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적 광우병”
        2010년 11월 05일 08: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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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됐네. 이번 기회에 쉬어야지.” 송경동이, 농성하던 포클레인에서 떨어져 뼈가 부서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이다. 선수를 놓쳤지,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송경동을 소개할 때 흔히 따라붙는 수사가 ‘데모하는 시인’쯤 되겠는데, 그 데모라는 게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낮밤도 가리지 않으며, 추우나 더우나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 법이니, 데모하지 않는 송경동을 그려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뛰어오르기 전의 개구리처럼 송경동에게도 움츠릴 때가 왔을 테고, 포클레인 위에서 열하루를 버티던 그는 마침내 떨어졌다. 사진작가 노순택은 <한겨레>에 실은 칼럼에서 그 추락을 ‘실수’라 말했는데, 사람 살 수 없는 포클레인 위에서 열흘 넘게 살았으니 실수라기보다는 차라리 만유인력 법칙의 실현이 더 근사(近似)하겠고, 과로한 시인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로 치부하는 게 속 편하다.

    기륭 농성 포클레인에서 떨어져 다치다

    농성장을 지키겠다고, 농성자들에게 농성하던 송경동은 병원으로 끌려나고 나서도 기륭 싸움에 함께 못해 안달했다는데, 다친 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시인이 떨어지고 나서야 기륭 비정규직들은 승리할 수 있었다. 기륭 비정규직의 승리 원인에 대해서는 ‘G20’이라는 외부요인설이 정설로 굳어지는 듯한데, 그런 해석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나 혼자서는 시인의 추락에 의한 반동(反動)이라고 추리해본다.

    다른 때 같으면 쫓아다니며 말 붙이기도 어려웠을 송경동 시인의 병실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래는 지난 3일, 송 시인이 입원하고 있는 원진녹색병원에서 이루어진 인터뷰 전문이다.

                                                             * * *

    – 수술 경과는 어떤가?

    = 수술은 잘 됐다고 한다. 발뒤꿈치 뼈가 함몰되고 부서졌는데, 인공뼈를 넣고, 핀과 볼트로 고정해놨다고 한다. 한두 달 입원해 있어야 한다고 하고, 1년쯤 후에 핀 제거 수술을 받고, 완전 회복하는 데는 2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기륭 투쟁은 끝났지만, 저의 재활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잘 됐다 싶다. 좀 쉬고.

    = 처음 실려왔을 때는 저 스스로에게 화도 많이 나고, 주변 동지들에게 많이 미안했다. 이번 기륭 싸움을 끝장 투쟁이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 병원에 왔으니 미안하고 속상하고. 그런데 잘 타결이 돼서 기쁘고 다행이다.

    기륭 투쟁에 끝까지 함께 못해 속상하다

    – 장기투쟁 사업장이 타결되는 경우가 굉장히 드문데, 기륭 비대위 집행위원장으로서 이번 타결을 어떻게 분석하거나 평가하나?

    = 참 어려운 싸움이었다. 운동권 내부에서도 패배의식이 컸다. 워낙 작은 사업장이고, 사주 입장이 워낙 강경하고, 게다가 그동안 사주가 네 번이나 바뀌었다. 이렇게 사주가 바뀔 경우 정규직도 고용승계를 받기가 어려운데, 계약해지당한 비정규직들이 네 차례나 고용승계 투쟁을 하기가 어려웠다.

    대법원에서도 졌기 때문에 법적 권리를 주장하기에도 어려웠고, 법을 넘어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교섭을 해야 하는데, 바뀐 사주 입장에서는 ‘나는 책임 없다. 당신들과 교섭할 이유가 없다’고 버틸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매번 투쟁을 통해서 교섭에 끌어낼 수밖에 없었다.

    운동권 내부에서도 별 관심이 없었다. 대법원에서까지 졌으니 위로금이라도 좀 주면 고맙게 받고 끝내자는 분위기가 많았다. 큰 사업장이 아니다 보니 민주노총에서도, 금속노조에서도 기륭 투쟁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가 이해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언제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법대로 투쟁했나. 투쟁 1000일을 앞두고 있던 2008년 3월쯤부터 이런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논의가 시작됐고, 단위사업장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을 만들어내는 법제도 문제로 접근하자는 관점으로 정리했다.

    우리가 언제 법대로 싸웠나

    기륭의 여성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받던 파견직으로, 우리 사회의 맨 끝이다. 이런 사람들의 사회적 요구조차 안 받아들여지면, 그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도 더 어려워지는 거다. 꼭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이기고 진다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항의하는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투쟁해왔다.

    사회적 연대투쟁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회적 연대의 끈을 끌어내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들이 모여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직접고용 정규직화’라는 원칙을 내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온 데 이번 싸움의 의미가 있고,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 승리의 배경이 사회연대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 먼저는, 끝까지 싸운 기륭 노동자들의 끈질김과 성실함, 원칙을 잃지 않는 태도 덕분이다. 그들이 끝까지 버티고 싸우니까 연대하는 사람들도 찾아갈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느냐. 기륭 노동자들이 앞서서 투쟁으로 나가기 때문에 연대하는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었던 거다. 기륭 동지들은 투쟁에 의한 법적 피해 등을 잘 알면서도 계속 고강도 투쟁을 벌여왔다. 이런 태도가 주변에 신뢰와 뭉클함을 줬다고 생각한다.

    원칙 지킨 기륭 노동자들의 태도가 승리 요인

    2008년에 새 싸움을 시작하면서 촛불 시민들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민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광화문 촛불시위에 열심히 참가했다.

