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연행, 그리고 주체사상
        2010년 10월 28일 10: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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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을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도종환 시 [담쟁이] 중에서)

    이제 조금 쉬어갈까? 읽기가 너무 힘들겠다. 싸우고, 감옥가고, 손가락이 잘리고, 죽고, 맨 그런 얘기만 하니까 무섭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내가 맨날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연애도 하고, 술도 마시고, 잘 못하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도 하고, 경복궁에 가서 떨어지는 낙엽에 뒹굴기도 하고, 비오는 찻집에 앉아 세상의 고민을 모두 가진 척 해 보기도 하고, 그림을 배운다고 미대생을 소개받기도 하고 그렇게 살았다.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반월의 그 침침한 지하방에서 노동자들과 깔깔 거리며 웃고, 월급날이라고 사온 돼지고기에 김치찌개를 해 먹던 그 때가 그립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들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수인선을 따라 걷던 그 친구들은…

       
      ▲ 영화 <박하사탕> 중, 노동자들의 야유회 장면

    철야작업을 마치고 수인선 열차길 바로 옆에 있는 수박밭에 앉아 노동자들과 막걸리를 한잔 하던 아침의 그 평화로움이 그립다. 유독 콩나물밥과 라면을 좋아하던 그 친구도 보고 싶다. 그러나 같이 낙엽을 밟던 친구도, 콩나물밥을 좋아하던 친구도 지금은 만날 수없는 먼 길을 떠나 버렸다.

    내 꿈은 교사였다. 고향 근처에 있는 파도리에 있는 파도초등학교의 선생을 하는 게 꿈이어서 교직과목을 듣기도 했다. 아마도 싸움 중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 구속되고 다치고, 몸에 익숙하지 않은 공장 일에 지치고 힘들어 했던 나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소박한 자기 꿈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들 그게 좋아서 맨날 싸움만 하겠니? 싸움이라는 게 이상해서 상대방을 닮아 간다. 거칠어지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기가 힘들다. 그걸 알면서 조절해 보려고 하지만 맘처럼 안 되는 것에 다시 좌절하기도 한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지금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시대를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어떻게 견디고, 살아왔는가에 대한 것뿐이다. 아주 평범한 인간이 분노하고, 때로는 그 평범함에 화가 나기도 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싸워야만 했던 그런 시대에 대한 얘기다.

    노래가사처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살려고 애를 써 온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찬송가 387장 가사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싸워 온 사람들에 대한 존경으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런 얘기로 알고 다소 ‘무섭더라도’ 너희들의 엄마, 아빠의 ‘평범한 삶’으로 보고 읽어주길 바란다. 역사는 결코 ‘결과’가 아니다.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나는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남기고 싶을 뿐이다.

    엄마 아빠의 평범한 이야기일 뿐

    공장 얘기를 하나만 할까? 무엇보다 힘든 것은 그들의 ‘문화’였다. 그들과 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당구 칠 줄 아냐?”

    사실 당구는 퇴폐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피하고 있어서 배울 틈이 없었다.

    “그럼. 칠 줄 알지”

    “얼마?”

    “100”

    사실 그 때 나는 간신히 큐대 잡는 법만 아는 정도였다. 흔히 30이라고 초보다. 그러면 그들과 당구장에 가야 한다. 당구실력이 들통날까 두려워 그 전에 꼭 술을 마시고 가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결국 당구장에 가서는 술 핑계를 대는 것으로 넘어가곤 했다.

    고스톱도 공장 다니면서 배웠다. 당시 우리는 전두환과 싸우면서 일체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자제했다. 심지어 여학생들이 치마를 입고 다니거나 귀걸이를 하면 욕하기도 했다. 그만큼 각박했고, 여유가 없었고, 저들과 싸우면서 저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치마를 입든, 귀걸이를 하든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노동자들은 술도 엄청 마셨다. 일의 힘듦을 술로 해결하려는 듯 마셔댔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도 혹시라도 신분이 발각될까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공장, 거기에는 또 다른 삶이 있었다.

    다시 얘기를 이어가기로 하자. 5월 집회 후에 경찰의 포위망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반월에서 조금 떨어진 안양에 방을 구했다. 그 때쯤이면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었다.

    조직을 만드는 것은 중요한 자료가 경찰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차질이 생겼다. 추적이 예상되는 사람들을 공장에서 빼내 멀리 부산으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안양의 박달동에 세 명이 함께 방을 얻었다. 재수생으로 위장했다. 방에는 책들이 많았다.

    우리는 거기서 필요한 문건도 쓰고, 조직을 가동하고 있었다. 만약 경찰에 검거되면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준비 중인 것으로 알리바이도 미리 만들어 두었다.

