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없는 삶을 상상하자"
        2010년 10월 30일 07: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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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누구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안다. 읽어본 이들도 꽤 되고, 직접 읽지 않았더라도 어쨌든 그 소문은 다들 들어 알고 있다. 공산당 시절 소련도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에 난데없이 등장한 ‘지하 베스트셀러’. 이 책은 광고 한 번 제대로 내보지 못하고 입소문만으로 종이 값을 올렸다.

    책 내용은 한 마디로 한국 최대의 재벌가, 최대 기업의 실상에 대한 폭로였다. 이 폭로가 이 나라에서는 얼마나 불온한 행위였던지 진보 언론임을 자부하던 신문사들마저 『삼성을 생각한다』의 광고를 꺼렸다. <경향신문>은 이 책을 소개한 철학자 김상봉의 칼럼을 싣지 않으려다가 다시 이를 자기반성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삼성을 생각한다』의 폭로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상당히 양가적이었다. 한 편에는 분노가 있었다. 혹은 “또 하나의 가족”(삼성)에 대한 배신감과 환멸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는 이 씨 일가의 귀족 행세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다. 삼성이 저지르는 부패와 탈선의 스케일에 오히려 감탄하는 이들마저 있었다.

       
      ▲책 표지 

    이것은 어쩌면 모든 폭로가 맞부딪히는 딜레마라고도 할 수 있다. 지배자들의 추악함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데 그친다면, 진실은 타블로이드 신문 기사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쉽다. 부패와 타락에 맞선 궐기가 아니라 오히려 추문에 대한 질시를 부추기기 십상이다.

    그래서 격문이 필요하다. 단지 삼성을 ‘생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 어떤 행위의 요청이 함께 해야만 한다.

    『굿바이 삼성』은 『삼성을 생각한다』에 절실히 필요한 바로 그 ‘격문’이다. 이 책은 삼성이 우리의 대적이라고 말하고, 삼성불매운동으로 이 싸움을 시작하고 주창한다.

    노골적인 선동 서적이고, 불온 팸플릿이다. 『삼성을 생각한다』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이 책을 사서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그런 물건이다.

    <경향신문> 사건이 낳은 책

    『굿바이 삼성』의 발단은 위에서 말한 <경향신문> 사건이다. 김상봉은 <삼성을 생각한다>를 다룬 자신의 칼럼이 <경향신문>에 실리지 않자(2010. 2. 17) 이 원고를 <레디앙>, <프레시안> 등의 인터넷 언론에 발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진보’ 언론조차 자기검열하게 하는 삼성의 위력이 다시금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김상봉은 이 사건을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책 머리말에서 밝히는 그의 당시 속내를 들어보자.

    “지금 와서 하는 고백이지만 칼럼이 실리지 않았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비감한 심정이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이야말로 내가 예상치 못했던 기회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올해 초부터 나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진보를 위해서는 이제 삼성과의 싸움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나는 다른 무엇보다 삼성불매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경향신문>의 칼럼 지면을 통해 꾸준히 이를 공론화시킬 생각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문제의 칼럼이 게재되지 않은 일이 생겼으니 나로서는 울고 싶은데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경향신문>에 실리지 못한 칼럼을 그대로 실어준 <프레시안>에 삼성불매운동을 주제로 사람들이 글을 이어 써 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이 매체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이 책에 실린 첫 글인 「지금 당장 삼성불매운동을 제안합니다」를 기고하게 되었다.” (4-5쪽)

    김상봉의 글을 필두로 여러 필자들이 삼성을 주제로 <프레시안>에 글을 기고했다. 이 연재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고, 또 연재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건들을 낳았다. 가령 『철학콘서트』의 저자인 황광우가 노무현 정부 실정(失政)의 배후에 삼성 재벌의 ‘보이지 않는’ 독재가 있다는 글을 올렸다가 이것이 논쟁이 되자 과거 노무현 정부 참여자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실제 삼성이 참여정부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것을 증언하기도 했다.

    <프레시안> 외에도 다른 매체들에서 『삼성을 생각한다』 열풍, <경향신문> 사건 그리고 김상봉의 삼성불매운동 제안에 대해 다루기 시작했다. 그 필자들 중에는 우석훈, 조국, 이택광 등 요즘 한창 명성을 높이는 논객들도 있었다.

    『굿바이 삼성』은 <프레시안>과 여타 매체들에 발표된 이러한 글들을 한데 모은 책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글 모음에서 흔히 보는 산만함이나 초점 없음과는 거리가 멀다. 공저자이자 사실상 편집자인 김상봉이 서론과 결론 격의 글에서 워낙 강한 실천적 제안을 던지는데다가 다른 필자들의 글이 이 제안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마치 열띤 토론회를 보는 것처럼 긴장감이 높고 밀도가 있다. 아니, 단순한 토론회라기보다는 무슨 전략 회의 같다.

