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로 쓴 ‘삼성을 생각한다’
        2010년 10월 26일 04: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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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출간소식을 듣고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첫째는 지난 여름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받은 전화 한 통이었다.

       
      ▲조정래 작가 

    “감사합니다. 민주노총입니다.”
    “민주노총이죠? 저는 소설 쓰는 조정래라고 합니다. 지금 삼성에 관한 소설을 쓰고있는데 회사에서 노동조합을 상대로 소송을 건 사례를 찾고 싶어서 전화드렸습니다.” 

    노(老)작가는 그렇게 ‘취재’를 하면서 이 소설을 썼다. 삼성에 관한 소설. 맞다. 신작 『허수아비춤』은 삼성, 그리고 삼성이 대표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추악함에 관한 소설이다. 두 번째는 몇해 전 조정래 씨가 ‘태백산맥 문학관’ 개관식에서 한 말이었다. 배우 문근영의 기부에 대해 어떤 극우인사가 터무니없는 공격을 할 때였다.

    “스무살 소녀(문근영)가 6년간 남몰래 행한 선행에 대해 외할아버지가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시대착오와 야만이 어디 있는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세월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연좌제도 서러운데, 그걸 새롭게 만들어서 어쩌자는 건가.

    이 슬픈 시대에 작가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군부독재가 물러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비정규직 문제며 농촌 총각, 이주 노동자, 결혼 이주민 같은 다문화 사회에 대한 대응 등 문제가 산적한데 왜 안 쓰는가? 써야 할 게 너무나도 많다. 특히 젊은 작가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눈을 크게 뜨기 바란다.”

    세상의 문제보다는 자기만의 방에 쳐박혀 ‘방에 관한 소설’을 쓰는 젊은 작가들, 기껏해야 가족얘기밖에 쓰지 못하는 젊은 작가들이 얼마나 한심했으면 자신이 축하받는 자리에서 이런 쓴소리를 했을까. 책 앞부분에 실린 작가의 말은 천금같이 무겁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하는 문학은 이제 이 물음(경제민주화)과 응답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모습이 추하든 아름답든 그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자화상을 똑바로 보길 게을리할수록, 회피할수록 우리의 비극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 나오는 재벌사 일광그룹과 태봉그룹이 벌이는 작태는 우리가 신문에서 익히 봐왔던 것들이다. 이를테면 일광그룹 총수는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 아들에게 80억을 증여한다. 세금 20억을 내고 나머지 60억으로 자기네 계열사 중에서 아직 상장되지 않은 회사 넷을 골라 주식을 헐값에 사게 한다.

    그런 다음 그 회사들을 상장시켜 주식을 비싸게 팔아치운다. 그 돈이 무려 950억. 게다가 BW(신주인수권부 사채)와 CB(전환사채)를 시가보다 훨씬 싸게 발행해 아들에게 넘겨준다. 그렇게 해서 순환출자의 핵심이 되는 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함으로써 아들은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게 된다.

    이런 불법 경영권 승계에 대해 법원은 계열사 사장 셋만 집행유예로 벌을 주는 ‘척’했다. 판결문에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이 컸고,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국민경제에 더 이상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표현이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일광이나 태봉이 이런 일을 스스럼없이 벌일 수 있었던 것은 1조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만들어 정치인, 법조인, 정부 관료, 언론인, 학자는 물론 검찰, 국세청, 공정위, 금융감독기관 등 사회 각계각층에 돈을 뿌려댔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동안 신문과 방송에선 태광과 씨앤그룹의 비자금, 로비, 횡령 이야기가 거듭되고 있다. 이런 소설이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책 표지 

    책을 덮으면서 아쉬움이 남았다. 거대권력화된 재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짓들, 그리고 그들과 맞서 싸우는 양심적인 시민단체와 지식인. 하지만 거기 ‘노동’은 없었다. 어용인지 민주파인지는 모르지만 저들에게 매수 당하는 노조 간부 정도가 나올 뿐이다.

    옳은 것보다 이로운 것을 좇고, 노동자로서의 연대의식보다는 종업원 의식에 사로잡혀 있을수록 우리 시대 노동의 힘은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다. 실천은 그렇게 하면서 말로만 ‘노동’을 얘기하는 것은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핑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노작가에게 아쉬워할 것도, 젊은 작가들에게 실망할 것도 없다. 노동소설이 자취를 감춘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다만 노동과 문학의 새로운 만남이 언젠가는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는 놓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 선생이 『행복한 책읽기』에 썼다. ‘각 세대는 서로의 상처 속에 기생하면서 커나간다. 자기들이 기생충이며, 숙주니까.’

    * 이 글은 금속노동자(www.ilabor.org)에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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