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은 그들에게 목숨을 걸라 한다
    절망을 불허하는 투쟁에 함께하자"
        2010년 10월 24일 11: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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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클레인 농성 모습. 송경동 시인은 현재 ‘준단식’을 하고 있다.  

    나는 "결사투쟁"이 싫다

    나는 “결사투쟁”이 싫다. 언제부터인가 집회에서 외치는 구호 뒤에 여섯 글자의 상용구를 붙이더니 조금 지나 “결사투쟁”까지 따라붙었다. “비정규직 철폐하고 노동권을 쟁취하자! 비/정/규/직/철폐/투쟁! 결사/투쟁!” 이런 식이다.

    언젠가 그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는 절실하게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그러나 매가리 없는 상용구 “결사투쟁”, 음성안내 메시지 마냥 똑같은 톤으로 반복되는 “결사투쟁”, 나는 이런 “결사투쟁”이 싫었다. 도대체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결사투쟁이라면 죽음을 왜 각오한단 말인가.

    지난 16일, 기륭 농성장으로 경찰 병력이 배치되었다는 급박한 문자메시지를 보고 기륭전자 구사옥 앞으로 달려갔다. 마을버스를 내리고 보니 포클레인 한 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있다. 운전자도 없고 이미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각종 장식들로 농성장의 것이 된 포클레인이 왜 그리 안절부절 못하는 듯했을까.

    보고 싶지 않았지만 보였던 그, 포클레인의 가장 높은 곳에서 몸을 기울인 채 전깃줄 하나를 붙들고 위태롭게 서있는 송경동 시인 때문이었을 게다.(사진 아래) 그 줄을 지탱하느라 안간힘을 쓰는 김소연 분회장과 포클레인 아래 땅에서 제발 눈을 뜨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서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이었을 게다.

       
      ▲사진=기륭전자

    넉살좋은 시인의 ‘결사투쟁’

    경찰 병력이 물러간 후, 송경동 시인은 무게 중심을 잡고 중력의 방향으로 섰다. 마이크가 그에게 넘어가자, 넉살좋게도, 가을바람이 시원하더라고 했다. 나는 가을바람이 쌀쌀하기만 했다. 그는 살다 보면 무언가를 걸어야 할 때가 있다고 했다.

    그가 무언가를 걸었을 때 깨닫게 된 목숨의 소중함, 그것은 포클레인의 가장 높은 곳과 땅 사이의 거리를 채운 아찔함으로 다가왔다. 나는 소중함의 중력 앞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시인이 되어 자기가 한 말을 지키고 싶다 했다. 나는 그럴 때 말을 아끼고 싶어진다.

    기륭전자의 여성 노동자들을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9월경이었다. 7월 기륭전자분회를 결성한 노동자들을 향한 사측의 탄압은 거침 없었고, 8월 말부터 현장 농성이 시작되었다. 9월 어느 날 다른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그녀들을 찾아갔고 증언대회를 열기로 했다.

    기륭전자 여성노동자 불법파견 실태와 인권침해 사례 고발을 위한 증언대회. 그날 증언대회에는 기륭전자의 여성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구로동맹파업 당시 효성물산 노조위원장을 맡았던 김영미 씨가 나와 2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구로공단의 현실을 말했다.

    증언대회가 끝나고 건물 밖으로 다 같이 나왔다. 김영미 씨는 기륭전자의 여성노동자들과 커피를 한 잔 나누고 싶어 했다. 건물 1층에 있던 커피숍으로 가자는 걸 그녀들은 끝내 사양했다. 한 잔에 3천 원 하는 커피 말고 그냥 자판기 커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최저임금 플러스 10원

    커피숍 커피의 사치스러움, 그녀들은 김영미 씨의 마음이 사치스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자판기 커피로도 그 마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녀들의 임금은 최저임금에서 10원이 더 많았다.

    당시 구로공단에는 기륭전자뿐만 아니라 불법 파견 의혹을 받는 사업장이 매우 많았다. 그녀들은 불법파견 노동자를 정규직화하고 해고자를 원직 복직하라고 요구했다.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성실히 교섭하라는 요구도 했다.

    기륭전자의 여성노동자들은 6년 동안 노동자에게 보장되어야 할 ‘핵심’ 권리들을 위해 싸워왔다.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하고 CCTV를 설치해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을 해고하면서 노동조합과 성의 있는 교섭 한 차례 하지 않은 기륭전자에 맞서 싸웠다.

    대부분의 노동자를 파견직으로 채용해 고용기간이나 임금을 불리하게 강요하면서 결국 여성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의 굴레를 빠져나올 수 없도록 한 기륭전자에 맞서 싸웠다. 그 긴 6년의 시간 동안 기륭전자의 여성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왔다는 점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녀들이 죽음을 각오하는 데 “결사투쟁”이라는 말은 필요 없었다. 그녀들은 인간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

    기륭전자는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도 벌금 500만 원으로 인간의 권리를 사버렸다. 정부는 제3자인 것처럼 방관할 뿐이었다. 얼마 전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았다는 ‘국가 고용전략 2020’은 오히려 비정규직을 더욱 확산시키겠다는 선언이었다.

    세상은 그녀들에게 목숨을 걸라 한다

    기륭전자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사옥 부지를 팔고 다른 곳으로 공장을 옮겼다. 노동자들의 터전 위로 부동산 매매계약서 한 장을 살포시 떨어뜨리며 그 땅에서 일구었던 노동과 인간에 대한 꿈을 지워버렸다. 그 자리에 포클레인이 밀고 들어왔고 주인이 바뀐 땅을 전 주인인 최동열 사장이 고용했던 용역들이 지키고 있다.

    10월 13일부터 옥상 단식, 15일부터는 포클레인에 올라가 그 자리를 지키는 기륭전자의 여성노동자들은 지금 세상에 맞서 싸우고 있다. 세상은 또다시 그녀들에게 목숨을 걸라 하고 있다.

    30여 년 전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은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권리를 포기하게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여 년 전 구로공단의 여성노동자들이 그랬고 지금 기륭전자의 여성노동자들이 그렇다.

       
      ▲목숨을 걸어 희망을 확인하는 잔혹한 시간은 끝나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기륭분회의 투쟁을 보면서 고맙다고도 한다. 절망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그래서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목숨을 걸어 희망을 확인하는 이 잔혹한 시간들은 이제 끝나야 한다. 무언가를 걸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기에, 그녀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걸었고, 너무나 소중하다.

    “결사투쟁”을 끝낼 결사(結社)가 필요하다.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회적인 결합 관계를 맺는’ 결사. 그녀들의 꿈이 우리 모두의 꿈이라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고, 그것이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너무나 분명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꿈을 향한 결사에 함께 할수록 인간의 시간은 앞당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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