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하준 등, 박정희 체제인식과 그 빈틈
    노동통제보다 중요한 것이 자본통제?
    [ 기고④ ] "노동체제 너무 간단하게 생각, 국가자율성 만능화 경향"
        2012년 05월 15일 11: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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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소한 실수 ?

    정치의 세계에서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이른바 ‘진영 논리’를 피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이는 정치의 운명이기에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분법적 진영논리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저쪽이 잘 한 부분, 이쪽이 못한 부분을 모두 덮게 된다. ‘우리 편’이라 해서 항상 편들어 준다면 중요한 진실을 가릴 것이다.

    나는 장하준, 정승일의 한국경제에 대한 발언이 이분법적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파격적인 지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점에서는 그들의 용기를 응원한다.

    한국의 ‘경제시민’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의 발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많다. 특히 ‘재벌과 권위주의 정권에 불편한 진실’을 주변으로 밀어내는 대목들이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앞문으로는 이분법적 진영논리를 깨는 것 같더니, 다시 뒷문으로 새 이분법을 끌어 들인다.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가 낡은 화두’라고 던진 그들의 발언은 학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더욱이 국제적 명성을 가진 학자가 그런 말을 했고 공론 영역에서 영향력도 크기 때문에 깊이 있는 해명을 필요로 한다. 그 화두는 지금 우리 사회 ‘불평등 민주주의의 민주화’와 ‘한국경제 성격논쟁’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나는 지난번 글에서 장하준, 정승일에게 매우 ‘불편한 진실’ 한 가지, 즉 그들이 재벌을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에서 빼기도 하고 넣기도 하는 자가 당착에 대해 꼬집은 바 있다.

    그런데 혹시 이건 사소한 ‘실수’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작은 실수를 침소봉대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그렇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경제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일류학자에게도 실수는 있는 법이니까. 나도, 일류학자는 못되지만, 종종 실수를 한다.

    만약 실수가 아니라면 그들의 생각이 변한 것일까? 사람은 변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 나 또한 끊임없이 변해 왔다. 그렇지만 실수라고 보기에는 너무 큰 실수이고, 변했다고 보기에는 정반대인 두 생각의 타이밍이 너무 가깝지 않은가.

    그러면 무슨 까닭일까? 좀 더 깊이 살펴 본 결과, 나는 그들의 자가당착이 실수도, 변화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그들의 한국자본주의 인식틀 자체에서 뭔가 큰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문제는 재벌을 떼어낸 신자유주의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하준, 정승일이 재벌을 신자유주의 지배세력 안에 넣었다, 뺐다 하며 오락가락하는 데는 냉전반공 개발독재체제로서 박정희 체제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부득이 장하준, 정승일이 박정희 체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 검토해 보려고 한다.

    박정희 체제 인식에서 장하준, 정승일은 중요한 빈 틈을 보이고 있다.

    2. 노동통제보다 더 중요한 게 자본 통제다 ?

    한국의 박정희 개발독재체제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말 중에 ‘강한 국가’(strong state)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국가가 ‘강하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하나는 기업가적 능력, 다시 말해 동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개발능력 면에서 강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적 억압 또는 강압 능력 면에서 강하는 것이다.

    이는 그간의 국내외 연구를 통해 대강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장하준, 정승일도 박정희 체제를 국가 능력, 국가 자율성을 중심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그들이 이처럼 두 의미를 갖고 있는 강한 국가를 보는 방식에는 상당히 특이한 데가 있다.

    장하준은 박정희가 경제발전에 성공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즉 박정희가 시장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자본가를 통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정희는 자본가를 통제했습니다. 남미경제에서 가장 곤란한 문제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열심히 착취해서 경제잉여를 창출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자국에 재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로 빼돌리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박정희는 이런 현상을 막았지요. 박정희는 심지어 자본가들의 소비도 규제했습니다… 박정희는 자신부터 솔선수범해 가며 부유층들이 외제와 사치품들을 못쓰도록 한 겁니다… 박정희가 자본가를 통제한 세 번째 측면은 투자를 규제한 겁니다. 그게 바로 산업정책이고 경제개발계획이죠”(<쾌도난마>, pp. 62~63)

    장하준의 이 말에 이어 정승일은 이렇게 덧붙인다.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면 노동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고 세련화해야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본을 통제하는 것이거든요. 그에 비하면 노동착취는 훨씬 쉬운 거죠. 제3세계 신흥독립국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같은 책, 63-64).

