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인들 "이것은 계급혁명이다"
    사르코지 부자중심 정책 전면 거부
        2010년 10월 23일 02: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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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관은 이미 건드려졌다. 프랑스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초부터 줄기차게 진행되어 왔던 총파업과 집회는 9월 이후, 벌써 7번째다. 계속되는 총파업의 공식 이슈는 정부가 추진하는 연금개혁을 저지하는 것.

    프랑스 총파업 사태의 뿌리

    그러나 시위 현장에 들어서 보면, 이 모든 사람들을 거리로 끌어낸 원동력은 사르코지식 정책이 가져온 반생명과 비인간의 세상에 대한 분노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민들의 선명한 반대 여론에 싸늘한 무시로 일관해 온 사르코지의 대응은, 집회를 거듭할수록 눈덩이처럼 분노를 키워, 이제 가히 혁명을 논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거대한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저항의 기운이 사회 저변에 끓어 오르고 있다.

    지난 20일 집회에 참가한 발레오사의 여성노동자 아닉크는 말한다. "연금개혁보다 더 참기 힘든 건 불평등이다. 우리의 연금을 더 닿기 힘들 곳으로 만드는 국회의원들은 5년 일하고, 우리만큼 연금을 받는다. 사르코지는 부자들에게만 먹을 것을 챙겨 주고, 우리에게는 그들을 위해 더 많이 일하도록 만든다."

    대통령의 도를 넘어서는 계급을 위한 충성이 21세기 프랑스 땅에서 예기치 않은 계급투쟁을 촉발시킨 것이다. 21일, 노조연합 대표들은 상원에서의 표결 결과와 "무관하게" 파업을 확대하겠다고 천명함으로써 오늘의 문제가 연금 하나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광역전철(RER)을 비롯, 지하철, 철도의 운행이 일부 중단되거나 1/3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오를리 공항의 항공기 운항은 50%가, 샤를드골 공항은 30%가 취소되었다. 정유공장 파업, 석유저장 기지 봉쇄로 이미 전국주유소 1/3에서 기름이 동났고 상황은 점점 가열될 조짐이다.

    화물연대의 달팽이 속도 ‘서행 파업’으로, 고속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했다. 마르세이유에서는 시위대가 공항을 세 시간 넘게 봉쇄했고, 기차역에서는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연대해 선로를 점거했고, 68혁명의 진원지, 낭떼르에서는 학생들과 경찰간의 유혈 충돌도 벌어졌다.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도 공항에서 발이 묶이면서, 2010년 프랑스 파업의 산증인이 되어주었다.

    계급투쟁 진화 일등 공신, 로레알 화장품회사

    이쯤 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상은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진다. 약속도 제 시간에 잡을 수 없고, 휴가계획은 취소되며, 주유소를 찾지 못한 자가용 운전자들은 도로에 멈추고 만다. 그런데도 이 파업에 대한 지지율은 날이 갈수록 치솟기만 한다.

    파업에 대한 최근 공식 지지율은 71%다. 공식 지지율이 이 정도면, 현장에서 느끼는 지지율은 98%에 육박한다. 은근 슬쩍 연금개혁에 찬성했던 사람도, 별 생각이 없었던 이들도, 타오르는 시대 정신에 동요되어, 이젠 뭔가 변해줄 것을 기대하는 대열에 끼어드는 것이다.

    연금개혁 반대투쟁이 명백한 계급투쟁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데는, "난 소중하니까요" 광고로 유명한 화장품 그룹 로레알사가 큰 기여를 했다.

    로레알사 상속녀 릴리안 베탕쿠르 집안의 모녀간에 벌어진 재산 분쟁, 그녀가 자신의 친구(?)인 사진작가에게 하릴없이 던져준 1조5천억원, 시장 시절부터 사르코지가 로레알사로부터 받아온 정치자금, 사르코지의 집사 노릇을 하며 검은 돈을 관리해왔고 이번 연금개혁의 실무 장관 노릇도 하고 있는 노동부장관 에릭 뵈르트, 베탕쿠르가 회계담당으로 들어가 그들의 세금을 조작해주던 장관의 마누라…

    일일이 거명하기조차 복잡한, 이들의 추한 커넥션은 연금개혁을 놓고 정부와 노동계가 벌이던 씨름 한가운데서 폭탄처럼 터져버렸고, 순간 시위 장에는 “나는 계급투쟁한다”는 슬로건과 스티커가 재빠르게 등장했다.

