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무슨 '다문화 사회'입니까?"
        2010년 10월 31일 10:0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지금 아주 피곤한 상태에서 이 글을 적습니다. 어제 런던의 SOAS (동방 및 아프리카학 대학)에서 한국의 인종론 및 인종주의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방금 오슬로에 돌아와 아직 피로 회복이 전혀 되지 않는 것입니다.(http://www.soas.ac.uk/koreanstudies/events/seminars/29oct2010-race-and-racism-in-modern-korea.html)

    그 강연의 주제는 주로 개화기 및 일제 초기의 조선에서의 인종론(주로 ‘황색인종 단합론’)이었는데, 청중들과 대화를 하다가 요즘 남한에서 얘기되는 소위 ‘다문화 관련 정책’의 문제가 화제로 나왔습니다.

    단일민족 정치적 이용 중단 환영하지만

    청중 중의 한 분은 그래도 단일민족론의 공식적 폐지와 다문화적 인구 구성이라는 현실의 국가적 인정 등을 일종의 진일보로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피력하셨는데, 저는 ‘단일민족’이라는 수사의 국가적 이용의 정지를 환영하면서도 과연 그렇게까지 큰 진일보인가 다소 회의론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제 회의론적 입장의 근거를 대략적으로 밝히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적 수사는 어떻든간에 완벽한 ‘다문화 사회’, 즉 여러 문화들, 또는 그 문화들을 담지하는 종족들이 완벽하게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회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죠.

    모든 소수자들이 다 동등해진다면, 도대체 누구를 3D직종으로 보내고 누구를 착취해서 초과이윤을 짜낼 것인가요? 이윤이 경향적으로 하락해가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초과이윤을 빼낼 수 있는 다소 무권리 내지 피착별 상태에 있는 소수자들의 존재는 매우 귀중하죠. 자본가들에게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슬로에서 공사장이든 청소 용역회사든 제일 더럽고 어려운 일들을 다 도맡아 하는 폴란드 이민자들을 보세요. 이민자들에 대한 착취를 감시, 적발하고, 국가적으로 처벌도 할 수 있는 사민주의 낙토(?) 노르웨이인데도, 청소 용역회사 같으면, 폴란드계 피고용자 중에서는 정규직들은 18%밖에 되지 못하고 나머지는 각종의 비정규직들입니다.

    병원, 유치원, 호텔 등에서 일하는 폴란드 사람 같으면, 정규직들은 절반이 될까 말까 하고요. 그것은 전체적으로 비정규직이 근로인구 중에서 9% 정도만 되는 노르웨이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민주의 일간지 <다그스블라데트>마저도 폴란드인들이 노르웨이에서 사실상 "B급 노동자"가 됐다고 자인하죠. 

    노르웨이의 경우

    뭐, 자인 안해도 알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인데 말에요. 아무리 ‘다문화 정책’을 펴서 폴란드계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민족언어 추가 학습시켜주고 소수의 폴란드계 지식인들을 일간지 고정필자로 기용해주고, 폴란드와의 문화교류를 활성화한다 해도, 결국 차별과 착취의 근본적 현실은 잘 바뀌지는 않죠.

    그러나, 노르웨이의 경우에는, 외국노동자들이 착취를 당한다 해도 적어도 ‘장기적인’ 착취가 계획되고, 궁극적으로 ‘국민’의 신분을 얻어, 그 착취를 어쩌면 면할 수도 있는 ‘정주’의 가능성은 많이 열려 있습니다.

    폴란드 등 유럽연합 가입국 출신들의 정주는 쉽게 가능하고, 이외에도 1년에 2만여 명의 ‘정주를 전제로 하는 이민’을 받고 있는 것이죠. 정주하고, 영주권 얻고, 7년 뒤에 노르웨이 국적을 얻으면, 그 다음에는 사실상 착취가 거의 정지될 가능성은 큽니다.

    노르웨이어 구사능력이 좋고 일단 노르웨이에서 정주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는 폴란드계 사람이라면, 상당한 이유없이 비정규직으로 고용될 경우에는 얼마든지 고용주의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 위반으로 고발할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특히 이슬람권 출신의 경우에는 차별과 착취는 거의 ‘세습’될 위험성도 있지만 (이슬람적 이름을 가지고 노르웨이에서 좋은 직업 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회는 그래도 나름의 대책을 취하고 있기도 하죠. 인종차별방지법도 있고 하니까요.

    즉, 소수자에 대한 착취는 여기에서 ‘새로운 틈입자’에게 집중돼 있고, 그러면서도 그 틈입자에게 ‘완전한 사회 편입’의 가능성도 어느 정도까지 제시돼 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본래의 언어나 문화 등을 무조건 이탈하고 망각하라는 노골적 압력까지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저희 동네 공립도서관에 가도 예컨대 파키스탄의 우르두어나 이란의 파르시어 등의 이민자 언어로 된 책자들이 아주 많아요. 이민자들의 아이를 민족문화의 자장으로 끌어들일 합밥적 방법이 다 있단 이야기죠. 물론 토박이 문화 위주로 돌아가는 노르웨이는 진지한 의미의 ‘다문화 사회’는 아니지만, 좌우간 사민주의자들이 나름의 포괄적이고 관용적인 사회통합정책을 쓴다고는 볼 수 있죠.

    대한민국의 경우

    대한민국은 이것마저도 없습니다. 일단 정주를 전제로 하는 노동이민부터 부재하죠.(아주 고급스러운 극소수 업종 제외하고) ‘고용허가제’라는 3~4년 동안 집중 고도의 착취를 받고 나가라는 식의 단기착취 위주 제도고, 하등의 장기성은 없죠.

    고급 인력을 제외하고서 정주가 가능한 것은 결혼이민자들인데, 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통합이 아닌 사실상의 ‘동화’입니다. 노르웨이처럼 ‘민족어, 민족문화 보존정책’은 전무하고, 일단(국가로부터의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아이를 낳아 ‘한국인’으로 키우고 본인도 한국어부터 한국 ‘예절’, 즉 윗사람 앞에서 무조건 몸을 굽히는 것까지 다 배우라는 압력일 뿐입니다.

    다르게 생긴 얼굴들을 관용해주고 ‘단일민족’에 대한 시대착오적 이야기를 그만둔 것은 진일보라면 진일보지만, 거기까지입니다. ‘다르게 생긴 사람’으로서의 생존권은 얻어지지만, 베트남인이나 필리핀인으로서 그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면서 한국 국민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민족으로 편입돼야 된다는 것이죠. 즉, 민족과 국민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다문화주의’에요? 차별 받고 살 ‘다문화 가정’ 출신의 저임금 노동자들을 보다 많이 재생산시킬 교묘한 술책일뿐입니다.

    그리고 약간 비관적 이야기지만, 정말 국내에서 민중적 성격의 정치세력이 집권하지 않는 한 노르웨이 정도로라도 ‘다문화적’ 환경을 조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기에는, 한국 지배자들에게 장기적 사고가 너무 부족하고, 백인이 아닌 모든 타자들에 대한 멸시가 강력하게 박혀 있는 인종주의적 사고가 너무 공고하다는 것이죠.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