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감방 문이 열렸다"
    2010년 11월 03일 11: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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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새벽 뒷골목에 / 네 이름 쓴다 민주주의여 /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 오직 한 가닥 있어 /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김지하 시 ‘타는 목마름으로’ 중에서)

   
  

내가 아직 마산교도소를 옮기기 전인 87년 1월 14일이었다. 앞에서 잠깐 말한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죽었다. 물론 용산에서 철거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태에서 보았던 것처럼 저들은 결코 범죄를 인정하는 집단이 아니다.

책임자인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어젯밤 술을 많이 마셔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를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잔 마신 후 10시 15분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치자 ‘억’하고 소리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에 사망했다”는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을 했다.

도마뱀 그리고 용기

그리곤 고문에 참가한 2명의 구속으로 넘어가려 했다. 도마뱀은 꼬리를 자르면서 도망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진실은 바늘과 같아서 아무리 감추어도 뾰족하게 튀어 나오는 법이다. 부검에 참여한 한 용기 있는 의사의 증언으로 물고문에 의한 것임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전국에서 항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듯이 4월 13일 전두환은 이른바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전처럼 대통령을 소수의 자기편만이 체육관에 모여 뽑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 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이 잇따르고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물론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노총처럼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한 단체도 있긴 했다. 일제시대 친일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에는 항상 권력에 빌붙어 손을 드는 더러운 집단들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수’를 대변하는 척한다. 물론 보수언론도 이를 지지하는 데 빠지지 않는다.

전두환은, 어느 정도 반발이 있긴 하지만 또 다른 군인에게 무사히 권력을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7년 전 광주항쟁이 벌어졌던 바로 그 5월 18일과 같은 날짜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이 가톨릭 김승훈 신부에 의해 발표되었다. 구속된 2명 이외에도 3명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도 구속되었다.

계속된 투쟁으로 고문 살인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던 박처원 치안감 등 3명이 더 구속되었다. 수많은 의혹이 그 뒤에 있음이 계속 드러났다. 본격적인 거리 투쟁이 점화되기 시작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전국에서 불타오르고, 이전과는 다르게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도심가두 투쟁이 계속 이어진다.

잠실체육관과 명동성당

촛불을 이끌었던 ‘광우병범국민대책위원회’처럼 모든 시민사회단체 등이 결합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을 ‘총궐기 결의대회’로 잡았다. 이 날은 전두환에 이어 광주시민을 학살한 또 다른 군인인 노태우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잠실체육관에서 지명되는 날이었다.

이날 전국에서 24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한다. 전국 모든 곳에서 시위가 있었고, 경찰들과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져 무려 3,831명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찰은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의 숫자를 축소한다. 실제로는 훨씬 많이 참가했을 것이다. 이로서 1960년 4.19와 1980년 5.18을 이어 우리 역사의 한 획을 이루는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는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한 5일간의 감동적인 투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명동성당을 ‘민주화 운동의 성지’라고 부르는 이유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잡고 투쟁은 계속 확산되었다. 결국 계속된 투쟁에 위협을 느낀 노태우는 6월 29일 대통령직선제를 전면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 6·29선언이었다. 일각에서는 ‘속이구’라고 부른다. 5·18민중항쟁 이후 7년 만의 일이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나는 당시 감옥에 있어서 상황을 잘 모른다. 이에 관해서는 유시춘이 쓰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6월 민주항쟁』이라는 책을 보면 그 감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6월 투쟁의 마무리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다양한 평가가 있다. 그런 광범한 투쟁이 군부독재의 완전한 종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대통령 직선제 시행이라는 것으로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겠다. 아무튼 6월 항쟁은 마치 촛불시위 때처럼 전국적이고, 전국민적인 참여 속에 진행되었다. 그것도 경찰 폭력과 무지막지한 최루탄의 뽀얀 연기를 뚫고.

그즈음쯤 저녁을 먹고 책을 볼라치면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가 들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점차 지나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아니었다. 같이 수감되어 있던 다른 친구들도 그 노래를 들었다. 누군가 밤마다 교도소 담벼락에 와서 노래를 부르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거짓말처럼 감방 문이 열렸다. 안 나간다고 버텼다. 만기를 불과 1주일 정도 남겨 둔 상태에서 군사정권의 대국민 선전에 놀아나기 싫었다. 쓸모없는 일이었다. 감옥이라는 곳은 들어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들어가는 곳도 아니고, 나가기 싫다고 해서 계속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안 나간다고 버텼다

1987년 7월 8일 마산교도소 앞 새벽.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6월 투쟁을 전개하면서 교도소 담벼락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 사람들이었다. 마산은 이미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 열사의 주검이 상징하듯, 그리고 79년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부마항쟁이 벌어진 투쟁의 도시임을 그 때 비로소 알았다.

“아~ 내 사랑 동지들이여 투쟁으로 구출하리라”라는 ‘구속동지 구출가’의 노랫말처럼 그렇게 투쟁을 통해 나는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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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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