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의 손이 굳고 눈이 멀기까지…
        2010년 11월 02일 11: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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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진씨를 만나러 부산으로 갔다. 희진씨는 올해 7월, 삼성전자를 상대로 산재신청을 했다. 그녀는 보얀 피부에 눈이 예쁜 사람이었다. 27살이라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픈 사람 같지 않다.

    그러나 병을 앓은 지 5년째다. 희진씨의 오른쪽 눈은 시력이 거의 없다. 오른쪽 손과 다리는 조금만 무리를 해도 저리고 마비 증세를 보인다. 그녀의 병은 중추신경계 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이다. 낯선 병명이다. 증상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발병원인도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는 희귀병이다. 그녀도 자신의 병을 아는 데만 2년이 걸렸다.

    증상은 오른손이 저려오는 것으로 시작됐다. 손에 마비가 오더니 다리에도 이상이 왔다. 4년간 희진씨의 병원 진료기록을 살펴봤다. 증상이 시작된 2006년부터 다발성경화증 판정을 받는 2008년 6월까지, 37차례 병원을 찾았다. 그때부터 지금껏 한 달에 한두 번은 병원을 찾는다. 숱한 병원 방문기록을 보며 평탄하지 않을 그녀의 일상을 추측해본다.

    그녀의 일상은 늘 불안하다. 조심해야 할 것이 많다. 피로가 쌓여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안 된다. 재발될 위험 때문이다. 보행, 감각, 시력 등에 장애가 오는 다발성경화증은 계속적인 재발이 가능한 병이다. 재발이 반복될수록 증상이 치료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신체 일부분이 평생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 반올림의 길거리 캠페인 (사진=반올림)

    희진씨가 오른쪽 시력을 잃은 것도 한 차례의 재발 때문이다. 삼성을 퇴사하고 새로운 직장에서 일한 지 한 달 만에 재발이 됐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세상에 스트레스 안 받는 일이 어디 있어요.”
    희진씨는 한숨을 쉰다. 감기나 몸살 같은 흔한 병에도 마음을 졸여야 한다. 병으로 인해 면역력이 약해진 그녀의 몸은 잔병에 자주 시달린다. 그러나 몸이 피로하면 재발될 위험이 커진다.
    “취직을 하면 내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안 나갈 수도 없는 거고. 중간에 함부로 그만둘 수도 없는 거잖아요.”

    피로와 스트레스를 몸이 견뎌내지 못하니 직장생활을 할 수가 없다. 병이 재발한 이후 희진씨는 어떤 벌이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취업을 준비한다며 그녀는 컴퓨터를 배우고, 구직광고를 살펴본다. 한창 일한 나이인 희진씨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하다.

    마비된 손으로 천여 개의 LCD판넬을

    희진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그녀는 LCD판넬의 색상과 패턴을 검사하는 업무를 맡았다. 검사를 위해 하루에 몇 백 개나 되는 판넬을 직접 옮겨야 했다. 입사 4년차, 오른손에 마비가 왔다.

    “그래서 퇴사를 했어요?”
    “아니요. 퇴사는 그 다음해에 했어요. 조금만 더 참고 일해보자는 생각에서요.”
    그녀는 손목을 뒤로 젖히고 팔로 판넬을 드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일을 계속했다는 거다. 그러면서 “그때 병가를 안 낸 게 제일 후회돼요”라고 한다.

    병가를 신청하지 못한 이유가 분명 있었다. 일은 늘 많았다. 12시간 교대근무, 이 생활을 1년 6개월 동안이나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피해를 보는 건 동료들이었다. 눈치가 보였다.

    또 성과급과 승진을 결정하는 인사고과도 마음에 걸렸다. 삼성의 인사고과는 상대평가로 이루어졌다. 반드시 정해진 인원수만큼 마이너스 점수(D이하)를 주어야 했다. 그러니 병가를 쓰거나 퇴사를 앞둔 이에게 마이너스 점수를 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희진씨는 병가를 쓸 수 없었다. 몸 상태는 더 나빠졌고, 다리에도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판넬을 나르는 일은 원래 기계가 하던 작업이라고 했다. 입사 초기만 해도 컨베이어 벨트로 판넬을 이동시키던 설비가 사람이 직접 판넬을 들고 옮기는 구조로 바뀌었다.
    “많이 빨리 (물량을) 빼려고 바뀐 거죠.”

