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천개의 파업, ‘공돌이 공순이’에서 ‘노동자’로
        2010년 11월 04일 12: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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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가 되고/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늦게 붙는 놈은 마른 놈 곁에/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 // 몸을 맞대어야 세게 타오르지/ 마른 놈은 단단한 놈을 도와야 해/ 단단한 놈일수록 늦게 붙으나/ 옮겨붙기만 하면 불의 중심이 되어/ 탈거야 그때는 젖은 놈도 타기 시작하지…” (백무산 시 ‘장작불’ 중에서)

       
      ▲ 87년 총파업 당시, 중장비를 몰러 거리행진하는 노동자들

    당시에 ‘노동자’는 없었다. ‘공돌이, 공순이’가 그들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혹은 점잖게 ‘산업역군’ 혹은 ‘근로자’라고 불렀다. 노동자라고 말하면 빨갱이 취급을 했다. 노동부도 있고, 노동법도 있는데 노동자만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해 미국 노동자들이 죽어간 날을 기념하여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5월 1일을 기념하는 날(메이데이라고 부른다)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공산주의국가들이 기념하는 날이라는 게 이유였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대신 이승만이 만든 어용 대한노총이 생긴 날인 3월 10일을 ‘근로자의 날’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기념했다. 홍길동이 서자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것처럼 노동자들도 자신을 노동자라고 부르지 못했다.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고

    ‘노동자’라는 언어를 되찾기 위해서도, 메이데이를 기념하기 위해서도 싸워야 했다. 지금은 5월 1일을 노동절이라고 해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쉬면서 그 날을 기념한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모두 지난한 투쟁의 결과다.

    가령 당시엔 수시로 선생들이 ‘두발검사’를 해서 바리깡이라는 머리 깎는 기계로 머리 중앙을 밀어 버리기도 했다. 우린 그걸 ‘고속도로’라고 부르며, 당한 친구들을 놀렸지만 돌아보면 슬픈 일이다. 경찰들이 거리에서 자를 가지고 무릎 위 17Cm를 기준으로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기도 했다. 심지어 울산 현대자동차에선 87년 이전에 경비들이 두발검사도 하고, 지각하면 토끼뜀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대학내에서 학생회조차 인정하지 않은 군사정권이 노동조합을 인정할 리 만무였다. 모든 독재는 민주주의를 혐오한다. 탄압한다. 형식적으로는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가 있었지만 노조를 결성하기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해고와 구속이 일상화되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논쟁 중의 하나가 노동조합 결성을 둘러싼 것이었을까. 노동조합의 결성 자체가 불가능하고 희생이 크므로 선진적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대중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지역별 혁명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등의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은 이런 논쟁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노동조합의 폭발적 결성으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6.29선언’에 의해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확보된 것으로 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학생들은 학교로, 넥타이 부대라고 불렸던 사무직노동자는 직장으로, 종교인들은 각자의 종교로 돌아갔다.

    다들 집으로 돌아간 후, 남겨진 이들

    그러나 비록 언론, 집회, 출판 등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확보될 가능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동자들의 권리라는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누구도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로 그 때 노동자 스스로가 일어났다. 거대한 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라고 부른다.

    흔히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쉽게 눈감는 사람들을 본다. 촛불 때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지만 그 속에 노동자의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인 권리, 즉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단결권, 교섭권, 단체행동권이라는 노동3권이 있다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군사정권을 넘어뜨리고 등장한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민주적인 대통령 아래서 노동자의 기본적인 ‘민주적인 권리’는 더 심하게 축소되었다.

    민주주의는 추상의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아무튼 87년 노동자들의 대투쟁으로 인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6.29 선언 이후 9월 말까지 발생한 노동쟁의는 총 3,241건으로 하루 평균 44건을 기록했다. 매일 40건이 넘는 파업투쟁이 일어났다는 얘기다. 1980년 민주화의 봄 기간 동안의 6배가 넘는 숫자였다.

    1987년 말까지 1,361개의 노조가 새로 만들어졌으며 이 열기는 1989년까지 이어졌다. 노동조합은 1986년 2,675개 노조 103만 6천 명에서 1989년에는 7,883개 193만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불과 3년 사이에 노동조합은 3배, 조합원수는 76.8%가 증가하였다.

    당시 가장 많이 쓰인 구호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노동자의 인간선언”이 바로 이 시기 투쟁의 결과라는 점만 기억해 두자. 불은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에서 처음 붙었다.

