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경했던 운동권, 그곳에서 울었다
    태일아, 삶이 힘들 때 너를 떠올린다"
    By 나난
        2010년 11월 12일 07: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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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40년 전 자신의 버스비를 털어 시다 여공들의 고픈 배를 채웠던 청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거침없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그다. 그리고 그의 이름 뒤에는 자연스레 ‘열사’란 말이 따라 붙었다.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엔 여전히 청년, 비정규직, 여성, 고령이란 이름으로 무수한 현대판 시다들이 존재하고 있다. 노동계는 “열사정신 계승”을 외치며 그가 몸소 실천한 ‘기득권을 버린 연대’를 담고자 한다. 하지만 그 ‘열사’라는 이름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이에 <레디앙>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는 공동으로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2010년을 살아가는 각 세대와 현대판 시다들을 통해 ‘전태일’과 그의 ‘정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0대에서부터 50대까지 각 세대가 바라보는 ‘세대공감, 전태일’, 기륭전자, 동희오토 등으로 상징되는 비정규직 ‘현대판 시다와 전태일’, 다양한 세대를 통해 들어보는 ‘오늘 왜 전태일 정신이 필요한가’에 대한 시선 ‘전태일, 그리고’ 등 3가지 각기 다른 소재로 2010년 전태일을 만나보자. <편집자주>

    대학생이 되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학생운동이었다. 재수를 시작하던 무렵 혼자 외로이 집회를 다닐 때, 나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어깨를 맞대고 집회에 오는 사람들이 몹시 부러웠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나는 오랫동안 후일담 소설류가 제공하는 학생운동의 이미지를 동경했다. ‘형’ 이라는 호칭, 격렬한 토론, 사상공부처럼 이미 대부분의 20대에게는 너무도 낡아버린 그 장면들을.

    동경했던 운동권

    양심 있고 똑똑한 대학생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대학생이 되면 꼭 ‘운동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낭여행도, 연애도 아닌 그 삶이, 나에게는 청춘으로 느껴졌다. 아빠의 영향인지, 나의 사춘기를 가슴 뛰게 했던 몇몇 책들 때문인지, 진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철 들 즈음부터 나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운동권’이 되었다.

    대안 학교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괴롭다. 대안학교에 입학한 후, 괴로웠던 중학교 때의 생활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나는 철저히 자유가 아닌 방종을 누렸다. 한동안 생활은 엉망이었다. 매일 지각을 하고, 수업 태도는 엉망이고, 내가 하고 싶은 것 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독서 세미나도 하고, 풍물패도 했지만 내가 더 열심이었던 것은 나와 생각이 맞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잘난 척 시시덕거리는 게 아니었나 싶다. 처음에는 우쭐하고 들떠 있었다. 더 이상 아빠의 직업을 말할 때 우물쭈물하지 않아도 되는 곳. 내가 대안학교라는 곳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진보적이고 똑똑한 애라는 자만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무언가가 못마땅하고 성에 차지 않아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친구를 폭넓게 사귀지도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환경이니 인권 동아리에 열중할 때, 누구보다 그런 활동에 잘 어울릴 거라 자부했던 나는, 나만의 세계에 도취되어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밑천은 곧 바닥나고, 새로운 내실은 쉬이 채워지지 않았다.

    세상과 불화한 청소년

    중학교 때 나는 언제나 싸워야 했다. 때로는 마음 속으로만 싸우고, 때로는 겉으로도 싸웠다. 나는 가시를 잔뜩 세운 자의식 과잉의 외로운 사춘기 소녀였다. 약한 사람을 왕따시키는 비열하고 폭력적인 애들과 싸우고, 겨울에도 난로로 버텨야 하는 추운 회색의 학교 건물과 싸우고, 외국인 노동자나 민주화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비웃으며 떠드는 친구들과 싸웠다. 집에 돌아오면 끙끙 앓으며 울분 섞인 일기를 가득 써 내려갔다.

