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도 무식했고, 우리도 무식했다"
        2010년 10월 25일 12: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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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장에서 나온 몸 까진 몸 / 그 길로 방구석 돌아가지 않고 / 조직노동자 억눌린 시절 / 이 지하실 불 밝혀 한 방 가득 찼구나 / 열번이나 빛나는 눈동자 모여 / 그 누가 우리 아니냐 / 그 누가 우리 아니냐/ 우리가 돌아갈 골목까지 밤중까지 / 그 누가 우리 아니냐” (고은 시 ‘노동학교의 밤’ 전문)  

    반월공단에 취직하다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 3개를 졸지에 잃어버린 선배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참담했다. 공부만 하던 대학생들이 공장에 다닌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느 학생 하나는 일하다 죽기도 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일도 아니었다.

    반월에서 나는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미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공장에 취업한 지 꽤 되는 여자선배를 통해 너희들 나이 또래의 여공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진옥이도 만나고, 미경이도 만났다. 채 스물이 안 된 나이였다. 그들과 만나서 놀고, 공부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반월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름도 바꿨다. 만약을 위해 가명을 썼다. ‘강형민’. 고등학교 선배로 요절한 시인의 이름이었다. 

    85년 여름, 반월에서 첫 출근한 대문 만드는 공장에는 용접 2년의 경력으로 거짓말을 하고 들어갔다. 어느 공장이나 기술자로 하면 임금이 높다. 하루 3,400원인가로 책정한 기억이 있다. 매일 야근을 하고 가끔은 일요일 특근도 했다. 당시 여성노동자들하고 비교해보면 꽤 높은 편이었다. 

    “야, 삼부 렌찌하고, 몽키 좀 줘봐” 

    작업 첫날 반장이 말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공장의 모든 공구는 다 일본말이었다. 직업훈련소에서 야스리(줄)는 써 보았지만 렌찌라는 건 몰랐다. 공구 중에 스패너와 몽키 스패너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바로 실력이 들통 났다. 

    “야 임마, 너 공장 다닌 거 맞아?” 

    ‘노동 현장’

    어떻게 얼버무렸는지 모르겠다. 그 이후 나는 공장에 오는 후배들에게 무조건 공구 이름부터 가르쳤다. 거기서 조금 다니고 경력을 위해 공장을 옮겼다. 규모가 있는 공장은 쉽게 자리가 나지 않았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한보’라는 도금공장에 다닌 얘기만 잠깐 하자.

       
      ▲야연도금 공장 내부 모습. 

    거기는 아연도금을 하는 곳이었다. 가로등이나 전봇대를 보면 은색으로 되어 있는 게 있다. 그게 바로 아연으로 도금을 한 것이다. 길게 생긴 공장의 뒤에서부터 크레인으로 긴 전봇대가 옮겨진다.

    황산 등에 담가 녹을 없애는 바람에 공장은 온갖 약품냄새가 가득했다. 그 약품으로 인해 비공(鼻空)이라고 콧구멍이 뚫려버리는 직업병이 생기기도 한다.

    거기는 24시간 맞교대였다. 아침 9시 출근, 다음날 아침 9시 퇴근이다. 도금은 500도가 넘는 온도에서 한다. 허리 정도의 높이에 목욕탕처럼 생긴 아연이 풀린 곳이 있다. 잔잔한 그곳에 약품처리가 된 크레인으로 물건을 넣으면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난다. 귀마개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면 양 옆에 있는 조그만 대피소에 숨어 있다가 물건이 다 들어가서 잠잠해지면 그 표면을 깨끗하게 걷어내는 것이 주로 하는 일이다. 은색의 고요한 아연도금통은 참으로 예뻤다. 그러나 튀는 도금에 한방이라도 맞으면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고, 피부는 데었다. 

    겨울에도 뒤에서는 선풍기를 돌리고, 앞에서는 500도의 온도가 감싼다. 24시간을 일하면서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밤 12시에 주는 야식시간 뿐이었다. 10분만에 라면을 먹고 50분을 잔다. 기숙사도 있었지만 회사는 결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거기서 자면 못 일어난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뜨거운 바닥에 박스를 깔고 누워 토끼잠을 잤다. 위로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지나가고, 밑은 뜨거워 감기에 걸리곤 했다. 1년에 한명은 꼭 아연통에 빠진다고 했다.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그 곳은 일부러 빠지라고 해도 빠지기 어려운 구조다.

    지금도 가로등이나 전봇대를 보면

    그러나 계속되는 작업은 사람의 정신을 몽롱하게 하고, 그러다 보면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회사 안에 목욕탕이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힘들었던 그 공장은 3개월인가 다니다 결국 그만 두었다. 좀 더 큰 공장으로 옮기기 가기 위해서였지만, 그만두는 날 정말 기뻤다. 나는 지금도 가로등이나 전봇대를 보면 그 노동자들이 생각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노동자가 만든다. 어떤 물건도 인간의 노동이 없이는 생산될 수 없다. 기계가 대량생산을 하기는 하지만 그 기계조차도 인간의 노동 없이는 만들어 질 수 없다. 그만큼 노동이 소중하고, 노동자가 대우를 받아야 하는 이유다. 

