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체사상의 종언과 진보의 종언
        2010년 10월 19일 11: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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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는 뻔하게 예상되었던 일이라 해도 막상 실현되면 그것이 우리가 내심 각오했던 것보다 더 큰 심리적 충격을 주는 일이 있지 않은가? 3대 세습을 천명한 북한 내의 최근 움직임이 바로 그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되버릴 때 막상 그것이 생각 이상으로 당혹스러웠음을 경험한 것이다. 3대 세습에 대한 최근의 논의들이 단순한 호들갑이 아닌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야말로, 우리는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식의 냉소주의에 빠지는 대신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의외의 충격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떠맡아야 한다.

    1. 소위 말하는 ‘세습 문제’에 대하여

    지금 북한의 ‘3대 세습’ 문제를 둘러싸고 소위 말하는 ‘진보진영’ 내의 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언론사들 중 ‘진보’적 성향으로 분류되는 경향신문이 사설을 통해 세습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민노당의 자세를 문제 삼으며, 은연중에 진보진영 내부의 소위 ‘종북세력’을 비판하자, 이에 대해 당사자가 강력하게 반발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결국 그 문제에 관한 논쟁이 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민노당 울산시당의 (전례가 없는) 경향신문 절독 선언이라는 격한 형태의 반응이 나왔다. 또한 이에 대한 경향신문 측의 비판에 응답하여 이정희 민노당 원내대표는 북한의 내부 통치체제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며, 북한 내부사정에 대해 간섭하지 않으려는 것이 민노당의 공식 노선이고 이에 대해 일부 진보진영이 민노당에 대한 ‘사상검사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고 역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 또 다시 진중권이 나서서 이정희 의원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3대를 넘어선 ‘지도자 세습’이라는 퇴행적인 행태가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뿐만 아니라 근대국가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임을 지적하며, 이를 ‘사회주의적 가치’에 대한 중대한 배반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북한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가치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임을 역설했다.