    자본주의란 정의상 자본이 주인이 되어 노동을 착취하는 체제라고 생각한다면, 노동통제보다는 오히려 자본통제가 더 중요하다는 정승일의 말은 하나의 포인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자본주의란 자본이 주도하는 시스템인데 국가가 자본을 통제하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자본주의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도 국가가 자본의 고삐를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박정희 체제는 국가가 자본에 대해 생산적 투자와 수출을 하도록 나름의 발전규율을 행사한 자본주의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자본의 노동억압과 착취를 아주 간단히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정승일의 말은 중대한 인식상의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듯이, 노동착취는 너무 쉬운 거고, 제3세계 신흥독립국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해 버리면, 후발근대화 그리고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서 한국적 길과 스웨덴적 길 간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하는 문제가 증발되기 때문이다.

    장하준, 정승일은 스웨덴식 복지국가로 가자고 말하지만, ‘노동 없는 민주주의’ 길로 간 한국과 ‘노동 있는 민주주의’길로 간 스웨덴의 근본적 차이에 대해 제대로 말한 것을 나는 잘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들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이종태)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에게만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셈이고요. 그러나 그 폭력이 결국 자본을 통제하는 산업정책의 한 수단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한국경제를 고도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왠지 씁쓸하군요.”(p. 82)

    “(장하준) 그래서 박정희 체제의 특징을 첫째 민주주의가 아니었고 둘째 자유주의도 아니었다고 하는 겁니다… 박정희가 자본을 통제해서 자본가들의 사적 재산권을 침해한 것을 보면 사적 소유권과 시장을 절대시하는 자유주의자도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고요.”(p.82)

    박정희 시대 자본의 높은 투자율은 정권의 '노동 통제'와 맞물려 있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자면, 박정희 체제에서는 국가가 노동도 통제했지만 자본도 통제했다, 노동통제보다 더 어려운 건 자본통제다, 자본을 통제함으로써 비로소 박정희 체제는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된다.

    이건 사실이 아닌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다, 그것은 사실이긴 하다. 국가의 기업가적 능력과 산업정책, 금융통제, 자본의 국경이동 통제는 박정희 체제 경제적 성공의 핵심 요인이다. 그런데 나는 그걸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 이런 인식에는 여전히 중대한 문제가 내재해 있다고 본다.

    장하준, 정승일의 박정희 체제 설명에는 국가의 자본통제와 노동통제, ‘자본에 대한 폭력’과 노동에 대한 폭력이 전혀 질적 성질이 다르다는 점이 흐릿하다. 그들은 냉전 반공의 정치경제체제로서 한국의 개발독재가 얼마나 억압적인 ‘노동 규율’에 입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지 않는다.

    박정희 시기 재벌의 높은 투자 열기는 특혜적 정책금융 등 재벌 퍼주기 유인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억압적 ’노동 규율’에도 기인한다. 즉 개발주의 고투자-고성장 기제의 작동은 고강도 노동 규율이 제공한, 안정적인 ‘계급구조적 이윤기회’에도 힘입고 있다.

    그래서 박정희 체제에는 국가의 재벌 지원에 따른 성과규율과 함께 불균형 계급구조 면에서 노동규율, 그리하여 질적으로 성질이 다른 ‘이중규율‘(dual discipline)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바로 그런 억압적 노동 규율, 또는 ’노동기강‘이 재벌주도 고투자를 가능케 한 계급적 조건임과 동시에, 재벌을 견제하고 민주적으로 규율할 수 있는 대항력의 약체를 낳은 계급적, 권력구조적 조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스웨덴적 길과 다른 약한 기업별 노조, 약한 진보정당은 바로 냉전반공 개발독재체제의 고강도 계급적, 정치적 억압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는 48년, 53년 체제로까지 소급된다.

    3. ‘지배연합’ 없는 박정희 체제와 ‘국가만능’론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장하준, 정승일의 박정희 체제 인식에는 국가가 재벌을 통제하고 발전규율을 행사했지만 동시에 재벌의 요구를 수용하고 재벌에 의존해야 했다는 점, 다시 말해 국가와 재벌이 지배블록을 형성했다는 점이 희미하게 처리되어 있다.

