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아치는 대치동에도 있었다"
        2010년 11월 08일 09: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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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학자 엄기호의 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머리말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도대체) 누가 누구의 삶을 무례하게도 삭제해버리는가?” 책의 목표는 근 3~4년간 한국사회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 ‘세대론’이 얼마나 많은 구체적인 20대들의 삶을 삭제해버리는지에 대해서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책의 목표는 달성된 것 같다.

    ‘세대론’에는 20대의 삶이 없다. 지금까지의 20대에 대한 담론은 주로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대학을 다니는 1%가 채 안 되는 집단에 대한, 그리고 그 집단에 의한 이야기였다. 스펙 쌓기를 위해서 (특정한 형태의) 사회적 참여를 하지 않는 20대에 대해 ‘20대 개새끼론’이 펼쳐질 때의 그 20대는 (사회적 지식인이라고 전제되는) SKY 대학으로 은연중에 전제되고 있었다.

    세대론이 삭제한 ‘나머지들’

    70년대의 지사적 운동권, 80년대의 전투적 운동권의 형상 밑에는 녹두와 백양로와 안암동 로터리의 모습과 그들이 집결했던 서울역 광장과 명동성당에 대한 신성화된 경험이 깔려 있었다. 다른 한 편 ‘경쟁력’이 떨어지는 20대에 대해서 비난할 때에는 SKY 대학생들도 (세계화 시스템에서) 안 먹힌다는 생각과, (이미 가정된) ‘나머지 대학’생들에 대한 서열화된 생각들이 깔려있었다.

    거기에서 절대적인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의 목소리가 ‘삭제’된 것은 너무나 명료한 일이다. 그 내용의 견실함과 상관없이 20대에 대한 참여관찰의 기록인 『교실이 돌아왔다』(조한혜정),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우석훈)에 대해 20대들이 냉소적인 반응과, 격렬한 반감을 동시에 보여준 것도 그러한 연유였을 것이다.


    엄기호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삶터에 대한 지식인 세계의 말과 글에서 벌어지는 세계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삭제’해 버린다. 며칠 전 대치동의 10대 ‘양아치’를 만났다. 그를 만나기 전 내가 떠올렸던 것은 ‘매니저 맘/헬리콥터 맘’(모든 자녀의 일정과 학업 계획을 완벽하게 조율하는 엄마)이라는 단어/개념이었다.

    아무리 사고를 치고 돌아다녀도 결국에는 엄마가 다 수습해줄 것이고 대학을 한 번에 입학 못하면 결국에 엄마가 유학도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유순하게 엄마와 함께 ‘계급 재생산’의 전략의 길에 함께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태여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까 하는 ‘회의’가 만나기 전부터 들었다.

    ‘대치동 엄마’ 신화를 위해 삭제된 양아치들

    그런데 이 친구의 이야기는 예상을 빗나가 버렸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시급 4100원을 받으면서 서빙을 하고 12시까지 일해서 한 달 동안 70만 원을 벌고, 친구들과 동네 놀이터에 모여서 술을 함께 마시고, 담배를 함께 피우고 술 마셔서 피곤하면 여관 가서 모여서 자고. 엄마와 아빠와 여러 ‘꼰대’들이 개입하면 알바로 번 돈을 들고 가출해버리는 아이들.

    그건 내가 경험했던 90년대 말, 2000년대 초의 ‘면목동 양아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마가 너무나 ‘똑똑’하고 ‘매니저’의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치동 아이들은 엄마 품 바깥으로 튀어나갈 수 없다는 내 생각은 완전히 편견이었다.

