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유럽, 프랑스 투쟁을 지켜보다"
    '계급' 앞에서 인종-종교갈등 수그러져
        2010년 10월 24일 11: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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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유럽 전체가 지켜보는 것은 프랑스입니다. 사실, 각종 예산안 개악이라든가 복지시스템의 개악, 살인적인 예산 삭감들은 프랑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프랑스보다 에컨대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 더 심하게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전투성 강한 프랑스 학생과 노동계급

    영국 같으면, 최근 소식에 의하면 내년 국가의 대학교 지원 예산은 40% 삭감이랍니다. 이건 결국 조만간에 – 평균 소득 수준과 장학금 지원 수준 등을 감안해서 – 영국 대학생이 미국 대학생 이상의 등록금을 강탈 당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1945년 이후의 ‘사회 모든 계층을 위한 공평한 교육 제공’ 이념이 이제 완전히 사라져 교육이 철저하게 계급화되는 걸 의미합니다.

    즉, 프랑스의 각종 개악 상황은 분명 유럽 각국 중의 최악은 아니지만, 프랑스는 원래 전통적으로 전투성이 강한 노동계급, 학생계층의 문화를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아일랜드 동료나 영국 동료들이 하지 못하는 투쟁을, 지금 프랑스인들이 대신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선두에 서준다고 할 수도 있죠.

    참, 투쟁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조금 위협적이고 거친 듯한 느낌을 받으실 수 있지만, 제가 과거에 직접 파리에서 본 노동자나 학생 데모나 지금 노르웨이나 덴마크 신문을 통해 본 최근의 데모들은 대개 ‘유쾌하고 즐거운 데모’들입니다. 대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직장 단위 소풍 가듯이 데모하기도 하고, 학생들 같으면 데모하면서 실컷 외칠 것을 외치고 나니 서로간 연애 활동(?)도 열심히 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경우에는 경찰이 도발하지 않는 이상 데모 참가자들이 그 어떤 폭력도 쓴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계급투쟁’과 ‘폭력’을 무조건 연결시키는 국내 신문들의 어조부터 아주 문제가 커요. 민영화된 프랑스텔레콤회사에서 돌연히 수십명이 직장 과로와 스트레스로 자살하게 만드는 게 폭력이지, 이와 같은 일본 내지 한국형 ‘과로사’들의 유럽 상륙 (?)을 예방하려는 게 왜 폭력입니까?

    이번 프랑스 투쟁의 상황을 보면, 앞으로의 사회적 변동들을 추동시키는 역량이 어떻게 결집될 것인가를 대체로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 투쟁을 보면 미래를 눈치챌 수 있다

    첫째, 연금개악 반대 운동의 지지율은 대개 70% 이상이고, 국회상원에서 개악안을 통과시킨 지금 상황에서도 과반수 넘은 프랑스인들이 반대 행동의 지속을 지지합니다. 즉, 지배계급(생산수단 소유자 및 고급관료)과 중산계급의 상류 부분(고수익 전문가: 일부 의사, 변호사 등), 그리고 일부 소부르주아 등을 제외한 민중 전체가 이 문제로 하나로 결집된 것입니다.

    중학생부터 연금생활자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도 정규직 노동자도 ‘공통 분모’를 찾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지국가 절대 사수와 부자에 대한 추가 징세를 통한 복지국가의 문제 해결(고령화에 따르는 연금액 증액 문제의 해결)입니다.

    결국 지금 문제는 사회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그 해결에 따르는 부담을 민중에게 전가시킬 것이냐 아니면 지배계급이 그들이 갈취하는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용해서 알아서 문제 해결할 것이냐 이것입니다. ‘민중’이나 ‘지배게급’, ‘잉여가치’ 같은 개념들이 낡았다고 주장하시는 포스트모더니스트 분들은, 이 상황을 한 번 직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계급적 문제 앞에서는 온갖 사소한 문제들이 다 퇴색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배계급이 부추기는 인종차별, 인종주의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프랑스지만, 지금 주로 아프리카, 이슬람권 출신들이 사는 파리 위성도시의 젊은이와 프랑스 토박이 젊은이들이 사실상 공동투쟁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계급’이라는 총체적 화두 앞에서는 ‘인종’이나 ‘종교’는 수그러들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아직도 민중이 먹고 살기에 좋았던, 고성장 시대 막바지의 1968년 혁명은 교사, 교수의 권위주의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등을 중핵으로 삼기도 했지만, 이미 권위라고 별로 안남아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된 교사들은 지금 학생들과 같이 행동하는 셈입니다.

