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 종일 최루탄 맞으며 화염병을 던졌다"
        2010년 10월 26일 03: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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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여 무등산이여 /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 꿈이여 십자가여 /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 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 /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김준태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중에서 

    전두환이 간첩사건도 만들고, 각종 사건을 만들어 강제로 군대로 보내기도 했지만 투쟁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1985년에 2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통령을 자기들끼리 체육관에서 뽑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 야당인 ‘신한민주당’이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살인마가 지은 당 이름 치고 웃기지? 그게 지금의 한나라당으로 이어진다)을 제치고 제일 많은 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전두환의 정치적 패배

    전두환은 불과 5년만에 정치적으로 패배한 셈이다. 노동자 조직, 학생조직을 비롯하여 촛불집회 때의 ‘광우병 대책회의’와 비슷하게 전국적으로 투쟁을 이끌 조직이 생겨나기도 했다. 

    당시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지금은 노동조합을 만들려면 2명 이상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 때는 30명 이상이었다. 노동조합 신고를 하면 30명 이상의 명단이 회사 손에 들어가고, 모두가 해고되기도 했다. 또 ‘제3자 개입금지’라는 악법도 있었다.

    그 회사 사람이 아닌 다른 회사 노동자들이 어렵게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면 바로 구속되었다. 심지어 파업투쟁 중인 현장에 라면 1상자를 사들고 가서 지지를 표시한 사람이 이 악법에 의해 징역 1년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내가 반월에서 공장에 다니기 시작하던 그해 5월 대우자동차에서 처음으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뭔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모진 탄압이 있었지만 그만큼 치밀한 조직화 작업도 있었다.

    그 결과 이 즈음해서 신규노조가 약 200개 정도 늘어났다는 통계가 있다. 노동운동이 새롭게 활성화되고 있었다. 새로 설립된 노조들은 곳곳에서 노동자의 열정적인 투쟁으로 사업장 내 임금인상 투쟁에서 성과를 거두는 한편 지역별 연대투쟁과 교육활동 등을 활발히 전개했다. 전두환은 노동운동에 대한 보다 강력한 통제와 탄압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투쟁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셈이다. 

    대우자동차 투쟁은 노동자들과 함께 학생출신 노동자들이 파업을 주도했다. 그리고 투쟁 10일만에 김우중 회장과 요구조건을 거의 관철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히 고개를 들고 쳐다볼 수조차 없었던 재벌총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교섭장을 걸어 나오는 노동자 대표의 모습이 TV와 신문에 나왔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더 이상 노동자가 ‘공돌이 공순이’가 아니라 인간임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1950년 이후 최초 동맹파업

       
      ▲구로연대투쟁 사진 

    군사독재의 탄압을 뚫고 노동자들의 자각을 보여 준 대우자동차 파업 투쟁이 끝나고 채 두 달도 안 된 6월 이번에는 구로공단에서 연대파업이 일어난다.

    1985년 6월 24일 월요일 아침, 대우어패럴 노동자 300여 명이 회사의 저지를 뚫고 2층 작업장을 점거해 파업에 들어가고 오후 2시를 기해 효성물산 노동자 400여 명, 가리봉전자 노동자 520명, 선일섬유 노동자 70여 명이 파업과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악법개정, 노동부장관 퇴진, 노동3권 보장” 등의 현수막과 대자보가 작업장마다 걸렸다. 바로 이틀 전에 대우 어패럴 노조의 위원장 등 3인이 연행 구속된 것이 이유였다. 1950년대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동맹파업 다음 날에는 세진전자, 롬코리아, 남성전기노조가 파업 지원을 위한 야간 또는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이후 지지농성과 거리에서 가두투쟁이 일어나고, 멀리 창원공단의 통일중공업에서도 투쟁을 지지하는 동조파업이 일어났다.

    전두환은 신속하게 경찰을 투입하고 구속과 해고로 탄압했다. 결국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5개 사업장의 파업과 5개 사업장의 지원투쟁으로 진행되었던 구로동맹파업은 수많은 구속자와 3,000여명의 해고로 끝났다. 그렇게 처절한 패배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역사를 보면 패배한 투쟁들이 많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새로운 열매를 맺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3,000명이 넘게 해고되었지만 투쟁을 통해 단결의 힘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새로운 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과 2년 뒤인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거름이 되었다. 역사를 짧게 보면 안 되는 이유다. 

