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신당, '미칠 것 없는 존재감'
        2010년 10월 26일 08: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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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직, 일상

    더위가 가시니 동창들 결혼철이 다시 시작됐다. 주로 전문직이나 대기업에 다니는 녀석들이 먼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편이지만, 잔치에 모여드는 친구들이 다들 그렇게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을 리 없다.

    화제에 따라 테이블이 나뉘다 보면 결국 계급별로 테이블을 차지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내 옆에는 보습학원강사, 전문과외교사, 새끼방송작가, 웹디자이너, 컴퓨터프로그래머 등 고등학교 때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유연하고 불안정한’ 직군에 속한 친구들이 앉는다.

    연봉 3천만 원 이상을 버는 몇 명을 제외하면, 모인 녀석들의 대부분은 한 달에 100~200만 원을 버는 불안정노동에 종사한다. 그래서인지 대화는 슈퍼스타케이와 프로야구 소식으로 시작해서 소식이 끊긴 친구와 여자동창들의 임신-출산 소식을 우회해서 어느 틈엔가 물가와 주가, 출산휴가와 의료비 부담, 늦어지는 월급 입금, 실업급여, 보증금, 월세 같은 단어들로 귀결된다.

    노동자로 나를 설명하기 싫다!

       
      ▲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의 유세 (사진=노회찬 블로그)

    대부분은 정치 성토로 이어지는 이런 이야기를 잘 듣다 보면 항상 발견하는 독특한 대목이 있다. 그야말로 유연노동, 신자유주의, 청년실업의 피해자인 이들이 다들 맹렬히 정규직을 소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비정규직 철폐 투쟁”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이들은 오히려 자발적 비정규직이라는 말로 자신의 직업을 설명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당장에 노동자 의식이 없다고 분노할 사람들의 명단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한편으론 동시에 정규직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목표라는 주장도 떠오른다.

    실업과 노동 상태를 반복하고, 그 사이의 불안정과 고독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면서도 자신을 자발적 비정규직이라고 표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살면서 한 번도 안정되고 행복한 노동자의 삶이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복잡해진 머리를 빠르게 수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순간 좌파였던 친구가 고시를 보겠다며 내던지고 간 “가난하게 행복할 자신 없어”라는 말도 떠오른다. 우리에게 소박한 노동자로 다른 세계를 만들면서 사는 일상은 고난의 행군 외에 다른 이미지를 그리지 않는다. 반면, 마츠모토 하지메를 보면서, 연일 보도되는 프랑스의 시위를 보면서, 우리는 고난의 행군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대체 뭐가 다른 거지?

    물론 심각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필요에 의해 사정은 달라지고 의식은 형성된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또 만약 운동이 항상 사후적이라면 매번 두더지처럼 고개를 빼꼼거리는 “더 당해봐야 된다”는 논리를 막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걸 두고 그런 건 다 의식이나 문화의 결핍 때문이라는 분석은 하나마나한 분석이다. 진보정당의 의석수처럼 노동자 의식 부재는 결핍이 아니라 상수다. 의식이나 문화의 결핍이 어쩐지 분개한 말투로 언급한다고 해결될 일이었다면, 이 나라에서 혁명은 백만 번도 더 일어나고 물질문명도 수천 번은 뒤집어졌을 거다.

    내 동창들에게 굉장히 유연화된 노동시장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불안정한 직업과 복지 부재는 그것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컴퓨터의 팬 소음 같고, 분식집의 달큰한 조미료 향 같은 것이다. 소수의 고임금 정규직을 제외하면, 노동은 자기 삶을 재확인하는 장소가 아니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일 뿐이다.

    제대로 된 노동자로 살기 위해 노동계급의 편에 서는 대신, 노동으로부터 최대한 이탈하기 위해 노동자면서 노동자가 아닌 비정규직으로 자기를 대변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알 생각도 없이 “당해보면 너희도 알게 될 거야”라거나 당위적인 중요성만을 강변하는 건 “니들이 별 수 있어?”의 다른 표현에 불과할 뿐이다.

    오타쿠 낚시광의 미칠 것 없는 존재감

    실업과 불완전 노동에 대처하는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입장은 진보정당에 대한 시각으로도 연결된다. 빤한 비판일 수도 있지만 “<월간 낚시> 쯤 되는 잡지에서 선호하는 장비의 스펙을 줄줄 읊는 낚시광들” 같은 이미지는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표현이다.