    젊은이들 투쟁의 핵심 추진세력이 되다

    그리고 셋째, 노동자와 함께 특히 고등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이 투쟁의 새로운 핵심적 추진세력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퇴직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늦추는 연금제도 개혁인데, 아직 퇴직할 때까지 40여년이 남은, 퇴직은 물론 취직도 안한 아이달이 웬 난리냐고 부르주아 신문들이 비아냥거리지만, 사실 여기는 바로 핵심입니다.

    젊은이들이 단순히 ‘퇴직’ 문제로 난리 치는 것이 아니고, 퇴직은 물론 제대로 된 취직도 못할 것 같은 불안을, 지금 소통과 연대를 통해 다 같이 해결해보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점차적으로 빼앗기는 미래를, 지금 데모함으로써 탈환해보려는 작정인 셈이죠.

    신자유주의 사회의 저주받은 계층은 젊은이들입니다. 이건 단순히 비정규직으로 몰리는 고용불안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산업자본의 투기자본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엄청난 돈들이 생산적으로 투자되지 못하고 과열화된 부동산 시장으로 몰리니 집값이 비정상적으로 올라 젊은이들에게 일차적으로 ‘보금자리 마련’은 불가능해집니다.

    복지정책의 후퇴에 따라 자녀 양육이나 의료에 드는 자비 부담이 늘어나고, 최초 고용 연령이 상향조절됨에 따라 의무 퇴직 연령이 오기 전까지 정상적 연금을 받기 위해 필요한 근로 40년 채우기가 힘들어지다 보니 민영 연금 가입 압력이 거세집니다.

    감원이 잦아지는데, 대개 연공서열에서 제일 낮은 지위에 있는 젊은이들이 감원 대상의 일순위가 됩니다. 말하자면, 아이를 키우고 집을 마련하고 직장을 찾고 노후 설계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유럽 사회는 점차 아주 아주 잔혹해지는 것이죠.

    젊은이들의 깨달음

    젊은이들이 이제 하나를 확실히 다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인생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 인생들에 비해 훨씬 험악하고 공포에 가득차고 힘들 것을.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의 삶살이가 그들에 비해서조차 더욱더 험악해질 것을. 그러니 미래를 되찾기 위해 이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데모 대열에 동참하는 법입니다.

    은행과 대규모 생산시설을 공유화(사회화)하여 사회주의적 준(準)계획 경제로 넘어가지 않는 이상 그들의 미래를 되찾을 수 없음을, 그들이 아직 절감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 깨달음도 조만간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가 파쇼화되지만 않으면 말씀에요.

    국내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열심 ‘자기 개발’하고 ‘경쟁’해봐야 돌아올 게 직장 줄안, 주거 불안, 노후 불안, 질병 불안, 육아 불안일 뿐이라는 사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지배층과 중산층 상류, 즉 맨 위의 15~20%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원들이 사실상 현대판 양민이나 천민으로 이미 전락해 그 신분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 등을 아직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의 전체 구조는, 그걸 웬만큼 인지하지 못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북한 사회의 전체 구조의 경우 북한 평민들은, 남한이 보다 잘 산다는 사실이나 김씨 왕조와 그 귀족들이 일본산 초밥을 즐긴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짜여져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남북한에서도 양쪽 평민들에게 깨달음의 순간이 올 것이고, 빼앗긴 미래를 되찾으려는 이들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아무리 인위적으로 보류시키고 예방시켜도 올 게 올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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