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다"
        2010년 11월 15일 09: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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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아무리 /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 나에게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 시 ‘거대한 뿌리’ 중에서)  

    10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게 10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동안 2년 3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감옥을 우리는 ‘학교’라 부른다. 그 학교에서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렇게 열정만 있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20대가 30대로 성장했다.

    대학 3년보다 더 긴 공장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지금까지의 얘기가 너무 무섭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그러나 너희처럼 평범하고 그저 학교 선생님이 되기를 소망했던 한 사람의 얘기를 통해 ‘시대’를 보길 바란다. 나만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다. ‘운동권’이라고 얘기했지만 사실 시대가 운동하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 시대를 공유한다.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예로 들어보자. 촛불 때도 가끔 불렀고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도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다. 그는 촛불이 한참일 때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들으며 뼈저리게 반성해다”고 말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라고 시작하는 서정적인 노래다. 그러나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라는 구절에서 시대를 은유한다. 군부독재의 ‘찌는’ 탄압은 시련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라는 ‘결단’을 하게 된다. 

    찌는 더위와 폭압에 맞선 싸움을 시작하는 거다. 일본에도 비슷한 노래가 있었다. ‘도모요’라는 노래로 비슷한 음과 서정적인 곡조다. 도모요는 우리말로 ‘친구여’ 혹은 ‘동지여’라는 정도의 뜻이다. “어둠이 짙을 수록 새벽은 가깝다”라는 정도의 노래로 동경대 투쟁에서 많이 불렸다고 한다. 

    노래의 힘

    아무튼 이 노래는 내가 밧줄을 타고 시위를 할 때도 불렀다. 그런 감동을 너희가 느껴 본 적이 있을까? 여러 사람이 하나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입술을 보고 알게 되는. 밧줄에 매달려 끌려가면서도 멀리 식당 앞에 있던, 선뜻 시위에 결합하지는 못하던 사람들의 입 모양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또 한번 85년인가 종로 YMCA 앞에서 가두시위를 할 때였다. 건물 위에서는 미리 들어간 학생들이 현수막을 늘어뜨리고 유인물이 마구 떨어졌다. 우리는 도로를 점거하고 구호를 외쳤지만 순식간에 물려든 백골단에 의해 양쪽 도로에 올라섰다. 그 때 아침이슬이 불려졌다.

    버스가 지나가는 길 건너편에 나와 같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래는 종로2가를 메아리 쳤다. 작게 그러나 웅장하게 불렸던 그 노래가 주는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바로 그런 사람들로 인해 나는 그 시대를 살 수 있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개인의 삶을 얘기하고 어떤 때는 시대적 흐름을 말해서 조금 헷갈리기도 하겠다. 그러나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역사란 “우리 모두가(너희들을 포함해서) 온 몸으로 써가는 것”이다. 개인의 삶 속에 역사가 있고, 그 역사 안에 우리가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나마의 자유는 지난 투쟁의 결과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보다 더 자유로워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본(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양김씨의 욕심과 군인의 집권

    그러기 위해,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전까지 설령 내가 포기한다 해도 운동은 지속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민주화 투쟁을 위해 온 몸을 다해 싸우다 먼저 죽은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일지도 모른다. 새삼 오늘을 허투루 살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살다보면 역사적인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87년이 그랬다. 바야흐로 역사를 바꿀 계기였다. 특히 국가보안법이라는 시대의 악법을 폐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의 욕심에 의해 다시 군사정권이 집권에 성공함으로서 과거를 청산할 역사적 기회를 상실했다.

    전두환은 물러갔지만 그 뒤를 이은 노태우에 의해 군부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노태우는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경찰을 동원한 감시체제를 이어 나갔다. 또 전두환 때부터 3S 정책을 썼는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3S란 Screen, Sex, Sports의 약자다. 그 때부터 ‘애마부인’ 같은 야한 성인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기 시작했고, 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스포츠에 대한 과도한 국민적 관심사가 시작되었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도 시작되었다. 월드컵에 열광하기 전에 우리는 그 이면을 볼 필요가 있다. 

    “국제행사인 올림픽을 위한 ‘환경미화’를 한답시고 정부는 그해 5월 말부터 강력한 집중단속을 펴 7월 1일까지 노점을 완전히 근절시키겠다는 방침을 정한 바 있다. 전투경찰, 백골단, 형사, 순경, 구청직원, 동사무소 직원, 방범대원까지 총동원하여 폭력적인 단속에 나섰다”

    “5월 12일 종로 2가에서 불구의 몸으로 액세서리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단속 나온 이정관 의경이 반항한다고 권총을 들이대었다. 그는 ‘쏘아 죽이겠다. 너 같이 지저분한 것들은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다’ 며, 아주머니를 질질 끌고 파출소에 가 면상을 구둣발로 걷어 찼다.” 거기는 바로 대통령 선거 기간에 노태우가 직접 와서 노점상들의 손목을 잡고 “당신들의 고통을 이해한다. 당신 같은 분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한 곳이었다. 

    레닌과 김일성

    88년 올림픽 바로 직전에 협성계공이라는 공장에 다니던 문송면이라는 15세 소년이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자. 1년 이상 고통을 호소했지만 결국 시체가 되어 모란공원에 묻혀야 했던 노동자였다. 지금도 모르지, 어디선가 그런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 얼마 전 삼성공장에서 백혈병으로 8번째 죽었다는 박지연이라는 20대 여성의 죽음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어쨌든 노태우의 집권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발전은 더디게 그리고 수많은 희생이 있은 이후에나 가능한 것으로 되고 말았다. 보수집단은 조직적으로 후퇴할 시간을 벌었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87년이 기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보수집단과 손을 잡고서야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6월 항쟁에도 불구하고, 7월 노동자 대투쟁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았고 투쟁은 계속 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노동3권 즉 단결권, 단체교섭권, 파업권이라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은 보장되지 않았다. 

    너희들에게 광주항쟁 이후 그 동안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각성이 있었다고 했다. 따라서 그에 맞는 새로운 조직들이 필요했다. 세상을 바꾸려면 그에 맞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당’이라는 사상과 의지의 일체감을 이룬 조직이었다. 물론 당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일방적인 경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뻬떼르스부르그 해방동맹’으로 시작되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당’으로 성장하여 결국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상공시킨 레닌의 혁명당은 새로운 길을 찾는 우리에게 ‘하나의 나침반’이었다. 물론 북한 김일성 주석에게서 모범을 찾은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사회’를 꿈꾼 사람들의 조직들

    당시 우리가 많이 읽은 것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였고, 다른 이론을 찾은 사람들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에서 길을 찾았다. 아무튼 순진하게 민주주의만을 외치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광주항쟁으로부터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새로운 내용을 가진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ML당 사건,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 등 조직사건이 계속 발표되기도 했다. 모두 자본주의와는 ‘다른 사회’를 꿈꾼 사람들이 만든 조직이었다. 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된 윤철호라는 사람은 재판정에서 “그렇소, 나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말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동안 유령처럼 떠돌던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주의가 공공연하게 얘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하에서 ‘당’이라는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와 동시에 합법적인 영역에서 정치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누구는 개량화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반대했고, 누구는 야당이 분열되는 것을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89년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흐름은 90년 초가 되어서야 민중당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건 90년대 역사를 통해 말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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