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형제들, 월북과 전사
        2010년 11월 08일 10: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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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 /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 ….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며 /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정호승 시 ‘맹인 부부가수’ 중에서) 

    총무과에서 연락이 왔다

    하루는 2층 총무과에서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뜨끔했다. 총무과에서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신분이 탄로난 게 아닐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집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형들에게는 내 가짜 이름과 공장을 얘기해 두었었다. 뭔가 일이 생겼음에 틀림 없었다.

    공중전화를 통해 전화를 해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막내 아들이 감옥을 전전하고, 공장에 다니느라 잘 찾아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돌아가셨다. 문제는 공장에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말하면 그 사이에 친해진 친구들이 조문을 올 것이고, 당장 신분이 발각될 게 뻔했다. 주임을 찾았다.

    “저 오늘 조퇴하면 안 되나요? 친한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안 돼. 니 아버지도 아닌데 무슨 조퇴야.”
    “그럼 야근 하루만 빼 주세요.”
    “웃기는 놈이네. 니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 데 왜 그래?” 

    주임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결국 조퇴는 안 되고 점심시간이 되자 또 축구를 하게 되었지만 도저히 공을 찰 수가 없었다. 친구들도 이상하다고 했다. 작업이 끝나자마자 택시를 타고 병원 영안실을 찾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처음 노량진 경찰서에 연행돼 부모의 각서가 있어야 석방이 될 수 있었을 때, 두 말하지 않고 써주시곤 집에 도착해서도 한마디도 그에 대한 얘기는 없이 옷 한 벌을 주셨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약값 대신 받았다면서 “형들에게 뺏기지 말고 잘 입어라”라며 바바리 코트를 주셨다. 지금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형제들

    돌아가신 후에야 당신도 해방 직후에 감옥 비슷한 곳에 갇혔던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큰 아버지는 월북하신 사회주의자이고, 넷째는 국군으로 낙동강전투에서 돌아가셨다. 그게 우리 역사다. 월북한 큰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큰 아버지의 사진을 최근에야 볼 수 있었다. 50년도 넘게 사촌형은 몰래 감춰두고 있었다. 

    너희들은 모르는 얘기다. 연좌제란 남북간 대치 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북에 있거나 국가보안법 등으로 관계되면 나머지 가족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되는 그런 제도였다.

    셋째이던 아버지 역시 해방 공간에서 무언가를 하셨던 모양이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언젠가 어머니가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남편 옥바라지도 모자라 이제 자식까지 그러냐?”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돌아가신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런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를 이틀 결근하고 3일장을 치르고 돌아오니 다들 내가 친구에 대한 의리가 되게 좋은 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년이 넘자 몇몇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마침 성남 공장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들어 온 사람이 있어 함께 모임을 했다. 모임이라고 해봤자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노조민주화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토론을 하고, 같이 놀러가고, 다른 과에 있는 괜찮은 사람들을 파악하는 수준이었다. 그 즈음 해서 모임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내 신분을 밝혔다. 결혼을 앞둔 시점이었고 그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둑 장가를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의 2년이 다되어 갈 때였다. 

    “사실은 내가 송씨가 아니고 나이도 60년생이다. 그러니까 대식이 너는 형이 아니라 거꾸로 내가 형인 셈이다. 그리고 찬호 너는 나랑 동갑이 아니니까 앞으로 말 놓지 말고 형님이라고 불러라.”
    “지랄하고 있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냐? 한번 말 깠으면 그만이지.”

    "이제 형님이라고 불러", "지랄"

    그게 반응이었다. 몇몇은 놀랐지만 대부분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그동안 쌓인 신뢰도 있었고, 이미 신문 등을 통해 많이 보아온 때문이었다. 덕분에 결혼은 내 이름으로 할 수 있었다. 토요일에 결혼하고 1박 2일 수안보에 다녀 온 것으로 결혼은 했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천호동 자취방에서 혼자 지내고 주말을 이용해 부천에 있는 집에 다녀올 정도였다. 

    신분을 밝혔으므로 본격적으로 어용노조를 민주화할 생각을 했지만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해도 언제 뽑는지조차 공고하지 않았다. 선거 바로 전날 공고를 내고 바로 투표해 버렸다. 대의원은 회사가 지명했다.

       
      ▲88년 전국노동자대회 모습. 

    노조 사무실은 어용 위원장과 그 패거리들의 휴식공간에 불과했다. 성남과 동시에 일을 치르는 게 유리했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뭔가 계기가 필요했지만 쉽게 그럴 순간이 포착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는 이미 1년 전인 88년 연세대에서 ‘전태일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4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고, 89년 들어서는 현대중공업과 서울지하철 등에서 파업이 일어나는 등 모진 탄압을 뚫고서 대규모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공장지대가 아닌 뚝 떨어진 P사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강 건너 모토롤라와 아남전자, 대동화학 등에서도 투쟁이 일어났지만 우리 공장 노동자들은 그조차도 모를 정도로 다리 하나의 차이가 컸다.

    언제까지 신혼부부가 헤어져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집도 부천 부근으로 옮기는 바람에 아침 5시에 출근을 시작해서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신도림역에서 막차를 놓치기라도 하면 역 벤치에 쭈그리고 누워 자고 출근하기도 했다. 답답한 시간만 계속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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