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석가는 같다”
    2010년 10월 27일 02: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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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어온 사건

   
  ▲ ‘봉은사 땅밟기’의 일부 장면

‘봉은사 땅밟기’라는 제목의 6분짜리 동영상에는 20~30대로 보이는 남녀들이 대웅전을 비롯하여 봉은사 경내 곳곳에서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들어 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라는 성경 구절로 시작하는 동영상은 불상, 사천왕상, 돌계단, 탱화 등을 보여주며 이를 ‘사람들이 만든 우상들 … 헛되고 헛된 것들’이라고 지적한다.

‘찬양인도자학교 주님의향기 6조’라고 소속을 밝힌 이들은 동영상에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는 자막과 함께 봉은사 대웅전, 불탑, 대웅전 입구 계단 등에서 두 손을 하늘로 뻗은 채 기도를 하고 요사체 기둥이나 불경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사진을 담았다. 동영상은 ‘주님!! 우상은 무너지고 주의 나라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으로 끝이 난다.

최근 공개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한 동영상에 관한 <한겨레신문>의 기사 일부이다. 동영상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놓았다. <한겨레신문>은 계속해서 ‘봉은사 땅밟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소감도 소개하여 놓았다.

이들은 이어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밝히며 소감까지 찍어 올렸다. 동영상 첫 부분에 등장하는 한 여성은 “이 땅이 하나님의 땅이라는 것을 선포했다”며 “분명히 이 땅은 (하나님에 의해)파괴될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회복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한 남성은 “쓸데없는 우상이 많아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고 다른 여성은 “주님을 믿어야 할 자리에 너무나 크고 웅장하게 절이 들어와 있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고 밝히기도 했다.

내용은 이렇다. ‘찬양인도자학교’의 일부 젊은 교인들이 봉은사에 들어가 ‘우상숭배’를 비판하고 ‘봉은사의 땅이 하나님의 땅이 되도록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동영상이 파문을 일으키자 담당 목사가 사과의 뜻을 밝히고, 무리를 일으켰던 신자들과 봉은사를 방문하여 공식 사과하겠다고 밝혔다. 동영상 파문은 곧 진정될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측에서는 대부분 이번 사건에 대해 일부 신자들의 치기어린 행동이라 하고 있다. 맞는 얘기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놓고 종교분쟁으로 비화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불상의 목을 절단하여 훼손한 사건도 있었고, 얼마 전에는 포교 중인 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모욕을 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유포되어 소란이 있었던 적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회성’ 자성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을 놓고 성경에 비추어 올바른 행동이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기독교 내에서는 그런 노력 자체가 중요한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매번 일이 있을 때마다 성경에 비추어 판단한다고만 하면 하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게 되고, 유사 사건은 또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 행동이 있은 후에 사후적으로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있다, 다른 종교의 믿음도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도 별다른 약발이 없음은 그 동안의 과정이 잘 보여준다. 아무리 이런 얘기가 강조되어도 다른 종교를 모욕하는 일은 계속 되어왔기 때문이다.

종교의 동질성

이제 문제를 근원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종교는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근원적인 성찰을 해야 한다. 10여 년 전 미국의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충돌의 근원은 종교에 있다는 것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테러 등은 헌팅턴의 주장을 입증해주는 근거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분명 종교적 분쟁과 충돌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따라서 종교를 기반으로 세워졌던 문명권 간의 충돌이고, 헌팅턴의 주장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일면적이다. 종교 간 이질성에만 주목하는 시각일 뿐이다. 여러 종교 사이에 모시는 신이 다르고 교리가 다르다. 그만큼 서로가 충돌할 가능성은 다분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질성만을 주목한다면 분쟁과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일 뿐, 그것들을 막고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헌팅턴은 학자이니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치중하였다고 치부하고 말 일은 아니다. 원인을 밝혔으면 그에 대한 해법도 내놓아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학자이다. 과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넘어선 통찰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종교들은 이질성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 더 크게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와 석가모니를 비교해보자. 예수는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낮은 데로 왔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에 따른 생활만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었다. 예수는 이런 종교를 혁신하고자 하였다.

성전에서 장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쫒고 성전이 파괴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권위주의의 상징이 된 성전이 파괴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엄격한 율법을 거부하고, 사람이 셋만 모이면 거기에 교회가 있다고 하였다. 백성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런 예수의 행동의 이면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났기에 동등하고 귀중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석가모니를 보자. 그는 인도 북부의 한 작은 국가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왕위 계승자였다. 당시 인도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백성들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하루하루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성 밖에 사는 백성들의 삶을 목격하였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 번민을 하게 되었다.

오랜 번민 끝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성을 빠져나와 고행의 길로 들어섰다. 낮은 데로 온 것은 아니지만 낮은 데로 내려왔다. 6년간의 고행 끝에 그는 득도를 하였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설파하며 백성들을 깨우치고자 하였다. 그것은 천지만물의 근원은 하나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은 동등하고 귀중하다는 것이었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출생이 다르고 살아간 행적이 달랐지만, 그들은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오늘날과 달리 왕래가 자유롭지 못해 각 지역에서 서로 다른 종교가 생겨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주장하는 내용은 동일하였다. 그것은 보편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종교들을 기반으로 하여 중세 시대에 이르러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에 오늘날에 이르러 세계적인 종교들이 되었다.

지역별로 수많은 종교가 생겨났지만, 자신들의 종족만을 위하였던 종교는 사라졌다. 오늘날까지 어어져 온 종교는 한 종족 혹은 한 민족만이 위대하다는 것을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라, 인류적인 보편성을 가진 것들이다. 여기에 여러 종교들 사이의 동질성이 있다.

종교의 역할 바꿔야

여러 종교들은 사용하는 용어, 종교 행사의 방법 등의 차이가 있음에도 추구하는 이상은 같다. 기독교의 하느님의 나라와 불교의 극락세계가 다르다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더욱이 하느님의 나라든 극락세계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로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고 평등하기에 전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 공생하는 세상을 바라고 있다. 그것은 종교의 이상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바라는 이상이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데 종교가, 그리고 종교인이 앞장 서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의 역할이다. 믿음의 대상과 방법은 다를지라도 믿음의 내용은 같다. 대상과 방법을 중요시 할 것이냐, 내용을 중요시 할 것이냐는 논의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용은 목적이고 대상과 방법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수단을 놓고 경쟁하는 것은 예수도 석가모니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목적이 같기에 서로 화합하고, 목적이 같기에 서로 힘을 합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구원’해야 할 백성들은, ‘평화로운 세계 공동체’로 인도해야 할 백성들은 오늘도 하루하루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종교는, 종교인은 분발해야 한다. ‘신자 모시기’ 경쟁이 아니라, 이상적인 사회, 이상적인 국가,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발하고 분발해야 한다.

‘봉은사 땅밟기’ 사건은 일부 종교인의 치기어린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냥 그런 식으로 넘어가고 말 일은 아니다. 각성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각성이야말로 종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종교가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깊은 성찰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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