    현대엔진 노조결성과 파업투쟁은 삽시간에 울산 전역으로 퍼졌고, 부산, 마산, 창원, 대구, 대전을 거쳐 경인지역으로 빠른 속도로 퍼졌다. 8월 중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현대그룹 노조들이 결성한 현대그룹노조협의회 주도로 4만여 노동자들이 울산에서 시가행진(8월 16~17일)을 벌이면서 절정에 달했다. 인천의 대우중공업, 대우자동차, 영창악기, 경동산업, 거제의 대우조선, 울산의 현대 그룹 등 전국의 주요 대기업이 파업에 들어갔다.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의 장례식이 열렸던 8월 28일을 기점으로 노동자대투쟁은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 속에 수그러들었다.

    이날 국무총리가 좌경용공세력 척결을 위한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경찰은 추모식과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 933명을 연행해 67명을 구속시켰다. 9월 4일에는 대우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파업농성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해 대우자동차 농성자 94명 전원, 현대중공업 노동자 40명을 구속시켰다. 비슷한 시기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던 경동산업, 영창악기 노조민주화 투쟁 역시 회사 측과 경찰의 합동공격에 의해 좌절되었다.

    3000개의 파업

    전국적으로 전산업에 걸쳐 규모와 지역, 업종을 불문하고 대대적으로 일어난 노동자대투쟁 기간동안 총 3,311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하였으며(6.29부터 10월 말까지), 그 가운데 파업은 3,235건으로 하루 평균 44건, 총인원 122만 5,830명이 참가했다.

    대부분 준비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으며, 임금 재인상에서부터 두발자유화까지 수십 개에 달하는 요구사항에 ‘인간답게 살고 싶다’가 공통된 구호로 내걸렸다. 쟁의의 대부분은 조정보다는 봉쇄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당시 노동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불법투쟁이었다.

    노동법은 여전히 노동운동의 발전에 걸림돌이었다. 복수노조금지조항은 여전히 한국노총과 소속 산별연맹 외에는 허용하지 않고 있었으며, 제3자개입금지, 노동조합의 정치활동금지, 교사공무원의 노동3권 불허 등 곳곳에 독소조항이 남아 있었다.

    노태우의 6.29선언이 국민에 대한 항복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중대한 노림수가 있었다. 양김씨가 분열만 된다면 대통령 직선이라 하더라도 충분한 승산이 있다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양김씨는 80년의 분열이 가져다 준 그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후보단일화에 대한 국민의 여망이 그렇게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이 10월 10일, 김대중이 10월 28일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12월 16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박정희에게 대통령 선출권을 빼앗긴 지 15년 만에 실시된 이 선거는 축제의 장이 아니라 통곡의 장이 되었다.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의 공범자 노태우가 전체 유효투표의 36.6%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야권 분열이 가져온 뼈아픈 패배였다. 이 패배는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지배세력은 조직적으로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었다. 5.18 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서 35일 동안 배를 타고 몰래 미국으로 망명했던 시대의 양심가 윤한봉 선생은 이 때의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 생전의 윤한봉 선생과 1주기 행사 모습

    “DJ(김대중의 영어식 약칭)의 분열행위는 그 어떤 변명을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였다. 수많은 조국 동포들이 죽음과 고문과 투옥과 가정불화와 가난을 무릅쓰고 줄기차게 투쟁하여 미국 정부와 전노 일당으로 하여금 전략적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어 놓았는데, DJ는 그 피와 땀과 눈물로 쟁취한 역사적인 기회를 자신의 야심 충족의 기회로 생각하여, 똘똘 뭉쳐 대결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분열행위를 함으로써 싸우기도 전에 미국과 전노 일당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만 것이다.

    나를 격분시키고 절망하게 만든 것은 DJ(김대중)뿐만이 아니었다. 민족민주운동과 선거운동을 혼동하여 DJ의 분열행위를 방조 지지함으로써 전술적으로는 DJ를 돕고 전략적(결과적)으로는 미국과 전노 일당을 도와버린 ‘비판적 지지’ 운운하는 일부 운동권 세력도 절망하기에는 마찬가지였다 …

    비판적 지지 세력들은 미국과 전노 일당 그리고 그들의 지지 대중들을 어떻게 그렇게 과소평가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대중들의 의식수준과 자신들의 역량을 과대평가할 수 있었을까? 정말로 그들은 분열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최악의 경우에도 지켜내야 할 운동의 존엄성과 대의, 그리고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내야 할 대중의 신뢰를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또 선거 패배 이후의 운동을 고려도 하지 않은 채 승리가 보장된 최후의 대결인 양 어떻게 그렇게 맹목적으로 DJ를 지지할 수 있었을까?” – 윤한봉, 『망명』 201쪽에서 203쪽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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