    홍영표, 김문수, 심상정

    당시 대우자동차 파업투쟁을 이끈 사람 중의 한 명인 홍영표라는 사람은 지금 민주당 국회의원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국무총리실에서 일했었다. 1994년인가에는 나와 함께 민주노총을 만들기 위해 같이 일했었다. 노동운동가였던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공기업의 지방 이전을 두고 노동자와 정부가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실무협의를 둘이서 한 셈인데 지방으로 이전할 때 비정규직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자 “비정규직의 ‘비’자만 꺼내도 협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노정합의 문구가 좋았을 리 없다. 세월은 그런 것이다. 

    현재 구로동맹파업의 주역들은 아쉽게도 거의 대부분 변절과 배신의 길을 걸었다. 투쟁의 시발점인 대우어패럴 노조 위원장이었던 김준용은 현재 뉴라이트 계열에 몸담고 있다. 전태일 정신을 계승한 청계피복노조 위원장을 거친 김영대는 민주노총 부위원장, 사무총장 등의 역할을 하였지만 이후에는 노무현 캠프에 참여하여 노동연대의 중심인물이 되고 그 논공행상으로 전국구 국회의원을 3개월 정도 했다.

    파업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이 시기 일정한 역할을 했던 70년대 민주노조의 대표격인 원풍모방 출신의 방용석은 그후 국회의원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 시절 노동부장관을 했다. 장관으로 있을때 매우 반노동자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2005년에는 민영화를 반대한 발전, 가스, 철도 파업을 파괴하기도 했다. 

    김문수는 민자당의 김영삼의 품에 안겨 두 차례 정도의 국회의원을 하고 나서 지금은 한나라당 당원으로 경기도 지사가 되었다. 그의 당시의 활동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그의 반노동자적인 행태는 정말 그 김문수가 이 김문수일까 할 정도다. 심상정은 이후 전노협의 조직국장과 금속노조 사무처장을 거쳐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대통령 후보, 그리고 진보신당 대표 등의 역할을 했다. 그 중 유일하게 ‘진보’의 영역에 남아 있는 사람인 셈이다. 

    리어카로 화염병 실어나르던 시절

    다시 5월이 되었다. “5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라는 5월의 노래처럼 광주가 다시 살아오는 계절이다. 노동자 조직, 학생 조직을 비롯하여 촛불집회 때의 ‘광우병 대책회의’와 비슷하게 전국적으로 투쟁을 이끌 조직이 생겨나기도 했다.

    바로 직전인 4월 말에는 학생 2명이 전방부대 입소 거부 투쟁 과정에서 분신하는 사태도 있었다. 그런 86년 5월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야당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직선제를 위한 천만명 개헌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부산, 광주에 이어 인천에서 5월 3일 인천에서 개헌추진위 결성대회를 열기로 되어 있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5.3 인천투쟁 

    반월에서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우리는 투쟁을 준비했다. 당연한 얘기였다. 모든 조직은 목표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낚시를 좋아하면 낚시 모임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전두환을 몰아내기 위해, 더 나가 한국사회를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에 싸움을 준비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대회에 조직적으로 참가하기로 했다. 인천에서 열린 행사였기 때문에 아주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른다. (그에 대해서는 황광우의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를 읽어보면 인천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아주 자세히 잘 나온다) 

    지하실 골방에서 가지고 갈 현수막을 썼다. 유인물도 만들었다. 마른 현수막은 몸에다 칭칭 동여맸다. 경찰들은 분명히 검문할 것이고 우리는 이에 대비한 것이다. 유인물도 몸속에 잘 감춘 채 우리는 인천 맥아더 동상 앞에 모여 시민들이 모이는 주안 시민회관 앞으로 갔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했고, 이에 맞서 무수히 많은 화염병이 나왔다. 아예 리어카로 화염병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인천지역에 있는 활동가들이 준비했었다는 얘기겠지. 이미 전두환과 협상을 진행 중이던 신민당의 정치 행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낮부터 시작한 싸움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하루 종일 화염병을 던지다

    하루 종일을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낯모르는 인천바닥을 헤매다 돌아왔다. 그걸 역사에서는 5․3 인천항쟁으로 부른다. 이 투쟁으로 인해 129명이 구속되었고 60여명이 수배되었다. 5․3 인천항쟁을 계기로 전두환은 다시 강경 자세로 돌아갔다.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서노련 사건, 부천경찰서에서의 여학생에 대한 성고문 사건 등 고문이 비일비재했고, 용공 조작이 만연했다. 급기야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해 수공으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고 한다며 대대적인 반공캠페인까지 벌어졌다. 

