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술공부 때문에 만난 전태일"
    By 나난
        2010년 11월 15일 11:4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전태일, 40년 전 자신의 버스비를 털어 시다 여공들의 고픈 배를 채웠던 청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거침없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그다. 그리고 그의 이름 뒤에는 자연스레 ‘열사’란 말이 따라 붙었다.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엔 여전히 청년, 비정규직, 여성, 고령이란 이름으로 무수한 현대판 시다들이 존재하고 있다. 노동계는 “열사정신 계승”을 외치며 그가 몸소 실천한 ‘기득권을 버린 연대’를 담고자 한다. 하지만 그 ‘열사’라는 이름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이에 <레디앙>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는 공동으로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2010년을 살아가는 각 세대와 현대판 시다들을 통해 ‘전태일’과 그의 ‘정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0대에서부터 50대까지 각 세대가 바라보는 ‘세대공감, 전태일’, 기륭전자, 동희오토 등으로 상징되는 비정규직 ‘현대판 시다와 전태일’, 다양한 세대를 통해 들어보는 ‘오늘 왜 전태일 정신이 필요한가’에 대한 시선 ‘전태일, 그리고’ 등 3가지 각기 다른 소재로 2010년 전태일을 만나보자. <편집자주>
     

    원고 청탁을 처음 받고 망설임이 앞섰습니다. 전태일 열사처럼 대의를 위해 내 삶을 희생하고 있거나,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운동을 하고 있거나, 뭔가 직접적으로 전태일의 삶과 연관되게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저는 노동운동을 하는 것만이 전태일 열사와 연결되는 것이라는 수직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김경미 씨.

    하지만 전태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서 단순한 사고를 한풀 벗겨내고 나니, 제 운명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바꾼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전태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바꾸게 한 사람

    고등학교 3학년 때 ‘논술’ 공부 차원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가 제 인생에 얼마나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995년, <씨네21>에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감상문을 공모한다는 기사를 보고 200자 원고지에 쓴 감상문을 보낸 일이, 결국 저를 베를린영화제라는 낯설고 특별한 공간으로 초대했습니다. 생애 처음 해외에 가게 된 경험은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영화제도 영화제였지만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를 들고 베를린에 함께 가게 된 많은 분들이 제 인생의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친손녀처럼 대해주시던 전태일 열사의 이소선 어머니, 70년대 봉제공장과 노동현실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해 준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인숙이 언니, 나를 며느리 감으로 점찍었다며 예뻐해 준 열사의 절친 최종인 아저씨, 그리고 친근하게 오빠라고 부르라며 영화 뒷이야기까지 재미있게 해주었던 기획시대 대표 인택이 오빠, 지방 도시의 어느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지적인 매력과 유머로 가득했던 선옥이 언니, 옆집 언니처럼 친절했던 안정숙 기자 같은 분들을 한꺼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 분 한 분 모두가 친절하고 재미있고, 자신을 낮추는 데 익숙한 분들이었습니다. 베를린영화제에 가기 전에 가졌던 낯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들이 하는 노동운동에 대해 막연하게 가졌던 두려움과 편견 같은 것들은, 겨울 베를린 거리에 쌓여 있던 눈과 함께 스르르 녹아버렸습니다.

    베를린 영화제,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

    사사로운 곳에서 정내를 느낄 수 있도록 매번 보여준 친절함과 마음 씀씀이들은 모두 15년이 지난 지금도 제 모든 감각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인숙이 언니에게 짧게 이런 메모를 남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운동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소 보여주신 감동은 잊지 않겠습니다.’

    어쩌면 그 글은 저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 같은 것이었고, 결국 그 글이 제 인생을 바꾸게 된 것 같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 나를 낮추는 사람이 되겠다’ 하는 다짐을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베를린영화제에서 만났던 기자처럼 취재를 하고, 글을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다짐은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안과 밖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내게 그 분들의 모습 투영되었기를 바랐습니다.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한 장면.

    그런데,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늘 신문사의 한 구석에서 주류기자이기보다는 묵묵히 일하며 자기 몫을 하던 신문사 동기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것입니다. 눈 내리던 어느 겨울날, 새벽에 전화를 통해 친구의 죽음을 전해 듣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친구의 죽음을 겪으면서 저는 큰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같은 공간에서 신문을 만들었지만, 그 친구의 삶은 제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내 공간에서 오히려 나의 관심 밖에 있었던 친구의 부재는, 내가 얼마나 내 문제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주변 사람을 돌보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게 전태일이었던 친구

    그렇게 신문사 동기들과 10년의 추모기간을 거치면서, 그 친구를 겨우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에 대한 부채감을 씻어낼 수 있도록 해마다 기일이 되면 제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돌아보니 그가 제게는 바로 전태일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고 영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대학 졸업 후 영화제작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는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통해, 누구는 왕가위의 <동사서독>을 통해 영화팬이 되었다고 하지만, 저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통해 한국영화의 팬, 씨네키드가 된 특이한(?) 경우입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 감상문에 당선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늘 달고 다녔습니다.

    이력서 한켠에 영화 감상문을 모집한 주간지 <씨네21> ‘당선자’라는 훈장을 달았고, 그 훈장은 저를 특이한 영화 이력자이거나, 글 잘 쓰는 사람으로 포장해 주었습니다. 저는 독특하게 ‘한국영화 씨네키드’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영화의 성공기 때 남들이 부러워하는 주류 영화제작사의 기획실에서 일했고, 외화 수입으로 얻은 보너스까지 합쳐 번 돈을 모두 들고 뉴욕으로 갔습니다. 계속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낯선 도시에서 저는 새로운 사람들과 일과 삶을 만났습니다. 뉴욕 아시아 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일하는 지금의 남편도 만났고, 세상과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예술가들, 활동가들, 소수자들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합니다. 전태일 40주기가 내겐 어떤 의미일까. 전태일을 알게 된 지 15년이 된 지금, 서울과 뉴욕을 오가면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는 요즘, 우연히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95년 멋 모르고 방문했던 베를린영화제에서 제가 프로듀싱한 영화의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우연하게도 그 영화의 제목은 ‘청계천 메들리’입니다. 아마도 전태일은 제게 필연인가 봅니다. 돌아보니 15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자리에 제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