    클래식한 마르크스주의자를 연상케 하는 ‘계급투쟁’이란 말은 이런 저런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이 나라에서도, 듣기 부담스런 말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말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집회장에서 가슴에 등에, 가방에 붙이고 다니는 최고의 인기 스티커가 된 것은 사람들 가슴에 들끓는 분노를 힘으로 전환시켜주는 정확한 맥락과 타이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Je lutte des Classes"(나는 계급투쟁한다)고 선언하는 시위 참가자들.

    "우리의 삶은 너희의 이익보다 소중하다"

    "국민연금 금고가 수억 유로의 적자에 허덕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더 희생하라고 할 순 없다. 이미, 우린 지금까지 너희들에 의해 돼지처럼 일해왔다. 이제 인간답게 살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삶은 너희의 이익보다 소중하다. 이제 너희의 금고를 털 차례다. 돈은 베탕쿠르의 금고에, 부자들의 금고에 있다.” 시위대의 요구는 의심의 여지 없이, ‘계급투쟁’에 맞추어져 있다.

    연금개혁은 사르코지의 대선공약이기도 했다. 꼭 누구처럼, 여태까지 제대로 해놓은 것도 없고, 임기도 얼마 안 남았고, 그래서 죽어도 이거 하나는 했다는 소리 들으려고 덤비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60세와 65세로 되어 있는 퇴직연령과 연금수급연령을 2년씩 늦춰 각각 62세와 67세로 하는 방안이 연금개혁의 골자이다. 또한 40.5년간 연급보험료를 내면 지급하던 100% 전액 수령자격을 1년 더 늘였다. 평균연령이 수십 년 전에 비하여 늘어난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연금공단이 빚더미에 올라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르코지는 이러한 프랑스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나름의 해법이랍시고, “더 일하고, 더 벌자”는 그럴듯한 슬로건을 대선 당시 만들어 냈다.

    사르코지가 집권한 프랑스에서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였다. 샤를 드골 공항의 제1터미널. 수십 대의 비행기를 타는 승객들의 여권검사를 하는 직원은 단 2명이다. 늘어선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거의 40분을, 단지 여권을 슬쩍 보여주고, 거기에 도장 하나 받으려고 서 있는다는 건, 이 바쁜 공항에서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처사다.

    옆에 있던 공항 직원과 투덜대며 수다를 떨었다. "도대체 왜 이래요?" 퉁퉁한 몸매의 검은 피부를 한 아저씨가 답한다. "사르코지가 그랬잖아요. 좀 더 많이 일하고, 좀 더 많이 벌라고. 근데, 사실 그게 좀더 많이 일하고 좀 더 빨리 죽으라는 거거든. 공공부분 인원 축소해서, 우리 지금 죽어나요. 이러다가 빨리 죽겠지."

    "더 많이 일하고, 일찍 죽자(?)"

    그 아저씨의 말이 옳았다. 더 많이 일하는 건 맞았다. 그런데, 그런다고 더 많이 버는 쪽은 이들이 아니었다. 앞문장과 뒷문장의 주어가 달랐던 것이다. 일찌감치 유급휴가 5주를 쟁취해 낸 이 나라 사람들은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누리는 권리에 철저했다.

    그러나 사르코지식 신자유주의가 이들의 살 속을 파고든 지 3년, 같은 기간, 민영화된 프랑스텔레콤에서는 무려 45명이 직장 스트레스로 자살을 했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새로운 공포가 탄생한 것이다. 다른 직장에서도 많은 직장인들이 강해지는 스트레스와 압력을 호소한다.

    아직 사르코지 시스템으로 인한 직장인들의 평균수명 감소가 손에 잡힐 만큼 뚜렷하진 않지만,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벌자"는 결국 "더 많이 일하고, 일찍 죽자"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연금 총액을 탈 수 있는 연한이 더 길어지면,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67~68세까지 일하다가, 그때 가서 연금 총액을 타기보다는 차라리 연금액수가 줄어들더라도, 더 일찍 퇴직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것으론 먹고 살기가 빠듯해 질 것이고, 그럼, 어쩔 수 없이 개인연금에도 눈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 소위 개인연금을 팔아먹는 회사들이 먹고 살 거리가 마련된다. 사르코지의 친구들을 위한 세심한 일자리 마련의 한 사례다.