    “내 손 거쳐 만든 물건
    백화점에 가득해도
    셋방살이 내 집에는 재고품도 하나 없네
    어쩌다가 이 내 몸은 노동자로 태어나서
    거친 세상 풍랑 속에서
    멸시 천대 받는구나”라는 노래가 노동자의 처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광주의 기억은 운동을 바꾸었다. 막연히 ‘민주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생각으로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70년대를 이끌어 왔던 교회운동, 학생운동, 정치운동만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번졌다. 총칼을 든 군인들을 상대로 한 투쟁이었다. 광주에서처럼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혁명적인 이론이 필요했다. 한국전쟁은 과거 일제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혁명 전통의 단절을 가져왔다. 따라서 새로운 혁명을 위해서는 그에 맞는 이론을 만들어야 했다. ‘사회구성체 논쟁’이니 ‘대중정치조직 논쟁’이니 하는 무수히 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혁명과 혁명이론들

    수많은 책들이 출판되어 나왔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책들도 번역되어 은밀하게 돌아다녔다. ‘팜플렛’으로 불렸던 혁명이론과 당면 투쟁에 대한 이론들도 쏟아져 나왔다. 혁명이론을 만들기 위해 한편에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에 맞는 이론을 찾았다.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혁명이론을 받아들여 활동해야 한다고 했다. 요즘도 가끔 들리는 ‘NL이니 PD니’ 하는 것들이 바로 그 시기에 했던 논쟁들이다.

    너희에게는 낯선 얘기고 어렵겠다. NL은 National Liberation, 즉 민족해방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넘어가자.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전두환은 미국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이고, 그 뒤에 미국이 있다고도 했다.

    반면 PD는 People’s Democracy, 즉 민중의 해방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분단의 종식보다 민중이 권력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통일도 중요하지만 통일된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도 중요하다고 했다.

    한편은 미국과의 투쟁에, 한편은 전두환을 비롯한 자본가들의 투쟁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었다. 물론 이런 구분이 너무나 도식적이긴 하지만 크게 보면 NL-PD 대립으로 불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쪽은 ‘대동단결’로 다른 한쪽은 ‘일치단결’로 구호를 외치는 등 서로 구호조차 달라지기도 했다. 이런 생각의 차이는 87년 이후 “김대중을 지지하느냐, 독자적인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하느냐”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나타나기도 했고, 가장 최근에는 2007년 말 민주노동당이 분열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너희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얘기니까 그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논쟁의 배경에 광주항쟁의 쓰라린 경험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올바른 노선이 없음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투쟁을 지휘할 조직이 없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죄책감이 논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다.

    NLPD 논쟁은 구체적 삶속의 갈등

    운동 구경꾼들에게는 “NL이냐 PD냐”의 논쟁이 쓸데없는 분열로 보일지도 모르겠고, 왜 하나로 되지 못하는지 답답해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혁명 전통이 단절되어 온 우리 역사가 낳은 ‘80년대식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가한 책상머리 위의 논쟁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나온 갈등이었다는 얘기다. 

    이 글을 쓰면서야 나는 왜 우리가 그 시기 ‘우리의 역사 안에서’ 변화의 물줄기를 찾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로스엔젤레스의 ‘민족학교’라는 곳에서 동학혁명, 일제하 독립운동에 대한 글과 도올 김용옥의 동영상 강의를 보았다.

    돌아보면 우리 철학과 역사에 대한 공부가 미흡했음이 한탄스럽다. 감옥에서도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비롯한 서구 사상이나 경제사를 중심으로 공부했지, 정약용이나 최한기나 동학혁명에 대한 공부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일제하 조선의 독립투쟁을 해 온 선배들에 대한 얘기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소련 혹은 중국으로부터 수입되거나 북으로부터 내려온 혁명사상 이외의 것은 없었다. 김용옥 선생이 ‘인내천’이라는 동학사상으로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론적 바탕을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많이 반성했다. 

    당시 우리가 혁명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나라는 소련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나라였으니까. 특히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은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레닌이 만든 ‘이스크라’ 우리말로는 ‘불꽃’이라는 정치신문의 모형을 우리도 답습했다.

    전두환도 무식했고, 우리도 무식했다

    또 볼셰비키가 택한 것은 각 지역마다의 정치조직이었다. 레닌이 만든 ‘뻬테르스부르크 노동자해방투쟁동맹’을 따서 우리도 반월지역에 노동자해방투쟁 동맹을 만들기로 했다. 반월에는 서울대, 성균관대를 비롯하여 다양한 학교에서 나처럼 공장으로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 접촉하고, 그들이 연결하고 있던 노동자들을 하나로 모으면서 우리는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총칼을 든 전두환도 무식했고, 그에 맞서 싸우는 우리도 무식했다. 우리에겐 총칼에 맞설 무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것은 노동자 조직이었다. 공장에 다니면서도 학습을 해야 했다. 야근이 끝난 무거운 몸을 끌고도 공부를 했다. 새벽 공장에 출근하기 전에 모여 공부하기도 했다. 당시 막 번역이 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모택동의 <모순론> 등을 통해 변증법적 철학관을 읽히는 한편 ‘조직’이라는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마르크스(왼쪽)와 레닌. 

    새로 공장으로 오는 학생들과 조직된 노동자들의 교육을 위해 17박 18일 동안 합숙교육을 시킨 적도 있다. 지하실 방에 남녀 구분 없이 몰아넣고, 주민들의 눈에 이상하게 비칠까봐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교육이라기보다는 세뇌를 시켰다.

    노동자의 철학, 경제학, 역사와 각종 이론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전태일 평전인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와 같이 쉬운 말로 쓰였으나 철학이 묻어 나오는 책들이었다.

    특히 전태일의 삶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는 정말로 아름다운 청년이었고, 광주항쟁 못지않게 아빠를 비롯하여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영화 전태일’을 한번 보고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은 꼭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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