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인인가, 희생자인가?
        2010년 11월 04일 05: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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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운대 초고층 호화 오피스텔 우신골든스위트 화재 사건의 범인이 밝혀졌다고 한다. 국민을 놀라게 만든 타워링 인페르노의 범인들은 골든스위트를 구석구석 쓸고 닦아 광을 내고 향기롭게 가꾼 가난한 청소 환경 미화원들이라고 한다.

    경찰이 밝혔다고 하는 화재의 원인은 4층 미화원 휴게실에 있는 ‘문어발 콘센트’의 스파크, 비좁은 휴게실에서 공동으로 쓰는 콘센트의 스파크가 일으킨 발화의 책임을 이들 만만한 미화원들에게 뒤집어 씌운다.

    경찰이 발표한 ‘문어발 콘센트’라는 발화점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 발화점이라고 하는 곳에서 몇 발자욱 뒤로 물러서서 발화 ‘장소’를 보라. 진화장비도 없고 준공검사도 하지 않은, 배관이 지나다니는 단 24㎡(7.26평)짜리 ‘불법’ 휴게실이 보인다.

    그 좁은 공간이 황금의(Golden) 성채를 관리한 곳이다. 미화원들을 위한 인간다운 휴식처조차 허용하지 않은 저 불법 휴게실에서 하나의 콘센트에 여러 미화원들의 전기구들도 그렇게 복닦이며 얽혔을 것이다.

       
      ▲ 영화 <하얀 리본>의 한 장면

    7평짜리 불법 휴게실에 콘센트 꽂은 죄

    거기서 스파크가 튀었고 불이 났다고 하자. 그래서 그분들, 미화원들이 죄인인가? 부잣집 냉방기 하나의 전력에도 못 미치는 잡다한 전기구들을 문어발식으로 꽂은 것이 스파크의 직접적 원인인지, 아니면 부실한 전기배선이 문제인가도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유령’ 취급을 받는 환경미화원들의 노동조건이고, 보이지 않는 유령 노동자들을 창고 같은 곳에 몰아넣고도 태연자약한 자본주의의 야만이 아닐까?

    언제나 그렇듯 거대한 구조악은 덮히고 실질적인 재발 방지 대책도 실종된다. 남는 것은 애꿎은 희생양이다. 문어발 콘센트와 환경미화원에 대한 사법처리, 이것은 사건 혹은 사태의 진정한 본질을 은폐하는 판에 박은 ‘우민화’이다. 애꿎은 희생양 하나를 제단에 바치면 악이 정화되고 우리는 순결해지는가?

    사설이 길었다. 오늘 하려는 얘기는 얼마전 부산 국도 극장이라는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된 ‘하얀리본’에 대한 기억이다. 나는 이 영화를 우리가 우민화의 논리에 얼마나 익숙해 있는지를 소스라치게 깨닫게 하는 영화로 읽었다.

    영화를 따라가 보자. 얼핏 1차 세계 대전을 앞둔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폭력 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테리물처럼 보인다. 처음엔 마을 의사가 누군가가 쳐놓은 줄에 걸려 낙마하는 사건으로부터 영지를 다스리는 남작의 아들이 누군가에 의해 린치를 당하고, 남작의 창고가 또 누군가에 의해 불타버리고, 마지막에는 또 누군가에 의해 이 마을의 가장 약자인 한 아이의 눈이 도려내어지는 끔찍한 폭력이 연이어 일어난다.

    범인이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다

    과연 범인이 누구일까? 그러나 감독은 범인을 지목하지 않는다. 압제적 분위기에 짓눌린 아이들의 반항의식이 불러온 맹목적 폭력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도 가능하다. 아이들을 조사하는 마을 학교의 선생에게 오히려 아이들은 되묻는다?

    "그걸 왜 우리에게 물으시죠? 어른을 불러드릴까요?" 당돌한 아이의 눈빛은 어른들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그것이 비록 아이들이 저지른 방향을 잃은 폭력이라고 할지라도 그 배후에는 어른들이 만든 폭력의 구조가 버티고 있다.

    이웃 여인과 불륜의 관계를 가지면서도 자신의 딸을 범하는 의사는 ‘아름다운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역겨운 변명을 늘어 놓는다. 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사회적 병리의 원인을 제공하는 역겨운 인물일 때 그 스스로가 폭력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폭력의 대상이기도 하다.

    마을 농민 절반을 농업 노동자로 부리고 있는 남작은 아이들까지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강요하는 영지의 주인이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으면 농사일을 주지 않거나 해고시켜 버린다.

    이런 강요된 노동환경에서 농업 산재로 소작농 여인이 죽음에 이르고, 복수심에 불타는 그녀의 아들은 양배추 밭을 낫으로 갈아 엎는다. 그 벌로 소작농 집안은 농사일을 떼이고 그의 아버지마저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남작도 벌을 받을 만 했다. 그러나 그 벌은 죄없는 남작의 아들을 겨냥하고 있다. 린치 사건에 대한 범인은 베일에 숨었다. 린치 사건은 엉뚱하게 불똥이 튀어 남작의 쌍둥이 아이를 돌보던 유모가 해고당한다. 억압이 폭력을 낳고, 그 폭력은 새로운 희생자를 만든다.

    모두가 폭력에 물들기까지

    남작이 이 마을의 정치, 경제적 지배권력이라면 마을의 목사는 영적 지배자로 남작의 이데올로그다. 그는 구조 악에 희생당하는 ‘순수한’ 아이들에게 오히려 순수의 상징이라며 ‘하얀 리본’을 팔에 묶어주며 아이들을 억압하고, 통제한다.

    목사의 딸 클라라는 극단적 억압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기어이 목사가 키우는 새를 ‘십자가’의 형틀처럼 꿰어서 끔찍하게 살해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억압에 대한 아이들의 저항적 폭력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억압적 지배체제를 형성하는 목사도 벌을 받을 만하다. 숨 막히는 억압적 상황이 ‘사회적’ 폭력을 낳고 폭력에 대한 징벌 체제는 더더욱 숨 막히는 상황을 만든다. 결국 아무 죄도 없는 아이 칼(이 아이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다)에게, 가장 약한 자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치닫는다. ‘하얀 리본’은 교회 성가대의 아름다운 노래에 범죄와 폭력이 감춰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감독은 범인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지만 무엇이 폭력을 유발하는지는 충분히 보여주었다. 범인을 특정하는 순간 오히려 ‘우민화’의 덫에 걸릴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이다.

    덕포동 재개발 지구에서 벌어진 엽기적인 여중생 성폭행 살인사건에서도, 골든스위트 화재 사건에서도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문어발 콘센트와 미화원, 혹은 김길태라는 용의자 또한 ‘우민화’의 도구일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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