    불매운동으로 삼성과 대결하자

    김상봉의 ‘발제’는 명쾌하다. ‘격문’에 어울리게 선명하면서 단단하다. ‘반MB’니 ‘반한나라당’이니 하는,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의 익숙한 대립 구도는 대적을 잘못 잡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정치가나 정치 세력들은 어쩌면 하수인에 불과하고 그 배후에는 삼성이라는 거대 자본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중의 한 명인 김진호는 이렇게 말한다.

    “이 한국적 포스트 민주화 체제를 추동하는 제도적 헤게모니 세력은 MB 정부가 아니라 삼성의 이건희 체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알려진 바대로 이미 삼성의 연매출액은 국가 예산을 압도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정보력에서 국정원을 능가하고, 기획력에서 청와대를 압도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정계, 재계, 법조계, 학계, 언론계 등 사회 각 영역의 여론 주도 집단을 지지층으로 둠으로써 막강한 정책 형성 능력을 갖춘 세력이 되어 있다.” (226쪽)

    따라서 군사 독재에 맞서 정치적 민주화를 일정하게 달성한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새로운 과제는 삼성과의 대결이다. 김상봉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식화한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 이건희 일가를 삼성으로부터 추방하고 삼성을 종국에는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이건희 회장과 삼성이 단순한 기업 집단도 자본가도 아니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나라의 근본인 정의를 파괴하는 독재 권력이기 때문이다.” (20쪽)

    이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의 과제이다. 김상봉에 따르면,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정치를 하겠다는 세력은 삼성 권력을 어떻게 해체할지 그 청사진을 제출하고 이 싸움에 앞장서야 한다. 이것 없이 ‘민주주의’를 말하고 ‘복지국가’를 말하는 것은 변죽을 울리는 짓에 불과하다.

    “정치가 다른 무엇보다 시민적 자유와 권리 그리고 평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이라면, 삼성과 싸우는 것은 바로 지금 가장 절박한 정치적 과제이다. 단순히 무상급식이나 무상의료 같은 복지의 확대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지금 한국 사회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 기업에 의한 시민적 자유의 억압을 정면으로 문제 삼고 그 기업독재의 정점에 있는 삼성과의 전면적인 싸움에 나서지 않는 한, 우리는 막힌 하수구를 뚫지 못하고, 그 위에 소독약만 뿌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39쪽)

    그럼 삼성과 대결할 구체적인 수단과 경로는 무엇인가? 당장에는 국가 권력도 삼성에 포획되어 있으니 정부의 힘으로 통제할 수도 없고, 지금 삼성에는 노동조합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형편이니 노동자의 힘으로 개혁한다는 것도 무망하다. 그래서 김상봉이 제안하는 것이 소비자의 단결을 통한 싸움, 즉 삼성불매운동이다.

    “국가도 노동조합도 삼성의 불법을 바로잡을 수 없으니 이제 남은 것은 소비자들의 직접행동뿐이다. 삼성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소비자들에게 자기 제품을 쓰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이 모든 자본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삼성 물건을 쓰지 않는다면 그날로 삼성은 아무것도 아니다.”

    불매운동으로 가능할까, 삼성만이 문제일까

    문제는 과연 ‘그날’이 올 것인가 이다. 원리상으로는 불매운동이 거대 자본 삼성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이 되리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 ‘원리’를 실현할 운동이 실제 대중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민거리가 많다.

    『굿바이 삼성』의 다른 저자들부터가 그러하다. 물론 개중에는 삼성불매운동을 이미 3년 전에 제창한 전국철학앙가주망네트워크의 성명서(「돈 아닌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하여」)도 있다. 이 성명서는 단호히 제안한다.

    “이 기회에 삼성제국의 반국가적 망동을 응징하고 진정한 삼성의 경쟁력을 확립시킬 채찍을 가한다는 취지에서 삼성의 족벌체제가 종식될 때까지 일체의 삼성 제품에 대해 범국민적 불매운동을 벌일 것을 시민사회에 제안한다.” (119~120쪽)

    정치학자인 하승우는 불매운동 전술을 김상봉의 제안보다 훨씬 구체화하여 제시하기도 한다.

    “재벌들에 대한 불매운동은 그들의 약점을 건드려야 한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등의 제2금융권에서 비자금을 축적하고 전횡을 일삼아 왔다. 이런 자금줄을 틀어막아야 삼성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더구나 국내 투자자만이 아니라 외국인 투자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삼성생명과 삼성그룹의 실체를 알리며 압박을 가해야 한다. 삼성생명을 중심에 놓고 삼성이 운영하는 보험, 카드 등의 시장 점유율을 떨어뜨리고 앞으로도 그 점유율이 계속 떨어질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예고해야 한다.” (327~328쪽)

    하지만 저자들 중에서 김상봉의 삼성불매운동 노선에 맞장구치는 이는 예상 외로 적다. 삼성에 대한 비판에서는 궤를 같이 하더라도 그 적절한 대응 전략이 불매운동일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듯한 모습이다. 류동민 같은 이는 오히려 불매운동 전략에 숨은 여러 문제점들을 짚기도 한다.