    아이들의 탈선을 막기 위해 더 강한 탈선에 대한 ‘규제’가 벌어지고 있지만, 아이들의 ‘탈선’은 멈추지 않았다. ‘대치동 엄마’의 신화는 정작 그 현장에서는 여기저기서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대치동 양아치들은 ‘대치동 엄마’의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삭제’되고 있었다. 그 친구와 이야기를 마치면서 본 대치동은 내게는 마치 가까스로 ‘교육 1번가’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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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며칠 전 어떤 미학자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근대적 혁명’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근대적 ‘개인’의 신화가 서구, 백인, 남자의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고, 그 바깥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타자)을 배제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지식인이 지식을 만들기 때문에 그들을 배제하는 효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개인’들을 ‘연대’하는 것을 통한 혁명이 불가능한 것이 지금의 ‘후기 근대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일단 ‘나머지 사람들’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뿐더러, 서로를 ‘공통적’으로 묶어낼 수 있는 ‘보편’이라는 것 자체가 신화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는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지식인의 레이더 바깥에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학출 경험에 대한 무례한 삭제

    이론적으로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1980년대의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이근원의 글을 참조하라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0484)들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맑스-레닌주의’ 혹은 ‘스탈린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가지고 현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일단 현장에 들어가는 과정부터 그러한 ‘이념’과 ‘실제’와의 간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론이 가르쳐주는 ‘노동계급’은 현장에 없었다. 현장에 들어간 학출들은 그들을 곧 바로 맑스-레닌주의가 가르쳐 주는 방향으로 노동자들을 ‘지도’할 수 없었다. 매일 매일의 ‘전태일-되기’가 더 절박한 과제였다.

    노동자들과 축구하면서, 등산을 하면서, 같이 김장을 담그면서 그들의 구체적인 삶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학출 들의 이념은 ‘교조적’일 수 없었다. 그런데 너무나 손쉽게 1980년대의 학출들의 ‘노동운동’에 대해서 ‘교조적’이라고 딱지를 붙여버린다. ‘노동자’가 되었던, 구체적인 삶을 살았던 학출들의 경험들 역시 ‘무례하게 삭제’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 가졌던 ‘급진주의적 입장’ 자체가 문제였다고 손쉽게 선언한다.

    사실 그 미학자처럼(사실 이 사람만의 문제는 절대 아니다) 담론의 수준에서 어떤 일들의 실패를 그 ‘근본’에 깔려있는 ‘근대적 혁명’의 거대한 기획의 문제로 선언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화된 담론적인 차원에서의 반박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의 알리바이로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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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히려 “(도대체) 누가 누구의 삶을 무례하게도 삭제해버리는가?”의 문제는 다른 차원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복잡한 이론의 차원이 아니다. 이 질문이 물어보는 것은 ‘현장성’에 대한 질문이다.

    엄기호는 직접 ‘다른’ 20대들을 만났기 때문에, 세대론이 ‘삭제’해 버리는 20대를 발견할 수 있었고, ‘대치동’의 양아치 같은 ‘나머지 사람들’들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대치동 엄마’와 ‘대치동 아이들’을 읽어낼 수 있고, 다른 방식으로 강남을, 대치동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교조주의가 문제인가, 성급한 탈현장이 문제인가?

    또 내가 보기에 80년대 학출들의 ‘근대적 혁명’의 ‘교조주의’와 ‘급진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90년대에 소련이 무너지자 곧 바로 ‘현장’에서 대거 빠져나간 것 그 자체가 더 큰 문제다. 아, 아니 어쩌면 90년대 이후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활동가들의 경험과 그들과 함께 있었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표현해줄 언어가 없음이 오히려 더 문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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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것은 헤겔 철학 때문이 아니라, 엥겔스가 보여준 영국 노동자들의 삶의 처참함 때문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근대/탈근대’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개념들’이 실제로 구체적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한 ‘현장성 있는 언어’들의 대중화로 보인다.

    당장 이미 경험하기도 전에 알고 있는 진리(예컨대 ‘세대론’이 20대를 꾸짖는 방식의 진리)를 가지고 손쉽게 ‘개입’하고 그것들을 ‘따지기’보다는, 계속 누락되고 무례하게 삭제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다른 방식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 이야기들이 오히려 지금 이 잔인한 세상에 대한 반격의 재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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