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꽂이엔 친구들의 유고집이 많다"
    2010년 11월 01일 08: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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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며/ 자기부정으로 일어서는 사랑을 보며/ 다시 올 그대의 이름으로/ 반도의 질긴 생맹력이 일구어내는,/ 핏빛으로 선연히 눈뜨는 봄과/ 계절 마디마디/ 우리 모두 꿈틀대는 혁명을 보며/ 아, 우리는 살아있다” (박형희 시 ‘꽃을 보며’ 전문) 

감옥생활 익숙해지다

나는 다시 감옥에 갇혔다. 석방된 지 2년도 안된 상태에서. 감옥에서 만난 누군가가 “처음이 어렵지 그 담부터는 감옥문이 우리 앞에 활짝 열려있다”라고 하더니 그 꼴이었다. 이번에는 성동구치소였다. 구치소로 들어가던 날 안도감과 동시에 감사한 생각마저 들었다. 감옥생활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들이 왕창 들어왔다. 지금이야 감옥에서 신문도 보고, TV도 본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심지어 대학 1학년생짜리도 있었다. 알고보니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이라는 조직의 결성식을 했는데, 전두환이 공산혁명분자의 난동으로 규정하고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진압했다고 했다. 그 결과 1,290명의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이 숫자는 세계학생운동사상 최대의 숫자로 기록되고 있다. 

이번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었다. 국가보안법 제7조 5항 ‘이적표현물 소지 등의 죄’였다. 국가보안법이라고 알까? 지금도 있다. 국가보안법은 일제가 식민지 사상 통제와 민족해방투쟁을 탄압하며 ‘황국신민화’를 강제하는데 악용해 왔던 치안유지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승만이 1948년에 만들고, 박정희가 1963년에, 그리고 전두환이 1980년에 전면 개정한 시대의 악법이다.

통계에 의하면 1981년부터 87년까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12명이 기소되어 그 중 13명이 사형, 28명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특히 1984년 7월부터 87년 6월까지 무려 1,025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고 한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란 얘기겠다. 당시의 판결문도 나중에 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야 한다. 천편일률적인 내용이다. 

“…(북한이) 소위 남조선 정부는 미제국주의와 그 괴뢰인 군사파쇼 정권에 의하여 미제의 신식민지로 되어 버려 민족적, 계급적 모순이 심화되어 있다고 모략선전하면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인민해방을 위하여서는 남조선의 노동자, 농민 등 피지배계급과 진보적 청년학생, 지식인 등 피지배계층이 광범위하게 연합, 반제 반파쇼투쟁을 전개하고 미제를 축출하고 파쇼정권을 타도하여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역량과 연대하여 이른바 전조선 혁명을 완수하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선동하여 오고 있으며, 이러한 북한의 모략 선전과 선동 등 주장을 내용으로 하는 표현물을 탐독, 소지하면 북괴를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걸 읽었기에 구속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학생운동을 북한과 연계시킬 수만 있다면 ‘빨갱이 사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겠다. 당시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 판결문을 작성하던 판사들은 이제는 컴퓨터가 발달해 있으니 ‘Ctrl +V’로 복사해서 쓸 수 있게되어 더욱 편리해졌겠다. 

노무현 정권의 역사적 과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대통령 스스로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한다”고 했었다. 유시민은 “다른 법은 모두 타협할 수 있지만 국보법은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고도 했었다. 그러나 여당이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을 없애지 못했다.

지금 한나라당이 미디어악법을 통과시키는 것과 대비된다. 그들은 국회 안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새삼 그들의 역사와 시대인식이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 와서 노무현 시대를 말할 때 “국가보안법 철폐를 이루어 내지 못한 것은 역사와 국민이 용서 할 수 없는 과오다”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빨간 수번 번호를 단 우리를 재소자들은 ‘국보’라고 불렀다. 졸지에 ‘나라의 보배’가 된 셈이다. 1986년 두 번째 징역은 그렇게 다가왔고, 결국 징역 1년이 확정되어 마산교도소로 옮겨졌다. 마산교도소는 전국의 폐결핵 환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만큼 따뜻하고, 좋은 환경이랄 수 있었다. 누군가는 전염의 위험을 걱정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징역살이가 훨씬 편하다. ‘문제아’로 찍혀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10명이 쓰는 병실 방 중의 하나를 혼자서 썼다. 그리고 재소자들이 가꾼 깻잎이나 야채를 거저먹는 행운도 있었다. 나는 역사가 몰고 올 1987년의 태풍을 전혀 모르는 채 형들에게 가끔 편지나 보내면서 징역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즈음의 심정은 편지를 통해 이렇게 쓰고 있었다.

                                                  * * *

형에게

“진실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가고 4월에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아돌아가지만
꽃은 살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것….” (안장현 시 ‘어느 정신병원에서’ 중에서)

   
  ▲제주도 유채꽃. 

노란 유채꽃이 활짝 핀 제주도의 사진 한 장을 벽에 붙여 놓고 기다리기 시작한 이제 봄입니다. 며칠 전 우연히 담장 밖을 보았는데 산등성이 아래께에 개나리가 만발해 있더군요. 반가운 김에 ‘지가 안 피고 배겨’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방안은 그리 따뜻한 편은 아닙니다. 징역에는 사계(四季)가 아니라 여름하고 겨울밖에 없다더니 맞는 말인 듯합니다. 그래도 햇볕 드는 창가에 서서 책을 볼라치면 제법 훈훈한 바람입니다…(중략)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하도 개판으로 돌아가니까, 워낙 개판을 싫어하는 하나님이 두 명을 선발해서 동굴에서 합숙훈련을 시켰답니다. 말하자면 ‘의식화’ 교육이지요.

