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주의는 왜 우월한가?
        2010년 11월 12일 04: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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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사회주의’를 여전히 유효한 – 어쩌면 지금으로서 유일하게 유효한 – 대안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반응을 자주 접하곤 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진보’란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 작업으로 국한됐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대안 제시란 거의 이단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회주의는 시대착오적인가?

    마치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다르게’ 믿는 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듯이, 우리 나라의 ‘현실성이 있는 진보주의자’들이 시장의 권력을 인정하는 사민주의까지는 기꺼이 거론해도 시장 권력에 대한 본격적 도전을 이야기하는 걸 아주 아주 꺼립니다.

    물론 일면으로는 이해도 할 수 있는 입장이죠. 획기적 내지 본격적 변혁이란 역사적으로 봤을 때에 별로 평화스러울 때도 없는 것이고, 늘 온갖 부작용들을 수반하니까요. 수술에 대개 전신 마취가 필수적으로 따르듯이, 본격적 변혁이란 광기 내지 폭력성을 띨 확률이 높은 밑으로부터의 총동원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또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수술은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워도, 수술을 받지 못해 일찍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것보다 일단 낫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순의 정도를 생각해보면 정말 아주 본격적이고 대대적인 수술없이는 별 수 없단 생각이 절로 듭니다. 시장을 ‘수정’한다기보다는 상당 부분 아주 배제해버려야 뭔가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적 접근이 아니면 정말 별 수 없는 하나의 좋은 사례는 고등교육계 비정규직 노동자(시강강사, ‘연구교수’, ‘초빙교수’, ‘비정규 트랙 교수’ 등등 – 무늬는 아주 아주 다양하지만 궁극적 본질은 같습니다) 문제입니다.

    지금 국내의 고등교육계에서는 비정규직 교원의 수(약 7만명)는 정규직 교원의 수(약 6만5천명)를 능가하고 있으며, 교양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연구논문의 주된 생산자로 기능하는 그들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자본주의 국가로는 할 수 없는 일

    그들이 비정규직으로 남아 있는 이상 과도한 저임금 노동(낮은 수업 단가로 인한 너무나 긴 노동시간)으로 말미암아 강의노동도 즐겁게, 재미있게, 준비를 제대로 많이 해서 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고, 불확실성과 불안함 속에서 장기적 계획을 세워 연구노동도 제대로 못합니다.

    저임금, 불안, 정규직 관리자들의 횡포, 그리고 대학당국의 무시와 각종 부당노동행위 등으로 고등교육계 비정규직으로 약 4~5년 이상 있어본 사람이라면 가볍게는 고질적 스트레스부터, 무겁게는 신경질환과 자살충동까지 느끼는 것은 일반적 경험입니다.

    문제는, 현존의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는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시고 계시는 이 분들의 입장을 본질적으로 개선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장, 즉 고교 졸업자의 수가 점차 줄어드는 상황에서는 정규직을 둘 새로운 대학의 설립도 기대할 수 없고,(오히려 지금 전남, 전북의 사립대학들부터 상당히 많이들 퇴출될 위험이 크다는 건 업계의 상식입니다) 사실상 이윤 극대화를 노리는 자본주의적 경제 주체인 오늘날 대학들이 웬만큼 정규직을 두는 걸 피해 특히 인문학 등 ‘이차적이고 불필요한 분야’에서 정규직 증설을 극도로 억제시키는 것도 –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이상 – 국가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고등교육계 비정규직의 비극의 씨앗은 바로 그 유명한(?) 수급 법칙입니다. 수요,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 티오의 수도, 그리고 공급의 상당 부분, 즉 국내 박사학위 소지자들의 배출량도 똑같은 교육계 업체(소위 ‘대학’, 그러나 실제로 ‘교육계 기업’으로 부르는 게 더 정확할 듯합니다)들이 좌우한다면 과연 어떻게 됩니까?

    수급 불균형의 수혜자들

    티오의 수가 일부러 억제되고 ‘인건비가 저렴한’ 비정규직의 티오부터 늘게 되지만, 동시에 같은 대학이 돈을 받고 팔아주는 석사, 박사학위의 소지자들의 수는 억제할 것없이 마구 늘어납니다. 또 국내 학사 내지 석사 학위 소지자들이 외국 교육계 기업의 장사를 도와주면서 해외 최종 학위까지 대량으로 따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늘 억제되는 수요와 억제될 게 없는 공급이 서로 얼마나 맞지 않을는지 자명합니다.

    수급이 이렇게 맞지 않는 데에서는 그러면 누가 이득을 보는 것인가요? 맞아요, 바로 그 불균형의 원흉인 교육계 업체들입니다. 수급이 안맞아 공급초과 현상이 나타날 때에 가격이 내려가게 돼 있는데, 교육계 업체로서 이는 무엇이든 다 감수할 수 있는 ‘노예후보자’들의 안정된 공급이 보장돼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필하라 하면 입 다물고 대필하고, 논문 생산을 늘리라 하면 시키는 대로 초인적인 논문생산에 몰두하고, 한 학기나 일년 단위 계약으로 일하라 하면 무조건 감지덕지하는 그들이 존재하기에 교육계 업체들이 그 소기의 목표들을 달성합니다.