    처음에 경향신문과 울산시당, 나중에는 이정희와 진중권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 일고 나서, 진보진영의 고매하신 ‘사상가’들이 너도나도 가세해서 이에 대한 논평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평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북한문제에 대한 진보진영의 논평들이 항상 그렇듯이, 그리고 고매하신 (바로 그만큼 무능력한) ‘진보적’ 사상가들의 ‘썰’이 항상 그렇듯이, 무엇보다 ‘내용’이 결여되어 있음을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나마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형식적인 수준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진영논리 뿐이다. 말하자면, 결국 다시 똑같은 대립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고색창연하게 말하면 NL과 PD의 대립, 좀 더 격하게 말하자면 자유주의 좌파들과 민족 좌파들의 대립 혹은 종북 주사파들과 진보파 간의 대립, 다시 고전적인 어투로 말하자면 자주파와 평등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논쟁의 당사자들 중 두 명인 이정희와 진중권 양자에 대해 몇 마디만 덧붙여 보겠다. 세습문제에 대해 ‘굳이 논평하지 않겠다’라는 것이 민노당의 ‘입장’이라는 이정희 의원의 말씀은 아무리 좋게 들어줘도 궤변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사안에 대해 당내의 치열한 노선투쟁을 통해 정세 속의 정확한 ‘입장’을 정하는 것이 공당의 의무인 이상, 이번 사태에 관해 ‘입장 없음’을 하나의 정확한 ‘입장’으로 미리 정해버린 이정희 의원은 공당으로서 민노당의 위신을 실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문제에 관한 제대로 된 당내 토론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폭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정희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확히 말해서 ‘말하지 않겠다’라는 형태의 논평거부가 이정희 의원이 당원 개인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언제나 민노당 내부의 진보세력의 사고능력은 북한 앞에서 항상 멈춰왔기 때문이다. 과거 구체적인 운동 속에서 드러난 ‘자주파’들의 진정한 미덕은 소위 ‘진보적 가치’를 남한과 북한 민중 양자의 문제로 생각해 왔던 것에 있었다. (나는 이 부분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미덕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정당 내부의 관료들로 출세한 자주파 어르신들께서 할 법한 ‘자주’니 ‘민족문제’니 ‘주체성’이니 하는 말들은 문학에 빗대어 말해보자면 이미 ‘사은유’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이렇듯 자주파라고 불리는 본인들이 운동성을 잃은 지금 시점에서, 북한문제에 대한 유의미한 사고 자체가 멈춰버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세습에 관한 섣부른 논평보다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무사유는 비단 민노당과 이정희 그리고 NL 주사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정희 의원에 대해 타박한 진중권 역시 매우 동일한 형태의 진보 진영 내 ‘무사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북한에 대한 진중권 자신의 소위 말하는 ‘비판’ 역시도 아무런 내용이 없었음은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이정희 의원처럼 솔직하게 자신의 무사유를 인정하는 ‘말하지 않는’ 노선을 택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북한체제에 대한 진중권 자신의 직설적 비판은, 기실 북한비판에 있어 매우 오래된 형태의 추상적인 당위론 이상의 비판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그가 비판을 통해 비판 자체의 내용보다 더 잘 드러냈던 것은 이정희와 민노당 내의 소위 ‘자주파’에 대한 그 자신의 세련된 우월감과 (남들 보기에 역겨워 보이기만 하는) 자아도취감 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이 부분으로 돌아오겠지만, 북한에 대한 진중권 류의 비판이라는 것 역시 남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의 체제 내적 우월성을 전제하고 북한 정권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조중동에서 되풀이하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이 부분에 관해서는 소위 NL들의 말이 맞다) ‘형식적 비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형식적 비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실은 조중동이 내심 북한체제가 당분간 지속되기를 바라듯이 진중권과 같은 진보적 비판가들의 비판 역시 현실에 대한 아무런 개입을 전제하지 않는, 그 외의 모든 문제를 ‘국제사회’(6자 회담)의 소관에 알아서 맡겨버리자는 식의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이 입만 산 얼치기 반공주의자들은 북한 문제에 관한 비판에 있어 ‘주체’가 될 생각이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농담을 해 보자면, 오히려 김일성의 ‘주체사상’의 진가가 드러나는 곳은 바로 진중권-조중동 식의 무력한 비판들이 근본적으로 실패하는 대목에서이다. 진중권과 조선일보의 논설위원들 같은 (진보-보수의 내용과 무관하게) 사상적으로 형해화된 무력한 입진보-입보수들보다는 차라리 북한 내부사정에 대한 진정어린 개입의 시도들 속에서 거듭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황장엽과 같은 진정한 ‘주체사상가’들이 사상 내적으로 훨씬 더 우월하다.

    북한에 대한 수다스러운 비판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오히려 이 시점에서 되물어야 할 것은 우리가 북한문제에 관해 얼마나 무력했느냐, 라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북한문제에 관해 진보든 보수든 사실상 6자 회담을 멍하니 쳐다보는 일밖에 없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무력’하다.

    나는 일전에 ‘진보의 종언’이라는 테제를 도출한 적이 있다.(http://blog.naver.com/paxwonik/40113897822) 앞서 지적한 무력함과 관련하여, 이 글의 또 다른 제목을 바로 ‘진보의 종언 2탄’으로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을 둘러싼 작금의 지리멸렬한 논쟁은 진보라고 불리던 것의 사상적 힘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관료와 재벌의 지배체제에 안착한 보수란 사상적 의미에서 이미 끝장났기에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한 편으로 여전히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자립한 정치적 주체성을 지향하는 소위 ‘진보’에 어떤 일말의 사상적 진정성이 있다면, 바로 그 사상적 의미에서의 주체성의 이론적/실천적 근본을 해부하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북한’이라는 존재를, 더 나아가 지금 상황에서 금기시 되어 있는 ‘주체사상’이라는 주제를 절대로 피해갈 수 없다.