    박정희 체제에는 개발독재 권력과 독점적 재벌이 공생을 도모하면서 ‘발전지배연합‘(조영철, “재벌체제와 발전지배연합-민주적 재벌개혁론의 역사적 근거”, <개발독재와 박정희 시대>, 창비사, 2003 수록)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또는 “국가와 재벌이 상호 강화적, 호혜적 관계를 구축한 것과 달리, 국가-노동관계는 노동이 거의 레버리지를 갖지 못한 관계“(Eun Mee Kim, Big Business, Strong State, 1997,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133)였다는 점이 빠져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도로 권력이 집중된 정치경제적 과두지배체제, 국가-재벌 지배동맹이 노동과 국민대중의 참여를 정치적으로 배제하면서 경제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에너지를 동원한 것이 바로 박정희 개발독재 체제의 실체였다고 생각한다.

    독재국가와 독점적 재벌의 지배연합은 이 분야 전문학자들이라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다수 국민들도 적어도 기본 줄거리는 알고 있는 사실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쾌도난마』와 『선택』 어디에도 이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잘 찾아 볼 수 없었다. 영국의 진보경제학자, 코우츠(D. Coates)는 이런 말을 했다

    “국가의 능력은 대체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계급의 성격에 의존하며 그 사회적 계급을 통해서 국가는 통치할 수밖에 없다”(『현대자본주의의 유형』, 문학과 지성사, pp.338)

    물론 산업화 이행기 박정희 개발독재국가의 경우 위로부터 계급 자체를 창조할 정도로 높은 자율성을 가지기도 한다. 그래서 재벌의 국가의존성은 매우 높다. 그러나 거꾸로 국가의 재벌 의존성 또한 매우 높으며 그 구조적 제약 아래 놓인다. 한국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재벌의 국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간 우리는 ‘재벌공화국‘ 이라는 말을 해오지 않았는가.

    만약 우리가 박정희 정권 집권 초기에 있었던 부정축재 처리의 전말, 중엽의 8.3 긴급경제조치(통상 사채 동결조치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70년대 유신체제하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등 몇 대목만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개발독재정권이 단지 재벌을 통제만 한 게 아니라, 얼마나 재벌에 의존하고 재벌의 동의를 구해야 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 정승일의 책에는 이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 8.3 조치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긴 하지만 단지 사유재산제를 무시한 ‘비자유주의’의 사례로 말해지고 있을 뿐이다. (『쾌도난마』, pp.58-59)

    8.3 긴급조치가 경기불황 국면에서 ’세금을 절반으로 줄이라’는 등 재벌 측(전경련)의 공세를 받아들인, 가공할만한 재벌 퍼주기와 비용과 위험의 사회화, 국민화 기획이라는 점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 30년사』, 중앙일보사, p.263 참고)

    장하준, 신장섭의 『주식회사』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이전에 쓴 글에서 이 책이 『쾌도난마』와 『선택』에 비해 훨씬 더 의미 있는 책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적어도 『주식회사』에서는 재벌이 개발국가 후퇴와 신자유주의로의 전환과정에서 신자유주의 세력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음을 놓치지는 않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조차도 여전히 한국자본주의의 역사적 동학에서 계급, 권력 그리고 갈등의 차원을 체계적으로 도입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분석의 기본틀로 삼은 ‘국가-은행-재벌 연계’는 거센크론의 후발성 이론을 따라 ‘제도적 대체물’로 파악되고 있을 뿐이다. 이 제도적 대체론에는 계급과 권력의 차원은 빠져 있다.

    장하준, 신장섭은 어떤 사회경제적, 정치적 제도 형태도 권력 및 계급관계를 응축하고 있거나 그것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둔감하다. 그 때문에 『주식회사』에서 군데군데 보이는 계급, 권력 관계에 대한 언급은 그들의 제도주의적 핵심 분석 틀 속에 통합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서술로 끼워넣어져 있다는 생각이다.

    주의력이 부족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주식회사』를 읽으면서 개발독재 권력과 독점적 재벌의 ’발전지배연합‘에 대한 언급을 한 군데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 글에서 제기한 두 가지 문제, 즉 장하준, 정승일은 자본주의 핵심골격에서 노동체제, 노사관계를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국가자율성을 거의 물신화, 만능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장하준 제도경제학의 전체틀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거기서는 국가와 노동, 국가와 계급 관계 또는 축적체제 관계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이는 작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후일을 기약한다. (계속)

    필자소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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