    고등학교에 오니, 따뜻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애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린 마음과 호기심으로 진지한 눈빛들을 반짝반짝 빛냈다. 아이들은 처음 해보는 연극이며 설치미술을 훌륭하게 해 낼 수 있을 만큼 재기발랄했고, 이랜드 사업장이며 새만금 집회에도 열심히 따라다녔다. 그 이전까지 나는 내가 마음 따뜻하고 정의롭고 성실한 사람인 줄 알았다. 누구보다도.

       
      ▲박인해.

    그래서 그렇지 못한 세상과 충돌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착하고 예의바른 이 세계와도 불화했다. 처음 이우학교를 찾은 날 오랜 방랑 끝에 마침내 내 집에 온 듯 편안했지만, 나는 이곳에서도 그다지 잘 해내지 못했다. 아, 이전의 외로움은 나를 단단하게 했지만 이곳에의 외로움은 견디기 힘들었다! 난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엉망이었다. 거기에서 오는 자괴감은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그 시절을 지나오지 않았더라면 대학에 와서 같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리라. 잘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됐던 것이 아니라 길을 몰랐으므로, 후회는 남지만 자책하지는 않는다. 자괴감과 행복한 추억들로 범벅된 그 시절은, 그래서 애틋하다. 그로 인해 대학에 간다면 내 안으로 파고드는 대신, 넓은 세상으로 나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정말 잘 해내고 싶었다.

    자석처럼 ‘운동권’에 빨려들다

    이제야말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떳떳한 사람이 될 기회였다. 내가 10대 때 갖지 못한 것들. 겸손하고 예의바르며,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낮은 곳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기로. 야심차게 결심하고 대학생이 된 나는 이른바 ‘운동권’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이게 내가 갈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자석에 이끌리듯이 빨려 들어갔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택배 기사들이 문자 한 통으로 해고되었으며, 누군가는 목을 맸다. 죽은 사람은 수없이 많은데 살인자는 끝내 없었고, 일하게 해달라는 노동자들은 그 여름 내내 쌍용자동차 공장에 물도 없이 갇혀 있었다. 공권력이 그들을 지붕 위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최루액을 쏘았다. 부끄럽게도 이 모든 일들은, 그 일이 얼마나 부당했고 투쟁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격렬했는가가 아니라, 나를 기준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내가 얼마나 분노했고, 얼마나 울었는지. 또 그런 뜨거운 분노와는 달리 일신의 안위란 얼마나 알량한 것이며, 스물 몇 살이 가지고 있던 정의감과 의지란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 도로에 비닐을 깔고 자며 여름을 보냈다.

    총학생회 선거를 치르고,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전경과 싸우고, 밀치고, 달리고, 빨리 뛰라는 선배들의 고함소리에 영문도 모른 채 뛰고 또 뛰었다. 매일 대자보를 붙이러 학교 곳곳을 달리고, 회의와 크고 작은 집회가 끊이지 않았다. 얼굴은 새까매졌고 옷차림은 후줄근한 채 땀 냄새를 풀풀 풍겼고, 술이 늘었고, 전공 공부니 소설책에는 제대로 손도 대보지 않았다.

    뜨겁고 치열했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탓인지, 때로는 함께 하는 이들의 질서, 방식, 언어와 문화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조직과 집단과 단결을 강조할 때면 숨이 막혔고, 체계와 질서는 권위적이었다.

    권위적 운동권 문화에서 폭력을 느끼다

    무슨 집회인지, 무엇을 위한 실천단인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유인물인지도 모른 채 가야 한다고 하면 갔고, 뿌려야 한다고 하면 뿌렸다. ‘싫다’고, 잘 모르겠다’고 하면 비겁해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과 내가 너무도 다르게 느껴져, 그곳에서도 나는 이방인이 된 듯 외로웠다. 불편할 수 있지만 조직적으로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설명했으면 차라리 납득을 했을 텐데, 현상을 해석하는 관점 자체가 달랐다.

