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불가능은 있다" 증명하는 기념비
        2010년 11월 15일 04: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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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발간된 《굿바이 삼성》을 채 펼쳐보기도 전에,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국내 1위 인터넷서점 예스24와 함께 진행하던 저자 강연회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저자 강연회 차질

    장소를 대관해주기로 했던 롯데시네마에서 갑자기 대관 일정을 문제 삼으며 난색을 표했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이 난색 앞에서는 “이미 일정까지 다 이야기되어 있던 것 아닌가요” 같은 이야기가 무색해질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배경색이 바로 온 국민이 사랑하는 ‘파란색’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의 회장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했을 때 삼성의 임직원들은 욘사마를 맞이하는 일본 여성 팬에 필적하는 열광적인 환영을 선사했다. 이것은 일종의 ‘개선식’이었는데, 패망한 적의 이름은 ‘대한민국’이었다.

    심판을 하겠다던 사법은 이들의 무고함과 왕위의 승계를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덕분에 오히려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회장님의 귀환은 대한민국의 그 어떤 비루한 법도 회장님의 발목을 잡을 수 없는 한국사회의 ‘끝판왕’이 되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임직원들은 그런 집단의 일원이라는 자부심과, 잘못해서 눈 밖에 나면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공포 사이의 어딘가 쯤에서 두 팔을 번쩍 들어 만세를 부를 수밖에 없었을 터다.

    사실 삼성과 나의 관계라면 얼마 전까지 사용하던 휴대폰 하나와, 새로 산 컴퓨터 속에 꽂혀있는 램(RAM)정도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제법 서먹할 법한 사이임에도 내가 좀처럼 ‘삼성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희박하고 복잡한 희망

    기본적으로 글쟁이라는 업 자체가 무력감과의 끝나지 않는 싸움으로 점철된 것이지만, 삼성이 주는 무력감은 ‘스케일’이 다르다. 이것은 마치 끝도 없이 고도(Godot)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성의 없는 문자가 한 통 날아온 것이다. “못 갑니다. -고도 올림”이라고.

    물론 권력은 당연히 자본과 야합하고 세상이 힘센 자들의 뜻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관습헌법 같은 것이다. 그러나 ‘폭로자’, ‘내부 고발자’ 같은 존재들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정의가 승리를 할 줄 알긴 알더라”라는 희박하고 복잡한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완벽한 조건을 가진 내부 고발자’와, ‘증거’와, ‘특검’을 통해서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보드리야르가 말했던 ‘시뮬라시옹’, 아무리 ‘진실’을 찾아내겠다고 땅을 파고 들어가도 “다른 곳을 파시오”라고 써 있는 지도만 끝없이 나오는 그 세계가 눈앞에 도래한 것이다.

    오늘날 건재한 삼성의 존재는 어떤 불가능함을 선언하는 기념비 같은 것이다. 정치권력의 변화에 걸었던 기대는 ‘참여정부’라는 작위를 하사받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사법에 걸었던 기대는 (공식적으로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떡값’과 ‘장학생’으로 마무리 되었다. 경제적 압박(예를 들어 불매운동)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았다. 삼성이 뿜어낸 실타래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곳에 얽혀서 거미줄처럼 사회를 포박하고 있다.

    사실 삼성의 반대자들이라고 흔히 생각되는 이들도 삼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시민단체, 진보언론, 진보적 학자들도 직간접적인 연관선상에 있다. 삼성을 반대했는데 엄한 기업에서 단체 후원을 중단하거나, 다른 곳들까지 덩달아 신문에 광고를 끊거나, 알고 보니 연관된 프로젝트나 펀드를 받고 있었다거나와 같은 뭐라 말도 못할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삼성, 최종심급

    한국 사법계의 로얄 패밀리를 비판한 책의 뒷면마저도 삼성의 로고가 천연덕스럽게 점령하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풍경도 있었다. 이쯤 되면 삼성에서 받은 것이라고는 휴대폰의 무상 A/S 한 번이 전부인 나조차도 이 끈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를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에 헌신을 더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속해 있는 학계라는 공간, 혹시 모를 미래에서의 불의의 습격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떠다니기 때문이다.

    삼성이 결코 나를 생각하거나, 고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래야한다. “국가가 무엇을 해줄지를 생각하지 말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케네디의 유명한 말은 나에게 와서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되었다. “저기요… 저는 그저 소비자인데요?”라는 항변은 공허하다. 그것은 이미 삼성이 ‘기업’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법’이나 ‘최종심급’ 같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삼성이 나의 이러한 관심을 달가워할지는 모르겠다. 아니 사실 관심이 없을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관심’을 보일지 모른다는 요상한 공포는 좀처럼 떨쳐내기가 어렵다. 음모론에 빠진 사람처럼,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처럼,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하고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나는 신경증자처럼, 나는 오늘도 이렇게 불현듯 삼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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