    국민들의 연금을 개혁이란 이름으로 손보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그들에 해당하는 연금법 조항은 안전하게 보존한다. 물론, 국회의원들은 연금에서 무한한 혜택을 받는 부류이다. 5년간의 국회의원 활동을 한 자는 40년간 일반기업에서 일한 사람과 같은 수준의 연금(1,548유로)을 받는다.

    한번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 일반인의 절반 수준인 22.5년간 연금을 납입하면 전액을 받을 수도 있다. 2선 의원은 월 3,096유로, 3선을 하면 4,644유로의 연금을 받는다. 그들은 차마 자신의 연금을 깎을 수는 없었다. 기꺼이 신들의 세비를 올릴 수 있었던 한국의 의원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사르코지는 이제 쓸 수 있는 카드를 죄다 써버렸다. 연금개혁에 대한 집중된 투쟁과 시선을 분산시키고,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써버렸던 ‘집시 추방’은 국내외에서 예상 외의 격렬한 역풍을 사르코지에게 안겨줬다.

    걸핏하면 이제 더 볼 것도 없는 카를라 브뤼니의 누드사진, 그녀의 옛 연인들과의 화려한 사생활들이 만들어내는 스캔들이 정치면과 사회면에 어색하게 걸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런 사탕발림에도 진력이 났다.

    사르코지 집권 이후 카를라 브뤼니가 어디서 뭘 하는지에 대해 언론이 이토록 무관심했던 시절은 일찌기 없었다. 오히려 집회에선 이런 구호가 날아다닌다. "카를라, 널 원망하진 않아. 너도 그 놈한테 당한 것 뿐이잖아". 르몽드는 ‘연금개혁,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다’라고 오늘에 이른 연금개혁 정국을 진단한다. 그 막다른 골목에서 사르코지가 맞딱드린 건, 공포(!!)의 학생들이다.

    고교생들, 이 싸움의 새로운 승부수

    고교생들의 대거 참여가 감지 될 때, 언론은 유난히 호들갑을 떨었다. 언론은 그들의 등장에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정부와 의회, 경찰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노조들까지 이들의 등장에 식은 땀을 흘렸다.

    (실제로 이번 파업이 전면적인 무기한 총파업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권력의 편에서 더 잘 작동하는 거대노조들의 제동 때문이기도 했다. "총파업"은 계급투쟁에 이어 집회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해결되지 않은 싸움에, 무기한 전면 총파업보다 더 효과적인 대응은 있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여전히 여기에 반대하는 거대 노조의 수뇌부들이 가장 효과적인 이 방법을 신중함의 이름으로 방해해왔다)

    학생들의 개입은 실제로 이 싸움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전면전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이런 지나친 신중함이 야기하는 불필요한 시간낭비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페이스북과 핸드폰을 통해 순식간에 소통하고, 가장 효과적인 싸움을 전개한다.

    현재, 고등학교 1,100개가 총파업에 동참할 것을 결정했고 프랑스전국학부모연합은 이런 학생들의 결정을 지지하고, 이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700여개의 학교에서 수업이 중단되었고,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쓰레기통 등으로 학교 앞에 바리케이트를 쌓아 출입 자체를 차단했다. 고교생, 대학생들은 68혁명을 비롯한, 지난 세기에 프랑스가 진행해온 모든 사회적 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학생들이 이처럼 주목할 만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소위 노조집행부 같은 권력집단의 주판알 튕기기에 휘둘리지 않고, 핵심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더 이상의 무시(mêpris)를 거부하며, 연금개혁이 통과되면, 실업문제가 즉각적으로 확대되기 때문이 그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문제라고 학생들은 인식한다.

    사르코지는 귀를 더 틀어막고, 파업은 더 깊숙하게 일상의 흐름을 무력화시켜간다. 그럴수록 파업에 대한 지지율은 더 상승하고, 이 아찔한 고통과 긴장은 모두가 함께 원하는 새로운 프랑스에 대한 기대감과 뒤범벅 되면서, 함께 한 발 더 앞으로 나가게 할 힘을 충전시킨다. 고통스러울스록 더 강력한 기쁨의 한발이 내딛어지는 현재 프랑스의 파업정국, 이것은 혁명의 전조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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