100일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세상에 나온 두 사람은 그 동안의 의식화 덕분에 세상이 완전 개판으로 보였겠지요. 가는 곳마다 질책하고, 시비 붙고, 비난하고… 하나님이 보니까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다시 동굴로 불러 들였답니다. 말하자면 ‘재교육’인 셈이지요. 역시 100일 정도 지나서 동굴에서 나간 그들은 보다 온화하게, 그리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그릇됨을 고쳐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수영의 시 중에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아시겠지요. 멀리 떨어져서가 아니라 함께 딩구는 그것이 필요하단 생각입니다. 더러움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더러움에 몽창 빠져서야 비로소 극복되는 것이 역사의 진리 아니겠습니까?

더럽든, 깨끗하든 초연함을 빌미로 한 거짓말이 아니라 철저히 참가하는 것이 어디서나 필요하단 생각입니다. 이곳의 생활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완전히 함몰되기 전에는 괴로움도 있을 수 있겠고, 안타까움도 있을 수 있겠으나 일단 포용한 다음에는 그 모든 것은 한낱 사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광장」에 나오는 명준이라는 자의 삶도 이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생각해 보건데 역사에 덜 함몰된 자가 한 번의 경험과 얕은 관찰에 의해 방황하는, 결국은 형이상학적 파멸을 자초하는 것 이상은 아니겠다는 생각입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차피 함께 살아야 할 곳이라면 피상적으로 아픈 척하는, 과장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 대신에 차분한 함께 있음이 더욱 큰 것 아니겠습니까? 다분히 지식인적인, 그리고 덧붙여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과대화된 허위의식적 고통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보면 동정보다는 혐오감이 앞섬은 바로 그런 까닭 때문입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나오는 사람처럼 두 번째 징역생활을 마친 후에는 보다 넓게, 보다 유연해 졌음 합니다. 삶을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쉬운 게 아니란 걸 새삼 느낍니다. 밀려드는 자신감들이 울끈불끈 튀어 올라 애초에 가졌던 ‘자조감’을 벗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결국 그것은 역사에 대한 이해와 전망에 다름 아니겠습니다.(1987년 4월 3일 아침에)

                                                 * * * 

편지를 돌아보면서 나름대로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음을 느끼게 된다. 사실 총칼로 무장한 무식한 대상과 싸우면서 우리 자신의 인간성도 파괴될 수 있기 때문에 여유는 중요한 가치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해 6월 감옥에서 친구의 죽음을 들었다. 폐결핵이라고 했다. 각혈을 심하게 하고 있음을 주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배들 교육이다, 야학이다 쉴 틈 없이 일하다 결국 죽었다. 형은 편지를 통해 “너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알린다”고 말했지만 사실 견디기 힘들었다. 

죽은 날자도 마침 광주항쟁이 시작된 5월 18일이었다. 겨우 28살 나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 친구의 나이만큼 스물 여덟행으로 된 시 하나를 쓰는 것 밖에 없었다.

                                                  * * *

   
  ▲인터넷에서 발견한 박형희. 

침묵연습(4) – 고 박형희에게 드림

바람처럼 이슬처럼 사라지면 그만인가
상처투성이, 허리 잘린 우리에겐
산다는 것은 눈 부릅뜬 철조망
그리움으로 달리다 서야 하는
백오십오마일 늘어선 절망뿐인가

그대 없음으로, 삼십촉 백열등
스물여덟살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들은
듣는 이 없이 쇠창살에 부서져야만 하는가
하여 우리 하나됨의 가난한 소망마저도
할애비 묻은 곰나루 한 송이 진달래 되어
어둔 시대의 모퉁이에 또 차가웁게 누워야만 하는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잘근잘근 짓밟힌 자리마다
질경이 새순으로 돋아오라 친구여
무너진 가슴마다 썩은 폐 잘라내는 선연함으로
진주난봉가 어깨 춤 장단 맞춘 힘찬 북소리로
돌아오라

갈 길은 멀고멀어
우리가 먼저 죽는다 해도
학암포 바닷가 지침없는 파도같이
우리 뜻은 여전히 남아
바람불면 펄럭이는 깃발로 어김없이
살아오는 것일진대

그대 살 에이는 어두움 온몸으로 껴안고
그대 외로움 무등산에 함께 묻고
또박또박 작은 발걸음 쉼 없이
동트는 그날로 걸어오라
친구여 

                                                    * * *

그 친구의 죽음을 시작으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다. 지금도 책꽂이에는 친구들의 유고집이 많다. 역사란 살아있는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그러나 나의 평온한(?) 징역살이와는 무관하게 역사적인 87년이 시작되고 있었다. 도둑처럼 새벽이 오고 있었다. 새벽이 오기 전 미명(未明)이 가장 깜깜할 때라고들 했다. 아무런 전망도 안보이고, 폭압이 점점 더 심해져 오던 그 때, 항쟁의 6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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