    ‘최루탄(催淚彈)’이라고 들어 보았을까? 말 그대로 눈물이 마구 쏟아지게 하는 것이다. 단순히 눈만 따가운 게 아니라 토할 것 같고, 숨쉬기도 힘들다. 한마디로 사람이 무기력해지지. 그때를 틈타 백골단이 잡아간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총처럼 쏜다.

    가까운 거리는 ‘사과탄’이라고 해서 사과만한 것을 던지는 것도 있었다. 매울 뿐만 아니라 파편에 많이 다치기도 했다. 또 있었다. 다연발탄이라고 한꺼번에 여러 개가 터지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랄탄’이라고 불렀다. 일단 쏘면 10개도 넘는 최루탄이 여기저기를 마구 휘저으며 터지면서 날아다녔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것은 주로 차에서 발사했다. 

    최루탄은 원래 일정한 각도를 두고 하늘을 향해 쏘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에게 직접 맞아 심하게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1960년 3월 이승만 정권 시절 경찰은 마산에서 김주열이라는 학생에게 직접 대고 쏜 후 죽은 시체를 마산 앞바다에 버렸다. 그 시체가 떠올라 4.19 항쟁이 촉발되었다.

    4.19와 6월 항쟁

    1987년 6월 항쟁을 불러 온 이한열이라는 연세대학교 학생도 머리에 직접 맞아 죽었다. 무서운 얘기다. 촛불집회에서 경찰이 물대포를 쏘는 것을 보았지? 불과 20년 전, 아니 10년 전에 경찰들이 물이 아니라 화약약품을 시위하는 군중에게 쏘았다는 얘기다.

    그걸 맞으면 눈물이 마구 나고, 쓰라리고, 토하고, 주저앉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에 맞서 사람들은 돌을 던지며 싸워야 했다. 더 나가 화염병을 만들기도 했다. 언제까지나 당할 수는 없었으니까. 화염병은 몰로토프칵테일(Molotov cocktail)이라고도 하는 데 시너와 휘발유를 섞는 비율이 중요했다. 

       
      ▲최루탄을 쏘는 경찰 

    이제 너무 먼 옛날이야기처럼 생각된다. 우리는 그 날 인천에서 최루탄 바다를 헤맸다. 나는 “역사는 꿈을 꾸는 인간들이 온 몸으로 써가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5․3 인천항쟁을 쓰는 이유는 누가 당시 무엇을 했다는 것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내가 겪은 많은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그런 모진 탄압을 받았지만 이런 투쟁으로 인해 그로부터 1년 남짓 후에 6월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역사적 경험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역사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선열들은 36년 동안 그 모진 일제의 탄압에 맞서 투쟁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타올랐던 촛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타오르고 말 것이라는 믿음을 나는 가지고 있다. 온 몸으로 역사를 써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생겨날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 전두환이 무식했던 것처럼 우리도 무식했다고. 우리는 실제로 산에 올라가서 화염병 던지는 것을 연습하고, 호루라기를 불면 순식간에 대열을 갖추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내가 2열의 3번이라면 신호 후에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앞뒤를 맞추어 바로 대열을 갖추는 것이다.

    집회의 자유가 차단되고, 경찰 백골단이 순식간에 연행하는 상황에 맞선 대응방법이었다. 그런 훈련을 하고, 5․3인천 항쟁을 마친 후에 우리는 반월에서 5월 광주 민중학살에 대한 규탄집회를 하기로 했다. 마침 조직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가지고 있던 사람 하나가 부주의로 연행되어 경찰 쪽에서도 눈치를 채고 반월공단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던 시점이기도 하다. 

    정확한 날자는 기억이 안 난다. 86년 5월 하순 우리는 반월공단 입구인 원곡파출소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기껏해야 우리는 100명도 안되었다. 그러나 훈련된 사람들이었다. 순식간에 파출소는 불에 탔고, 행진을 시작하여 당시 나성플라자가 있었던 아파트 지역까지 진출했다. 인원은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이 오는 길목에는 이미 사람이 나가 있었다. 핸드폰이 없었던 당시에는 공중전화를 이용, 다방으로 전화하면 이를 받아 다시 투쟁대오에게 알려주는 방식을 썼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반월로 향한 때 쯤 우리는 집회를 마무리했다. 그 큰 규모의 시위를 했지만 연행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물론 우연히 집회에 참가한 것으로 미리 알리바이를 세워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를 시작으로 경찰은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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