    평자도, 제2의 민주화 투쟁의 대립 구도에 대한 김상봉의 지적에 기본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몇 가지 대목에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첫 번째 의문은 불매운동만을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우는 게 좀 성급한 결론 아닌가 하는 점이다. 불매운동이 공상적이라거나 오류라는 게 아니다. 그것 외의 가능성들을 너무 빨리 시야에서 지운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를 힘 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삼성의 무시무시한 무노조 경영 전략이다. 이것 때문에 지금도 삼성에는 노조다운 노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삼성에는 기업 내부의 시민사회가 없다. 마치 북한처럼 삼성에는 현 지배 체제를 대체할 대안의 싹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김상봉 같은 이가 눈을 삼성 ‘바깥’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 전략도 이제는 그 한계에 도달해 있다. 이미 그것은 중대한 전환점을 앞둔 상태다. 내년으로 복수노조 유예가 종지부를 찍으면 유령 노조를 만들어 노조 설립을 막던 수작도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게 된다. 당장 삼성 안에서 강력한 노조가 등장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철의 독재 체제가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매운동 전략과 함께 여전히 삼성 내부의 투쟁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복수노조 국면의 등장과 함께 이 가능성을 살려내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게 아닌가? 즉, ‘삼성 되찾기 운동’이 ‘삼성 없이 사는 운동’과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또 다른, 더욱 깊은 의문은 『굿바이 삼성』의 저자들이 거대 자본을 너무 삼성 하나로만 치환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 등장한 초거대 자본의 자리에는 삼성뿐만 아니라 현대도 있다. 삼성만큼 세련되고 집요하지 않다 뿐이지 현대 자본 역시 한국의 정치 권력 배후에서 전 방위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더구나 그 타락과 부패의 정도도 결코 삼성에 뒤지지 않는다. 동희오토와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투쟁에서 드러나듯이, 온갖 불법, 편법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해온 선봉 부대가 바로 현대 자본이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투쟁은 필연적으로 현대 자본과의 대결로 발전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실은 ‘삼성과의 대결’만이 아니라 이를 포함한 ‘거대 자본과의 대결’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게 아니겠는가? 『굿바이 삼성』이 아니라 『굿바이 대자본』이 본래 더 적절한 제목 아니었을까?

    삼성불매운동은 ‘삼성 없이 사는 운동’의 출발

    그런데 『굿바이 삼성』의 저자들이 이런 의문에 둔감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위의 논점들에 대한 나름의 해명과 모색을 담고 있다.

    가령 김상봉은 책 앞머리의 글에서는 불매운동 이후의 대안은 나중에 검토할 과제로 미뤄두겠다고 밝히지만 결론에 가서는 입장이 바뀐다. 마지막 글 「제왕적 경영에서 시민적 경영으로」에서 그는 이건희 ‘이후’의 삼성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나아간다. 이 글에서 그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모델은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이다.

    이러한 고민의 전개는 불매운동 전략이 결국은 삼성 내부의 노동자 투쟁과 서로 만나야 하는 것임을 증거한다. 기업 내에서 노동자들 스스로 각성하고 단결하며 성장하지 않고서는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매운동에 대해서도, 『굿바이 삼성』에 실린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다 보면 어느덧 처음과는 달리 바라보게 된다. 평자는 특히 하승우의 글(「정신 차려, 삼성!」)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승우는 삼성불매운동이 단지 삼성을 타격하기 위한 운동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삼성 없는 삶’, 삼성이 지배할래야 할 수 없는 삶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임을 일깨운다.

    “우리가 바로 삼성공화국을, 재벌공화국을 떠받쳐 왔음을 고백하고 그들 없이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삼성 래미안이나 삼성 에어컨, 삼성 노트북, 삼성 카드, 삼성 보험을 동경하지 말하고, 재벌들의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하지 말고 그것 없이 생활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330쪽)

    즉, 삼성 없이 사는 운동은 착취와 경쟁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운동의 출발이다. 우리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민주화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하고 시민운동을 하면서도 항상 놓쳐 왔던 것을 이제나마 진지하게 착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성불매운동이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다만 그게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운동이라는 사실일 뿐이다.

    결국 평자는 어느새 『굿바이 삼성』의 주장에 설복 당하고 만 셈이다. 이것이 이 책의 선동력이다. 단지 목청만을 높이거나 운동권의 상투어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독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새로운 지평을, 그 가능성을 예감하게 함으로써 이 책은 ‘격문’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

    정말 격문이 필요한 때다. 행동이 필요한 때다. 그러기에 이 책이 평자 외에 또 다른 독자들, 더 많은 독자들을 격앙시키길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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