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착한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2010년 10월 29일 10: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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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모는 자는 /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 바람아 동지 섣달 모진 바람아 / 네 쓸쓸한 칼끝으로 지울 수 / 없다” (양성우 시 ‘겨울공화국’ 중에서)

       
      ▲ 박종철이 고문살해당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도착한 곳이 어딘지를 알 수가 없었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서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갔다. 여관방처럼 양쪽으로 방이 있었다. 열린 방들이 이상했다. 어떤 방은 빨간 타일로만 가득했고, 어떤 방은 파란 타일로만 가득했고, 어떤 방은 노란 색으로만 되어 있었다. 공포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신문받는 사람에 대하여 먼저 옷을 벗기고 한 팔은 등 위를 향하고 한 팔은 겨드랑이 밑에 끼워 양손을 등 위에서 잡게 하고는, 삼끈으로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단단히 묶어 천정의 쇠갈구리에 매달아 놓고, 끈의 한쪽을 끌어당기면, 사람이 공중에 매달리게 된다.

    三, 四분이 지나면, 두발의 엄지발가락만 땅에 닿고, 양손은 천정으로 향하게 된다. 이러면 전신에 땀이 흐르고 대소변을 싸기도 한다. 소위 심문관리라는 자들은 독서를 하든가 바둑을 두든가 잠을 자거나 하며 거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전신의 피는 머리끝으로 흐르고, 근육은 뒤틀려 일어나며 四, 五시간 뒤에는 혀를 내놓고 기절한다. 그러면 의사가 와서 다시 살려낸다. 二 주간을 매일 이렇게 한다. 이, 삼일이 지나면 두 엄지손가락은 모두 살이 벗겨지고 떨어져 나가 뼈가 드러난다”

    “심문장에 들어오면, 반드시 먼저 주먹과 발길질로 한바탕 구타를 가하였다”

    백암 박은식 선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오는 얘기다.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그처럼 악독한 고문을 했다는 기록이다. 오죽했으면 독립운동사가 아니라 독립운동에 대한 ‘피의 역사’라고 썼을까?

    그러나 그런 고문 기술을 발휘한 것은 일본경찰만이 아니었다. 하긴 일본놈들 밑에서 독립군에 대해 악독한 고문을 했던 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한국경찰의 우두머리로 출세를 이어갔으니까, 고스란히 고문기술이 이어져 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겠다.

    고문기술의 계승

    일본놈들이 했던 것과 같은 고문을 했다는 사실이 85년 이후 집중적으로 폭로되었다. 5․3 항쟁에 대한 수배자를 잡는 과정에서 문귀동이라는 경찰이 한 여성을 ‘성고문’했다. 당시 그들은 “성을 혁명의 도구로 이용” 어쩌고 하면서 발뺌을 하기도 했다. 김근태에 대해 이근안을 비롯한 자들이 전기고문, 고춧가루 고문 등 온갖 야만적인 고문을 했던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숱한 고문이 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세칭 ‘악마들의 고향’의 5층 조사실 – 조사실이라기보다 고문실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 물을 마음대로 먹일 수 있는 목욕탕(욕조실), 대소변을 처리하는 변기, 책상 하나, 의자 둘, 단색의 벽과 천장, 고문을 할 수 있는 침대, 아무리 소리쳐도 밖에 새나가지 않는 방음벽, 높은 자들이 감시할 수 있는 TV 장치…

    나는 무엇 때문에 끌려 왔는지도 모르는 채 우선 30분 가량 5~6명의 건장한 사내들로부터 무차별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얼굴이 붓고, 코피가 쏟아지고, 눈에 멍이 들고, 다리, 무릎, 팔, 가슴 할 것 없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그리고 나서 ….. 두 발목을 밧줄로 묶고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역시 밧줄로 묶어서 두 팔 사이로 넣고 굽힌 다리 사이로 침대봉을 넣어 거꾸로 매달았다. 얼굴에 젖은 수건을 덮었다….수건으로 덮은 얼굴 위로 고춧가루를 탄 주전자 물을 붓기 시작했다.

    눈, 코, 입으로 들어가는 맵고 따갑고 화끈거리는 고통에 혼신의 몸으로 버둥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침대봉이 부러지고 다시 막대기가 끼워졌다. 그들은 숙련공처럼 침착했고 나는 짐승처럼 버둥거리다 지쳐 의식을 잃었다.”

    지금은 한나라당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명박 대통령을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재오라는 사람이 남민전 사건으로 고문받던 기록이다. 오죽했으면 “나는 창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고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라는 제목을 달았을까? 그들은 남자만 그렇게 취급한 게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나는 팬티 하나만 걸친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 순간 내 몸은 두 형사에 들려 물이 가득 찬 욕조 속으로 푹 빠뜨려졌고 어떤 손은 내 머리를 물속으로 꾹 누르는 것이었다. 코와 입으로 물이 들어가니까 호흡을 할 수 없어 답답해졌고 점점 시간이 흘러가자 가슴이 꽉 막혀 오고 터지는 듯, 찢어지는 듯 아팠다.