    컨베이어 벨트로 LCD판넬을 옮길 경우 앞 라인에서 문제가 생기면 뒷공정은 판넬이 오지 않아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직접 판넬을 옮기면 문제가 된 제품만 빼고 옮겨와 작업을 할 수 있기에 시간이 절약됐다.

    직원들도 처음에는 바뀐 설비를 반겼다. 생산물량이 늘어나야 성과급도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15에서 19인치(inch) 크기의 LCD 화면을 하루에 많으면 1000여개나 옮겨야 했다. 손목이나 목, 어깨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빠른 시간에, 많은 물량을, 정확히

    검사 업무 자체도 쉽지 않았다. LCD판넬 하나당 20여 가지의 색상이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검사는 한 개당 20초 안에 마쳐야 했다. 한 시간에 80여개, 하루에 천여 개 가까이 판넬을 검사했다. 이 모든 검사는 육안으로 이뤄졌다.
    “화면은 어느 정도 거리에서 봤어요.”
    “이 정도요.”
    희진씨가 눈에서 한 뼘 거리에 손바닥을 세운다.

    “그렇게 가까이요? 하루 종일 그렇게 화면을 봤다고요?”
    작은 티끌이나 미묘한 색상 차이라도 지나칠 수 없기에 LCD 화면에 얼굴을 최대한 가까이 대고 작업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불량을 놓치는 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만일 하나라도 걸러내지 못한 불량이 있다면 그날은 일이 끝난 후 남아서 재검사를 해야 했다. 재검사만 두어 시간이 걸렸다. 실수는 인사고과에 반영됐고 사유서도 제출해야 했다. 그러니 ‘빠른 시간’에 ‘많은 물량’을 ‘정확히’ 검사하기 위해 늘 긴장해야 했다.

    다발성 경화증은 면역질환 중 하나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스트레스와 과로는 면역기능을 저하시키는 대표적인 원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LCD판넬을 전기에 꽂은 채 검사했기에 전자파에 종일 노출됐다. 또한 납과 같은 유해 물질의 사용이 의심되는 고온테스트와 작업 공정이 그녀의 작업장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 그녀의 병은 이 모든 것들을 의심하게 만든다.

    최소한의 보상

    증세가 악화된 희진씨는 2007년 2월 삼성전자를 퇴사한다. 내가 물었다.
    “그래도 삼성 다닐 때는 삼성이 좋았죠?”
    삼성은 많은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직장이다. 정작 희진씨는 정색을 한다.
    “일도 많고 힘들어서…….”

       
      ▲ 반올림의 길거리 캠페인 (사진=반올림)

    그러나 삼성에 대한 반감은 그녀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이 만나는 계기가 됐다. 부산 시내를 걷던 중, 희진씨는 길 한쪽에서 삼성에 관한 서명운동을 하고 있는 걸 봤다. 삼성불매운동이라 생각하고 자신도 서명을 하려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건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알리는 반올림 선전전이었다. 그렇게 반올림과 만나게 되고, 2010년 7월 희진씨는 산재신청을 한다.

    “의사가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했으니까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데 안 받을 수가 없어요. 살아가는 게 스트레스예요.”
    희진씨의 말이 꼭 한숨 같다. 증상을 억제시키기 위해 이틀에 한 번씩 맞는 주사도, 스물일곱의 나이에 용돈을 받는 처지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삼성 광고도 스트레스다.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이 ‘아직도 일 안하냐’고 물어볼 때 제일 속상하다는 그녀다. 19살 첫 직장에 입사한 그녀가 꿈꾸던 8년 후는 지금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앞서 산재신청을 한 13명의 피해자들에게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이 그래왔듯, 이희진씨에게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려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없길 바란다. 산재 인정은 스물일곱의 그녀에게 주는 최소한의 보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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