    내게는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일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 내가 아직 어리고 동지애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한다. 나는 끊임없이 내게 무엇이 불편하고, 왜 불편한지 논리적으로 해명해야 했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언어와 의사소통 방식은 때로 나를 경악하게 했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왜 잘못된 세상의 방식을 빌려 쓰는지 모를 일이었다.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조직에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을 인정해 주는듯한 분위기가 못내 불편하면서도 나는 사랑과 인정에 목이 말랐다. 언제나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하고 안 맞는 것만 천지인 사람이 아니라 가슴이 뜨겁고 발바닥은 더 뜨거운 사람이고 싶었다.

    지난 겨울, 잠깐 동안 공장에서 일을 하며 합숙을 했다. 새벽에는 공부를 했다. 학습 시간에 주체사상이 등장하고 수령님이니 뭐니 하는 농담들이 오갈 때, 나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숨이 막혔다. 그 순간은 지난 시간을 통틀어 내게 가장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저들이 틀려서가 아니라 이제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어떤 것이라도 믿거나 공부해 볼 수 있지만 더 이상 함께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와 더 잘 맞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참 많이 울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학생활을 모두 이들을 중심으로 계획하고 떠올렸다. 이어질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 또 어떤 충돌이 일어날지 상상하며 숨 막혀 했고, 얼마나 많이 도망치고 싶을지 떠올렸다.

    가장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

    숨 막힘과 도망치고 싶어 하는 감정 모두 그러나, 그 안의 일이었다. 끝까지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이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 누구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갑자기 모든 것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저곳에서 한발을 쑥 빼고 나자, 바깥의 세상은 너무나 평온해서 낯설었다. 나만 빼고.

    "동지." 이런 말을 쓰는 것은 무척 쑥스럽고 자격도 부족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동지는 생각이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생각이 다른 그들도 내 동지였다. 내가 함께 했던 이들은 누구보다도 깊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스크럼을 짠 팔들은 단단했고, 내 손을 움켜쥔 그 손도 땀이 축축하게 배어나올 만큼 떨렸음에도 손을 놓는 법은 없었다.

    인간적인 유대관계는 깊었다. 자기 밥 먹을 돈도 없으면서 후배에게 술을 사주는 사람, 전경들이 몽둥이를 휘둘러도 후배 먼저 감싸는 사람,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지나치게 친밀하고 끈끈한 분위기가 때로는 숨 막히게도, 집단에 매몰되어 있는 듯도 느껴졌지만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빚지고 있는 기분이다.

    그 사람들이 나보다는 훨씬 대단한 사람들이고, 내게는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고, 뜨거운 청년들이다. 내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그들에 대해 부채감과 죄의식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들에게 뿐만이 아니다. 내 마음에는 무거운 돌이 살고 있다. 가지 못한 집회 소식은 마음을 무겁게 하고, 내 눈에는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젊은 나는 자주 세상을 부둥켜안고 끙끙댄다. 그 이후 대학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은 나와 생각이 더 비슷하지만, 나는 여전히 예전의 ‘동지’들을 인간적으로 더 좋아한다.

    생각은 다르지만,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그들

    그래서 지금 나는 ‘운동권’이라기보다는 시민단체에서 공부를 하고, 혼자 집회에 쫓아다니는 진보적인 대학생으로 머물러 있다. 그것이 때로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대학교라는 사회 안에서 이 부채감의 정체에 대한 혼란을 자주 겪는다. 이 만큼의 죄책감도 가벼운 것으로 느껴지다가도, 여느 친구들과 뒤섞여 있다 보면 그 죄책감이 도무지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비겁하고 게으른 사람이어서, 혼자서 정의롭기란 외롭고 힘겹다.

    지금, 매섭게 채근하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진보적으로 살기란 더 힘들다. 구속하지 않는 자유와 공동체와 정의가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무도 불러내지 않는 집회, 가지 않아도 질책할 선배와 비판할 친구들이 없는 광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혼자 읽는 마르크스는 더 어렵고 지겹다. 혼자서 하는 싸움은 힘이 약하다.