    2. ‘황장엽’ 문제에 대하여

    의미심장하게도, 북한에 대한 진보진영 내의 논쟁이 한창일 때 일전에 남한으로 망명한 전 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자신의 자택에서 숨진 일이 일어났다. 지금 현재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이에 대한 공식논평을 내놓지 않고 있으며, 민주당 역시 짤막한 논평을 내놓는 것에 그쳤다. 그가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주요한 비중을 감안한다면 이는 확실히 이상한 ‘침묵’이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평할 수 있다. ‘황장엽의 죽음’은 그가 오늘날 ‘북한문제’에 대한 남한의 진보진영 내부의 자기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 아이콘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살아생전의 황장엽이나 고인이 된 황장엽이나 이 모두에 대한 진보진영의 기이한 ‘침묵’은 한 마디로 말해 ‘진보세력’이라 자임하는 사람들의 무능력을 징후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황장엽은 분명 분단 이후 남북관계에서 대단히 ‘징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보수언론에 의해 제조된 ‘반공투사 이미지’ 일변도의 모습 속에서 황장엽이라는 인물이 차지하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망각되어 버렸다. 만일 황장엽에 대해 알려져야 할 또 다른 공공연한 사실들이 있다면 어쩔 텐가?

    황장엽은 90년대부터 보수세력의 전통적인 아이콘으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나 황장엽이 보수파와 공안기관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하도록 내버려 둔 것은 오히려 ‘진보’를 자임하는 자들, 특히 ‘자주파’를 자임해 오던 사람들이었다.

    황장엽이 남한에 내려오고 유명세를 탄 이후에도 여러 번 자살을 생각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황장엽에 대해 덜 부각된 사실들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로는 그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사상적 신념을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과, 둘째로는 김정일에 대한 그 자신의 격렬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패한 영도자 ‘김일성’에 대한 일말의 믿음을 죽기까지 거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갑작스레 개인적인 사적 일화를 밝혀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황장엽에 대한 북한의 위협 때문에 일정을 공개하지 않고 불시에) 진행되었던 안보교육 현장에서 황장엽이 했던 발언을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현장에서 참석자 중 한 명이 황장엽에게 한 가지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남한에 귀화한지 오래되었고, 북한정권으로부터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아온 지금 상황에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느냐고 말이다.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황장엽은 짧고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과거 서방세계에서 반공 선전의 일익을 주로 담당해왔던, 귀화한 동구권 출신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자주 보였던 이러한 기이한 우울증적 ‘이중성’은, 냉전 상황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한 망명자, 황장엽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반체제 활동을 했던 한 동구권의 인사는 이전에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짤막한 한 마디로 표현한 적이 있다. ‘저는 자본주의를 신뢰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는 한 명의 사회주의자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주체사상의 주요한 이론적 입안자들 중 한 명이자 북한식 사회주의의 노선을 구상했던 정치적-이론적 엘리트였던 황장엽 역시, 김정일 치하에서 ‘주체사상’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던 한 명의 충실한 (그리고 실패한) ‘주체사상가’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상식적인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90년대 중반에 황장엽이 남한으로 망명했을 때, 도대체 한국에 여전히 남아 있던 ‘주사파’들은, 혹은 한때라도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자주파들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들이 주체사상을 사상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그것의 이론적 구상자인 황장엽의 망명 역시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았을까? 만일 주체사상이 진짜로 어떤 ‘사상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바로 그 ‘주체사상’의 본연의 관점으로 그러한 사상을 낳았던 국가 내에서 표출되었던 모순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했을 것이다.