    알리바이를 미리 짜고

    당시 우리는 매사에 조심에 조심을 기울였다. 약속시간을 정확하게 지킴은 물론 약속시간의 앞뒤 5분이 넘으면 무조선 약속장소에서 나왔다. 이름도 가명을 썼다. 지금도 그 때 같이 일하던 사람들의 본명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항상 긴장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수배가 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긴장은 쉽게 풀어지곤 했다. 때로는 약속시간을 약간 넘어서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약속시간을 넘겼는데도 만나기로 한 친구가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그 자리를 피했다. 상황을 더 파악했어야 했다. 그러나 마침 그 날은 유난히 피곤했다. 빨리 집으로 가서 쉬고 싶었다. 약속이 어긋났으면 더 긴장해야 하는데 약속을 잘못 안 것으로 생각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목이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설마하고 집에 들어갔다. 방문을 여는 순간 친구 2명이 수갑을 차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낯모르는 얼굴이 2명이나 더 있었다. 그들은 내가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문을 걷어차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골목에 수많은 사복형사들이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그들은 집 주인의 신고로 잠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사람 셋이서 들락달락하는 것이 집주인에게 수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 사람은 ‘불순분자’들을 신고하여 얼마나 받았을까?

    나는 잡혀서 방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들은 우리를 묶어 둔 채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없었다. 잡힌 채로 우리는 알리바이를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를 손짓발짓으로 대강 맞췄다.

    문제는 방안에 너무나 많은 정보가 있는 것이었다. 몰래몰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건들만 챙겼다. 더 이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들어오기 전에 또 다른 한 사람이 방문했다가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보고 골목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뛰어 가다가 잡히는 것을 본 그가 더 이상 우리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당시의 운동에서 긴장은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절대로 피곤하게 일하면 안 된다” 라는 교훈을 그때 배웠다. 무슨 일을 하든지 쉴 때 쉬고, 항상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 그래야 냉철하게 판단을 내리고 상황에 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 운동 새내기에 불과했다.

    “투사 한 사람이라도 적에게 포로가 됨은 우리 전력의 약화이며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평소나 피신 중에 자신이 반독재투쟁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항상 적의 공격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다. 이는 개인보위의 허점이며, 조직보위의 허점이다.” 라고 앞에서 말한 ‘남민전’은 교훈을 주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배웠다. 그러나 머리와 몸이 따로 움직인 꼴이었다. 조직을 책임지는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사복경찰에 잡힌 채 구로경찰서로 향했다. 다행이었다. 반월과 가까운 곳이 아니라는 점에 우리는 안도했다. 별거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중요한 문건만 치우면 되었다. 화장실에 가서 몇 장을 씹어 먹기도 하고, 잘게 찢어서 변기에 버리기도 했다.

    성경 같았던 주체사상 책

       
      ▲ 주체사상 선전 포스터

    이틀인가 조사를 받고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책 중에 북한에서 발행한 김일성 주석이 쓴 「주체사상」이라는 책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북한에서 발행한 책의 복사본이었다.

    당연히 소재에 대한 추궁이 시작되었다. “어디서 났고, 누가 주었느냐?”가 핵심이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정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몇 장을 들춰보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인간 중심의 철학과 세계관”을 말하고 있었지만 교회를 오래 다닌 나로서는 당연히 인간중심의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럼 내가 동물 중심, 개 중심으로 운동을 하고 있단 말야?” 라고 친구에게 물었던 기억도 있다. 순진한 얘기였다. 그러나 다른 두 친구는 정말 열심히 읽었다.

    그 때가 바로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소위 NL과 PD의 논쟁이 막 본격화하던 때였다. 김영환이라는 사람이 쓴 「강철서신」 등으로 기억되는 미국에 대한 폭로와 북한 중심의 혁명사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그는 북한을 추종하고, 주체사상을 신봉했다고 한다. 북한에도 넘어가서 김일성 주석도 만났단다. 당시 주체사상의 ‘대부’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현재의 김영환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넘어가자. 우연히 구한 그의 재판기록을 보면 “저는 우리 민중의 자유와 복리, 민주주의와 민족해방, 진보와 평화, 한마디로 혁명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구치소 안에서도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조국의 앞날, 혁명의 앞길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혁명을 먼저 혁명을 생각했고 식사할 때도 혁명에 대해서 생각했고, 운동을 할 때도, 책을 볼 때도 혁명에 대해서 생각했고,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혁명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라는 최후진술이 나온다.

    그러던 그는 99년 “북한을 타도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라고 선언하고, 혁명은커녕 과거 운동권을 비난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뉴라이트의 최전선에 서 있다. 재밌는 사람이지? 하긴 역사를 보면 그런 사람은 숱하게 나온다. 뉴라이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하자.

    어쨌든 나로서는 반월의 조직에 대한 조사가 없어졌다는 점에 안도했지만 엉뚱한 데서 일이 커지고 있었다. 다음날인가 치안본부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구로경찰서에 왔다. ‘치안본부’라는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85년 9월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지독한 고문을 당한 민청련 의장이었던 김근태의 글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치를 떨었다. 87년 2월 박종철은 그곳에서 고문을 당하다 결국 죽었다. 우리는 차에 태워지자마자 고개를 의자 밑으로 숙이고 잠바를 뒤집어 쓴 채 치안본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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