    스펙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대학 동기들을 향한 설득과 논쟁에 힘을 실어줄 사람도 없이 때때로 나는 작아지고 주눅이 든다. 망설이는 나를 다잡아줄 사람도 없다. 저쪽도 이쪽도 아닌 경계에 서있는 나, 혼란스럽다. 가끔은 헷갈린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뜨거운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태일아.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네가 죽었을 때 너는 스물 세 살이었다. 너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스물 세 살이면 자기 생과 사를 결정할 정도의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어른의 되기에는 안즉 멀었다. 고난이 사람을 철들게 하니 너는 지금의 젊은이들보다 훨씬 일찍 어른이 되었겠지만, 그래도 너도 괴로움도 꿈도 많고 사랑도 해보고 싶었던 청년이었을 것이다.

    문학, 그래. 지금 내가 하는 문학 공부를 네가 했으면 잘 했을지 모르겠다. 너는 사람을 사랑하니까. 내가 너의 시대를 살았거나 네가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우리는 선후배나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사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태일아, 너는 문학공부를 하면 잘 했을 거야"

    엊그제였나, 끓는 기름에 엄지손가락을 호되게 데었다.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고작 그 정도로. 불에 타서 죽는 건 얼마나, 얼마나……울컥 목이 메어 차마 생각을 잇지 못하며 너를 떠올렸다. 불길이 너를 집어삼키던 그 순간 일분 일초도 빼놓지 않고 계속 아팠겠구나. 엄마, 너무 아파요. 나 좀 살려 주세요… 이런 말들이 타버린 목구멍 속에서 잦아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를 떠올릴 때면, 네가 했던 말들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투사보다는 어린 청년이 생각난다. 어쩌면 죽기 전 엄마 무릎을 베고 울었을지도 모른다. 너도 사실은 죽는 게 무서운, 누구보다도 살고 싶었던,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었을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네가 그토록 바라던 그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이 때로는 나에게 달다. 그 달콤함과 집회가 열리는 광장의 칼바람 사이에서 때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기로에 서고는 한다.

    여유롭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 혹은 ‘아무리 옳은 일을 해도 돈도 없고 나를 희생한 채 그것만 해야 하면 괴로운 거야. 나는 나중에 그냥 돈도 적당히 벌면서 의식 있고 양심적인 시민으로 살자. 한겨레신문이나 보면서’ 같은 구체적이고도 우스운 갈등이 날 흔들 때, 외로울 때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을 찾는 물음들이 나를 괴롭게 할 때 마다 너를 떠올린다. 어쩌면 내 뿌리는 너에게 뻗쳐 있는지 모른다. 아. 죽는 게 두려웠으리라던 나의 추측은 잘못된 것일지 모르겠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는 죽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간 것이니까 말이다. 너는 언제나 나의 부채감이 정당하다고 답한다. 배달호, 김주익, 박종태와 같은 또 다른 너의 수많은 이름들이 스쳐 지나간다.

    질긴 끈으로 이어져있는 느낌

    이들의 죽음은 너의 죽음보다도 더 적은 사람들에게 얕게 기억되고 더 빨리 잊혀졌다. 오늘도 누군가가 죽는다. 네가 말한다. 학교 미화 노동자 아줌마가 계단 밑 창고에서 먹는 차가운 도시락, 하루 열 시간을 서서 일하고 한 달 팔십 만원을 받는 지난 겨울 만난 비정규직·정규직의 개념조차 없는 봉제공장의 시다 아줌마들, 바리깡에 밀려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칼을 기억해야 한다고. 이렇게 고민 많고 경계에 선 나약한 나라도.

    그렇게 너와 나는 질긴 끈으로 이어져 있는 느낌이다. 태일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뿌리 깊은 물음과 흔들리는 내 청춘이 너에게 빚지고 있다.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내게 한 부탁이었을까. 나는 오래오래 질문하고, 오래오래 괴로워 할 참이다. 아무도 죽지 않는 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 너는 언제나 내 안에서 부채감으로 나를 잡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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