    ‘인건비 저렴한 인력’을 씀으로써 학교를 등록금과 국고보조금으로만 운영해 재단 이월금을 계속 쌓아두고, 땅을 사들이고, 건물을 새로 지어가면서 건설사들과의 주고 받는 ‘파트너십’을 발전시키고 논문 생산으로 경쟁자를 눌러 그 ‘세계적’ 랭킹을 높이고… 노예노동을 마구 이용해 (저들의 표현방식대로) ‘글로벌 브레인 파워’를 구축해보겠단 이야기입니다.

    한국 지식시장의 상대적 고립성으로 이 커다란 ‘지식착취공장’을 빠져나와 도망가기도 힘들고(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지만, 완벽하게 보편적 해결 방식은 못됩니다), 또 철저하게 원자화돼 있어 노예주들에게 집단적으로 맞서기도 힘들어, 정말 자살이 아니고서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이라고 거의 보이지 않는 이 공장 노예들의 참담한 상황에 자본주의적 국가가 몇 차례에 걸쳐 개입을 시도했지만, 모든 경우에는 역효과뿐이었습니다.

    지식착취공장의 노예들

    개입 능력도 상대적으로 약하고 본래적으로 노예주 계급과 한 무리에 속하는 국가인만큼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예컨대 비정규직 연구자들의 10년 동안의 안정된 연구여건을 보장해주겠다고 <인문한국>(HK)이라는 프로젝트를 3년 전에 시작했지만, 그게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안정된 환경에서 연구해보겠다고 그렇게 취직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길게는 3년, 짧게는 1년 내지 그 이하의 계약으로 연명하면서 ‘재임용 심사’라는 노예주들의 무기 앞에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교육계 업체들에게 ‘전임 확보율’ 등을 따지는 척할 때에, 기업은 그 말을 듣는 척해 ‘강의전임교수’, ‘연구전임교수’ 등 무늬만 전임을 2~3년짜리로 만들었다가 바로 갈아치우곤 하는 것입니다. 교육계 비정규직 노동자를 레몬처럼 짜낼 걸 다 짜내 그저 책임없이 버려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한국은 사회주의화됐다면 과연 이 교육계 비정규직 문제는 어떻게 해결됐을까요? 공급 쪽에서는 박사학위 소지자들의 배출을 그 ‘지도교수’의 허영심이나 대학 학위 장사 문제가 아닌 계획경제 운영의 문제로 삼아 전국적으로 적절히 조절했을 것입니다.

    즉, 박사과정 입학시험을 보다 까다롭게 해서 과정생 수를 줄이더라도 일단 졸업자의 취직을 보장하는 쪽으로 갔을 것입니다. 해외 유학 출발자들도 – 귀국해서 교육계 종사할 의사가 있을 경우에는 – 어떤 국가적 심사를 받아 그 수가 조절됐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수요쪽에서는 – 차후에 어차피 공립화될 운명에 처해 있는 – 사립대학들의 재정은 학생과 교원노조, 국가 등의 합동 운영위원회의 심사를 받아 재단 돈이 우선적으로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 줄이기와 강사들의 처우 개선에 쓰이게 됐을 것이고, 불요불급의 공사나 ‘국제행사’ 등등은 취소됐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아니면 대안이 없다

    강사들이 당연히 교원의 위치를 얻어, 그 해고는 특별하고 불가피한 상황(해당 강좌의 폐지와 대체 강좌의 설치 불가능함 등등)이라는 사유와 국가적인 대안적 직장 알선 없이 불가능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임교수는 강의와 연구 이외에 행정업무가 있는 만큼 그 업무에 따르는 행정업무 추가사례금을 받았을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강의 및 연구 업무에 따르는 본봉은 일체 교원들에게 동등해지게 됩니다.

    시간강사가 논문을 대필해주는 동안에 미국에 가서 골프나 치는 전임관리자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가고, 강사는 대학의 동등한 구성원이 됩니다… 꿈 같아요? 꿈은 전혀 아닙니다. 민주적 절차 (대학의 운영을 책임지는 학생, 교직원, 국가대표자의 합동운영위원회 등등) 등을 제외하면, 이와 같은 시스템의 상당부분은 이미 동구권 계획경제 국가들에서 실현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술적 발전의 차원에서는 그 결과는 꼭 나쁘지도 않았고요. 그 경험에다가 민주적 요소만을 제대로 결합시키면, 과연 우리가 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청사진이 그려지지 않을까요?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고등교육계 비정규직들이 진보신당과 같은 사회주의/사민주의 정당에 대거 입당해 거기에서 가장 왼쪽에서 "사회주의적 변혁"을 외치는 것은 맞았을 것입니다. 사회주의가 아닌 이상, 그들의 위치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방도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하시는 분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참,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들의 통상적 관념은 아무래도 ‘종교’에 가깝지 않나 싶네요. 믿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전혀 없어도, 그래도 그냥 자본주의를 무조건 믿는 것이죠. 이렇게 믿고 있다가 해방의 가능성들을 다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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