 안된다”라고 말했지만 이제 노동운동의 역량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셈이다. 그전에는 어용 한국노총이라는 노동조합이 모두였다. 

    왜 우리가 한국노총을 어용이라고 하는가를 먼저 말해보자. 어용(御用)이란 말 그대로 노동자의 이익보다는 자본과 권력,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세력을 말한다. 아용세력은 우리나라만 있는 게 아니다. 어느 시기, 어느 역사에서나 어용 세력은 존재해 왔다. 지배세력은 항상 노동자를 분열시킨다.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고, 남성과 여성을 나누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편을 가르고, 어용노조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헷갈리게 한다. 

       
      ▲금속노동자 출신 정치인 룰라와 함께 찍은 사진.  

    한국노총

    나는 99년에 브라질을 방문, 대통령이 되기 전인 룰라를 만난 적이 있었다. 룰라는 브라질의 어용 노동조합 세력을 “펠레고”라고 부른다고 했다. 펠레고란 말 안장 위에 올려놓은 양가죽 깔개를 말한다고 했다. 나라가 틀리고 언어가 다르지만 ‘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강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노총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는 등 노골적으로 군사독재 정권의 품안에 있었다. 물론 유신체제 아래서는 유신독재에 찬성했다. 김영삼 대통령 아래서는 사용자 단체인 경제인총연합회와 야합하여 임금인상을 억제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많은 돈을 지원받았다. 많이 달라진 것처럼 하지만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정책연합을 했다. 2009년도에는 복수노조와 전임자문제를 두고 또 다시 정권과 야합을 했다. 어용은 항상 권력의 방향에 관심이 있다. 그 대가로 그들 중의 몇 명은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역사는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닌 셈이다. 

    이런 조건이었으므로 당시 우리에게는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전국적인 노동조합의 구심을 만드는 것은 최대의 과제였다. 물론 이에 대한 이견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전두환 정권이 노동조합을 못 만들게 하니까 노동조합이 아닌 다른 것, 즉 ‘정치적 대중조직’ 등을 만들자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한국노총 안에 들어가서 한국노총을 개혁하자고도 했다. ‘노총 민주화론’으로 불리는 이 흐름은 당시 강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87년 이후 성장한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적인 중심을 만들려는 노력이 계속 되었고 일단 90년 전노협이 건설된다. 전노협은 이후 대공장 연대회의, 사무직 노동자들의 전국적 구심인 업종회의 등과 합쳐져 오늘날의 민주노총을 만들게 된다.

    민중당 부천시당 조직부장이 되다

    아무튼 역사적인 출발로 90년대가 시작되었다. 물론 정권은 전노협 창립대회 참가를 이유로 무려 141명을 연행하는 등 탄압을 가했지만 그런다고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당시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라는 노래가사와 “똥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묵묵히 진행되는 운동은 수많은 하잘 것 없는 논쟁을 잠 재운다. 

    나는 결국 공장을 그만 두었다. 2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무 것도 못했다는 자괴감이 컸다.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 일은 노조를 만드는 것보다 힘들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공장에 들어간 것은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공장에 다니고 있는 사이에 공장 밖의 세상은 요동치고 있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국 각지에서 지역별로 노동조합협의회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부천지역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역노동자들이 6.29 선언 이후 처음으로 지역 총파업을 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연대가 잘 되어 있었고, 노동운동이 활발했다. 인천 지역과 부평, 부천 지역은 이미 학생들이 많이 취업을 한 곳이기도 했다.

    내가 반월에서 노동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아내는 부평과 부천에서 활동을 했었다. 따라서 아는 후배들도 많았고 자리를 잡는 데 어렵지 않았다. 아내는 부천민중교육연구소에서 상근하면서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갓 만들어진 민중당의 부천시지부 조직부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교 1년 후배가 위원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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