    촛불시위가 굉장히 래디컬하고, 새롭고 신선한 운동 양식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계급 문제 등에 대해서는 준비된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문제, 계급 문제들을 계속해서 얘기했다.

    밥상 위의 광우병 소고기처럼 우리 삶의 생태계도 무너지고 있다고 얘기했다. 인간 생태계가 건강해야 우리 밥상도 건강해질 수 있는 것인데, 우리 삶의 생태계에는 사회적 광우병인 비정규직 제도가 들어온 지 이미 십수 년이 됐다고 얘기했다. 어쩌면 이 사회적 광우병이 더 무서운 재앙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자’고 외쳤다. 나중에는 촛불시민모임들이 기륭 투쟁의 주력이 되었다.

    – 여러분들이 연대활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근래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연대활동이 눈에 많이 띈다. 용산에서도, 두리반에서도 문화예술인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이런 현상의 배경은 무엇인가?

    = 노력이다. 문화예술은 그런 삶의 현장과 결합해 있어야 상상력이 나온다. 동시대와 함께 호흡하지 않는 문화예술은 붕 뜬 유희처럼 허황될 수 있다. 당대의 첨예한 현장에 함께 하면서 문화예술은 당대성을 획득할 수 있고, 작품들이 변화해나갈 수 있다. 문화예술인들의 연대활동은 사회운동을 위해서도, 문화예술을 위해서도 좋다고 본다. 우리가 공기와 물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문화예술은 민중과 시민사회에 함께 있어야 건강해진다.

    사회 현장은 문화예술의 공기

    물론 이런 연대활동이 그냥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문화예술인들이 본격적인 사회연대활동에 나선 것은 대추리 싸움 때부터였다. 대추리 싸움 전에는 도구화된 문화예술이었다. 민주노총 행사 전속 같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 정부 때부터 문화예술의 독자적인 활동이 둔화됐었다.

    그러다가 대추리 싸움 때 정태춘 선배, 저, 사진하는 노순태, 미술작가 등으로 기획단을 꾸렸다. 대추리 싸움 다음에는 제가 제안해서 그분들 중에 일부가 기륭전자로 옮겨왔다. 기륭전자에서 작은 대추리, 작은 꼼뮨을 만들어보자는 꿈을 가지고 시작했다. 작은 연대지만 1년쯤 꾸준히 연대했고, 그 다음에 용산이 터졌다.

    그리고 2008년에 자회사로의 복직이라는 기륭 타협안이 나왔었다. 금속노조, 민주노동당 등이 다 그 타협안을 받으라는 의견이었는데, 기륭공대위는 그 안을 받지 않았다. 원칙을 가지고 그대로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금속노조 내부의 비정규 투쟁 활성화에 기륭 노동자들이 기여한다는 것과 이 문제를 사회화시킨다는 노선을 결정했다. 싸움이 터지면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결론밖에 못냈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고 계속 사회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를 만들었다.

    대추리,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용산범대위, 두리반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는 용산범대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쩌다 보니 처음에는 용산범대위 상근역량의 절반을 ‘비없세’에서 내게 됐다. 일터에서 쫓겨나는 비정규직이나 집에서 쫓겨나는 철거민이나 같은 처지라는 생각이었다. 독립영화인, 미술가 등 많이 문화예술인들이 용산 싸움에 힘을 보탰고, 두리반에도 적극 참여하게 됐다. 이런 흐름이 대추리 싸움 때부터 죽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 얼마 전에 「송경동이 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칼럼이 신문에 실렸다. 그 칼럼에서 ‘이럴 때 시인은 뭘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는데, 여기에 뭐라고 답하겠는가? 시작(詩作)도 열심히 하시지만, 연대단체들보다 더 열심히 투쟁 현장에 참여하던데, 왜 그렇게 하는가?

    = 어떤 사람들은 ‘전문 시위꾼’이라 부르더라.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에 편입되면서 문화예술도 많이 보수화됐다. 과거의 진보적 문화예술인들은 지금의 저처럼 살지 않았는가. 김남주나 박노해 같은 삶이 시인의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 삶이 문화예술인의 표상인 것처럼 얘기되기도 했다. 제가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시인이라는 푸시킨은 노농적위대의 일원으로 죽창 들고 싸웠고, 파블로 네루다는 광산 노동자들의 벗이었다. 총칼 앞에서 시를 읊고, 쫓겨나 망명하고, 요즘은 그런 삶들을 잊은 것 같다. 문화가 시장화 상품화되면서 문화예술인들이 위축되고 자기 양심을 져버리게 된 것 같다. 이 시대가 그렇듯 문화예술인들의 삶도 식민화되었다.

    김남주처럼, 푸시킨처럼

    – 그런 말씀이 꼭 그렇게 살아야 진정한 문화예술인이라는 주장은 아니지 않느냐?

    = 물론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상황과 각자의 역할이 있지 않겠냐.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뗏목지기는 조직원이었네’라는 시가 있다. 중국 혁명 당시 어떤 사람이 뗏목만 지키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혁명군을 건네주기 위해 뗏목만 지키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전위적으로 살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다들 자기 삶의 자리가 있는 거 아니겠느냐.

    – 퇴원 후에는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가?

    = 계약까지 해놓고 몇 년 동안 내지 못하고 있는 책이 두 권 있다. 산문집을 내야 하고, 청소년용 파블로 네루다 평전도 탈고해야 한다. 저를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시인이 시를 써야지, 투쟁 현장에 너무 많이 가있는 거 아니냐"는 말씀들을 많이들 해주시는데, 고맙고 감사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같은 삶을 돌이킬 마음은 없다. 당분간은 비정규직 운동에 더 매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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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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