    기본적으로 진보정당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진보매체의 열혈독자거나 당원 정도뿐,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분당 사실, 사회당의 존재, 이런 건 관심 밖이다. 이 정도까지 듣고 섣불리 ‘걔들은 우리 사람 아니라’며 선을 긋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누구의 지지를 조직해서 집권할 생각이신가.

    신기한 건 진보정당을 지지하거나 말거나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데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과 직접 관계는 없지만 왠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정도에 그친다. 구색을 맞추기 위함이니 당이 여러 개일 이유도 없고, 각 당의 크기가 클 필요도 없단다.

    사실 지방선거 지지율을 떠올리면 수긍이 되는 말이기는 하다. 그래도 선거 후 참패 분위기를 떨치지 못하는 당내 사정과 달리 바깥에서는 “그 정도면 선전”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이번 선거 덕에 진보신당의 이름은 알게 됐다고.

    가장 뇌리에 박힌 건 진보신당이 “미칠 것 없는 존재감”으로 보이는 이유로 친구들이 지적한 내용이었다. 좌중에서 노회찬의 ‘떡검’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엔 뭘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실망감을 드러냈다.

    서울시장 공약을 몇 개를 알려줬더니, 오히려 다른 걸 제쳐두고라도 ‘떡검’을 끝까지 파고드는 정치인이었다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볼 만했을 거라고 말했다. 손톱만한 정당에서 할 수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다루는 아젠다는 총망라라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진보정당이 평소에 무엇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성토는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요즘 대체 무슨 꿍꿍이냐고 나에게 따져 묻기도 했다. 동희오토나 기륭전자에 대해 설명하려는 말허리를 자르면서, 진보정당이 노동문제나 비정규직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데, 그게 다는 아니지 않느냐고 응대한다.

    자기도 진보정당을 지지하고 싶다면서, 그런데 도통 뭘 하는지 모르는 정당을 어떻게 찍냐면서 말이다. 얼마 전 방한한 ‘해적당’ 유럽의회 의원인 아멜리에를 언급하면서 다른 정당이 카피하기 힘든 확실한 아젠다를 정체성으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트리는 친구도 있다.

    지지는 신앙이 아니라 신뢰에서

    이쯤 되면, 유권자가 진보정당을 무시하는 건지, 진보정당이 유권자에게 소극적인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한국사회에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고,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치고 그 문제를 단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마이더스의 손을 무작정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들이 실제로 요구하는 것은 진보정당이 희망이 될 수 있는 근거, 아이콘처럼 각인될 타이틀 정책과 지역 모델 등이다. 이런 작업이 촘촘히 진을 치지 않은 상태에서 운운하는 집권은 어떤 효과를 바라는 것인가.

    한나라당은 그런 데 비하면, 가십 만들기는 철저히 하는 정당으로 비친다. 언론의 지면배분 문제도 있고, 실제 내용은 비리문제나 구설수에 오르내릴 발언 때문이지만, 정당과 의원들이 미디어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다는 인상은 확실히 주기 때문에 건재함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정당은 조명도 못 받는 와중에 가끔 나올 때마다 뭔가 수도승 같은 분위기로 사람들을 겸연쩍게 한다는 것이다. 정당은 신뢰할 대상으로 지지하는 것이지 신앙은 아니라는 말을 듣자니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완전 노동자 친구들의 쓴 소리는 진보정당이 수행자의 경전 같은 이론과 거리감 있는 투쟁 현장에 집약되어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진보정당이 책임지고 있는 피억압자들의 앰뷸런스 역할을 포기하고 자기들에게 재롱을 부리라는 주문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앰뷸런스에 실려가지 않고도 진보정당의 운동을 지지할 수 있는 이유다. 노동으로부터 자신의 일상을, 노동자라는 이름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이탈시키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작지만 구체적인 하나의 정책 또는 하나의 지역 모델을 기대하는 것이다.

    한국사회 곳곳에 촘촘히 분포하는 불안정노동자의 일상과 정치의 거리는 아직도 멀다. 막장연예인과 수도승의 정치, 여기에 킹메이커들이 판치는 드라마 <대물>에 나오는 음모정치를 첨가하면, 한국 정치의 현실이 대강 설명되는 것 같다.

    킹메이커들의 지휘에 따라 막장연예인들이 작두를 타는 막장 예능 프로를 더 보기는 싫고, 그렇다고 모든 국민이 출가해서 정교일치국가로 거듭나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으니 필요한 건 자명하지 않은가? 작지만 확실한 좌파모델을 만드는 운동정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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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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