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출이죠? 웬만하면 나가주시죠"
        2010년 11월 05일 12: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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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 우리들의 사랑 / 우리들의 분노 /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 새벽 쓰린 가슴 위로 / 차거운 소줏잔을 /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 노동자의 햇새벽이 / 솟아오를 때까지”(박노해 시 ‘노동의 새벽’ 중에서) 

    졸지에 석방되다

    졸지에 석방되어 나왔으나 다시 공장에 들어갈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갑자기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는 데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석방된 지 얼마 후인 7월 9일에 이한열의 장례식이 시청 앞에서 열렸다. 22살의 나이였다. 6.10 항쟁을 앞두고 전날 연대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했다가 전투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고 7월 5일 결국 사망했다. 

    7월 9일 ‘민주국민장’ 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아래 사진),광주 50만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내가 월드컵이나 촛불과 다르게 시청광장을 떠 올리는 이유다.

       
      

    장례식을 마치고 바로 공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이미 반월에서의 취업은 어려워졌고,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이 서울로 장소를 옮겨서 자연스레 성수동 쪽으로 향했다. 당시에는 성수동에 조그만 사업장(주로 마찌꼬바라고 일본말로 한다)이 많았다.

    이번에는 규모가 큰 공장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리가 쉽게 나지 않았다. 규모가 300명 정도 되는 인쇄공장에 취업을 했다. 한 사람이 눈에 띠었다. 항상 핵심급이 될 사람을 먼저 찾아야 했다. 책임감이 있고, 주변 동료들과의 관계가 좋고, 일정한 리더쉽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만나자고 말했다. 첫월급날이었다.

    "여기 이미 6명이나 들어와있습니다"

    “몇 학번이세요?”
    대뜸 그가 물었다.
    “네?”
    “학출이시죠?”

    학번이란 대학교에 입학한 연도를 말한다. 학출이란 학생출신이라는 말이고. 따라서 그는 내가 공장에 온 학생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는 이미 6명이나 있으니 웬만하면 나가 주시죠”
    “네”

    불과 300여명에 불과한 그 곳에도 이미 6명이나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얘기였다. 두말 안하고 기분 좋게 그만 두었다. 나만 그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취업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과 각종 서류들이 필요했다. 내 이름으로는 어려웠다. 이미 전두환은 학생출신 취업자들을 ‘위장취업자’, ‘불순분자’로 몰아갔고 <조선일보> 등을 통해 노사분규의 배후로 학생들을 지목했다. 

    노동부는 “앞으로 각 기업체에서 25세 전후의 근로자를 신규 채용 할 때에는 학력과 경력은 물론 본인의 면담 등을 통해 신상 심사 등 취업 희망자의 신원 조사를 철저히 하도록 하는 한편, 각 지방의 근로감독관들은 기업체와 협조하여 학력을 낮춰 기능공으로 취업하는 사례가 없도록 노무관리를 중점 지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경찰도 “학력 등 신분을 속이고 기업체에 취직한 사람들이 불법적인 노사분규를 선동할 경우, 구속 수사할 방침이며, 운동권 학생의 위장취업을 봉쇄하기 위해 기업 측에 기능직 사원을 채용할 때도 신원조회를 철저히 할 것”을 촉구했다. 이미 전과가 2개나 생긴 마당에 내 이름으로 취업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야학 학생의 도움을 받다

    마침 야학에서 만난 학생 중의 하나가 선뜻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주었다. 주민등록 등본 등 각종 서류도 떼어 주었다. 이제 나는 1960년생이 아니라 1964년의 송00이 되었다. 학력도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경력도 만들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도 이력서에 써야 했다. 완벽하게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야만 취업이 가능했다.

    주민등록증은 전문가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비닐로 코팅이 되어 있었는 데 면도칼로 얇게 앞뒤를 분리하여 앞 면의 비닐을 떼어내고 대신 내 사진을 붙이는 것이었다. 한번 작업하는 것을 보았는 데 정말 정교한 작업이었다. 냉장고에 넣어 얼리기도 했다. 작업이 모두 끝나면 주민등록증 위에 천을 놓고 다리미로 살짝 다려서 다시 붙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마침 성수동에서 조금 벗어나 있긴 했지만 강 건너 천호동에 있는 P사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거기서도 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학생 출신 활동가에 의한 분규가 있었는 데 실패하고 많은 사람들이 해고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한번 실패하면 다시 하기는 두배 이상의 힘이 든다. 상대방도 일정한 노하우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했다. 일부러 어눌하게 말하는 대신 똑똑하게 말했다. 잠시 다닐 것도 아니고 대학생으로 살아 온 과정이 몸에 배어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배움에 한이 있어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고, 똑똑해 지려고 의식적으로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그런데 간밤까지도 괜찮았던 주민등록증의 비닐이 벌어져 있었다.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거꾸로 그런 상태의 주민등록증이 위조일리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통과가 되었다. 이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공장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곳은 만년필과 볼펜, 그리고 라이터 등을 만드는 곳이었다. 용접을 하고 싶었지만 경력을 속였으므로 불가능했다. 그리고 용접을 하는 사람도 기계과에 한두 명에 불과했다. 800여명의 노동자와 그리고 회사가 만든 어용 노동조합이 있었다. 월급은 매일 2시간씩 잔업을 더 해야 20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책 속의 혁명적 노동계급은 없었다

    처음 맡은 곳은 각종 필기도구에 들어가는 부품들을 만드는 6과의 벤치리스 파트였다. 볼펜에 들어가는 심에 해당되는 원으로 된 얇은 쇠를 일정한 길이로 자르는 것이었다. 하루에 8,000개를 자르는 게 할당량이었다. 처음에는 고생했지만 차츰 손에 익어 그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무거운 것을 나르는 것도 아니고, 작업의 위험도가 적어 편했다. 

    사람들을 사귀고, 축구부에 들어 매일 점심을 굶으며 축구시합도 했다. 대부분 너희 나이 또래인 십대말에서 이십대 초반의 여자 아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쉽게 “아저씨” 하면서 잘 따랐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형’이라고 하기가 처음엔 조금 어려웠지만 그것도 별게 아니었다.

    다만 어려웠던 것은 ‘문화적’ 차이였다. 리더급 되는 한 친구를 조직하기 위해 그와 함께 반 지하방에서 1년 넘게 같이 생활했다. 당연히 나보다 어린 그에게 나는 형이라고 불렀고, 그의 생활을 바꾸려고 무진 노력했다. 

    야근이 끝나면 당구 치고, 술 마시고, 고스톱 치고 하는 게 그의 생활의 모두였다. 다행히 월급을 술집여자에게 바치는 일만은 하지 않았다. 천호동은 유흥가가 발달해서 보통 회식을 하면 1차는 중국집 2차는 나이트클럽 3차는 남자들끼리 여자가 있는 술집을 찾는 게 보통이었다.

    책에 쓰여 있는 ‘혁명의 가장 기본계급인 노동자 계급’은 없었다. 그렇게 살아 온 인생을 바꾸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책은 거리가 멀었다.

    그들에게 “한국사회가 가진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같이 공부하자. 노동자도 권리가 있다. 노동법이라도 같이 보자”라고 말하면 당장 신고가 들어가든가, 멀어지게 될 판이었다.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는 주로 입는 것, 먹는 것 등에 관한 것 이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물론 반장이나 주임급에 대한 욕을 하는 게 가장 일상적이었다. 1년하고도 6개월 정도가 넘어서야 조금씩 내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게 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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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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