    처음엔 다리를 바둥거리고 팔은 뒤로 묶였기 때문에 상체를 꿈틀거릴 뿐이었다. 내 딴에 있는 힘을 다하여 몸부림쳤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참 바둥거리다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졌다. 정신이 아득하게 느껴지고 몸의 힘도 빠지고 축 늘어져 버렸다…

    나는 넘쳐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30여 분 동안 바닥에 엎드린 채 목을 놓아 울었다. 무너져버린 내 자신의 비굴함과 공동같이 뚫려 황폐해진 정신과 분함 등의 감정이 한데 어우러져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용공분자가 되었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써 주었다”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내는 것을 허가해 준 미국에 대한 항의로 82년 부산미국문화원을 방화한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었던 김은숙이라는 여성의 증언이다. 힘들지만 하나만 더 보자. 박정희가 죽은 직후 명동 YWCA에서 소위 위장 결혼식을 통해 대통령을 체육관이 아니라 직선으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교수이자 유명한 문학평론가인 김병걸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과거 일본놈들의 한 행위와 거의 똑같다.

    “그 곳에 도착한 시간은 낮 12시였습니다… 그리고는 지하실로 가래서 가보니까 옷을 벗으라고 하더군요. 저 사람들의 공통점은 옷을 벗기는 거예요.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동정심이 생기지만 홀딱 벗으면 개처럼 보이게 되지요.

    개로 보이니까 돌아가면서 ‘빳다’ 방망이로 쓰러질 때까지 때리는 거예요. 너무 맞아서 전 그만 실신했는데 나를 일으켜서 벽에 세워놓고 엄살 피운다며 군인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차례로 발길로 걷어찼는데 어찌나 번개같이, 순식간에 들어오는지 숨이 막혀 또 고꾸라지고 말았어요…

    그리고는 앉혀 놓고 각목을 무릎 사이에 놓고는 꽉꽉 밟습니다… 그 다음엔 연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비틉니다. 손가락이 완전히 부러져 나갈 정도가 되지요. 그 방은 벽이 전체가 하얗습니다. 그 흰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벽에서 말들이 막 달려 나와서 나에게 다가와 나를 탁 치고 지나가는 거예요. 이런 정신착란 증세에 빠지면서도 ‘내가 미치진 말아야 할 텐데, 미치진 말아야지’ 계속 중얼거렸어요.”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고문을 받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곳은 치안본부 옥인동 대공분실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이미 악명을 떨칠대로 떨친 이후였다. 그러나 바로 앞서 투쟁해 온 또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서의 고문을 폭로한 때문에 그처럼 심하게 당하지는 않았다. 이미 앞서 투쟁한 사람들의 폭로와 투쟁 덕분이었다.

    오늘 우리가 싸우는 투쟁으로 인해 다음 세대는 보다 인간적인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경찰의 현재 모습은 80년대 후반하고는 비교가 안된다. 물론 여전히 폭력적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곳곳에서 들려오던 비명소리, 사람키만한 칠성판도 잊을 수 없다. 달랑 책상 하나와 수세식 변기통이 있었던 그 방은 꿈에 나타나기도 했다. “다시는 지하조직을 만들거나 그런 곳에서 활동하지 않겠다”라는 결심도 했다. 그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머리속의 혁명적 실천과 실제 혁명적 실천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목숨을 걸고 살아야겠다는 말만은 정말 말아야겠다”는 시 구절이 그렇게 절절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간사한 것인지에 대해 처절하게 배울 수 있는 곳,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실토해야만 나올 수 있는 곳, 알지 못하더라도 알아야만 하는 곳, 인간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곳,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곳이 바로 거기였다.

    하얀 백지를 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을 쓰라고 할 때, 정치에 대해 토론하자고 할 때 나는 순진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혹했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백지를 가득 메웠을 때, 우리는 그 곳을 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당시 최고의 금서인 ‘주체사상’을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해 알리바이를 맞출 수가 없었다. 해서 이미 수배중인 사람이 주체사상 책을 준 것으로 해서 덤을 씌웠다. 그 자책감은 오래 간다. 그리고 고문이 노리는 것도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채 6개월도 안된 87년 1월 박종철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그는 “13일 밤 자정 경에 강제 연행된 직후부터 14일 오전 11시 20분에 고문 살해되기까지 10여 시간 이상 불법 감금된 상태에서 변사체 두피와 온몸 곳곳의 피멍에서도 나타났듯이 엄청난 폭행과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한 끝에 꽃다운 나이에 참혹하게 생명을 잃었다”라고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살인사건 진상보고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러 졌다”고 뻔뻔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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