    마오쩌둥과 그를 뒷받침한 중국 인민이 주도해서 건설한 공산중국이 오늘날 기이한 형태의 국가독점 자본주의로 형해화된 사태를 다시 본연의 ‘마오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시도들이 오늘날 중국에서 있듯이, 앞서 말한 형태의 ‘주체사상적 비판’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

    오히려 전자의 경우 마오의 사상이 여전히 사상적 힘(=그것이 기반한 민중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황장엽이 망명하던 시점에서 후자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NL의 주요 이론가들은 일찌감치 자유주의 진영으로 투항해버린 채 남은 자들은 (자유주의 좌파들이 현존하는 의회 민주주의 체제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듯) 북한정권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마저도 운동이 지속되던 동안뿐이었다.

    다시 말해 정작 주사파들 자신이 황장엽의 망명이 야기한 사태에 대해 어떠한 유의미한 개입을 보여주지 못했던 당시의 정황은 주체사상이 ‘사상적 힘’을 일찌감치 상실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지하에서 각 잡고 논의하던 사람들도 사실은 그것을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의도는 ‘주체사상’의 시대착오성을 비웃으려는 것도, 과거 PD계열 이론가들이 지금도 공허하게 (허수아비 때리기 놀이를) 반복하듯이 주체사상의 논리구성 상의 허점을 폭로하려 것도 아니다. 사상적 힘은 정밀한 논리구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의 진정한 PD 이론가였다면 자신의 이론적 논적이 그렇게 손쉽게 허물어진 것을 슬퍼했어야 했다. 다시 말해, 한때 일부 운동세력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던 주체사상의 급작스러운 종언을 마땅히 자신의 일로서 ‘애도’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이 지면을 통해 서투르게 시도하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애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조차도 여전히 일정 부분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것이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3. 진보세력 내부의 진영논리와 주체사상

    나는 이제 논쟁에 대해 더 자세한 논평들을 내놓고 싶지 않다. 그렇게 했다가는 자칫 진부한 이야기들을 무력하게 되풀이하는 짓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더 중요하게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세습 문제’와 관련하여 남한 내부에서 벌써 설정되어 버린 논쟁의 구도, 그 오래되고 고착된 진영논리(NL-PD) 그 자체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파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노선투쟁 자체를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는 그럴 자격조차 없다. 역으로 나는 앞서 말한 진영논리, 내지는 자주파니 평등파니 하는 구분들이 한때 역사적으로 유의미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지금 상황 속에서 그러한 구분의 유의미성은 상실된지 오래이다.

    앞서 말했듯이, 과거 운동권 내부에서 NL-PD의 축을 형성시켰던 ‘주체사상’은 그 사상적 힘을 북한 내부에서나 남한 내부에서나 상실하고 말았다. 황장엽의 죽음은 그러한 자명한 사실을 재확인시켜주는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종북논쟁’의 재탕이라고 할 수 있는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오히려 내가 탓하고 싶은 것은 정작 시대착오적인 종북좌파에 대한 고발을 주도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진보 사상가들이다.

    지금 상황에서 문제는 주체사상이나 북한의 체제를 신봉하고 있는 주사파들이 아니다. 소위 민노당 당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자주파라는 자들은 단지 북한정권을 내심 두려워하는 현정부의 관료들과 다를 게 없는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관료들이나 민노당 간부들이나 표현방식이 다를 뿐 북한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며, 이러한 자들에게서 일관된 ‘사상’을 추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이런 자들은 사상적 논쟁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 오히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나름의 사상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진중권과 같은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들이다. 어떤 사상적 입장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사상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유의미한 사상적 영향력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는 측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보다 ‘용감하게’ 과거 실천적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주체사상의 ‘합리적 핵심’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한반도에 있어 ‘주체사상’이 도대체 그 사상내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해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반성 없이는 북한문제에 대한 진보진영의 반성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 분명하게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무릇 ‘사상’이 ‘사상적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사상의 논리적 정합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그 사상이 기반한 민중적 생활감정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논리구성 상에서 더 정합적이고 현실적인 이론을 제쳐두고 일정한 비약과 모순을 품고 있는 이론이 상대적으로 더 실천적인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의 이론에 대한 징후적 독해가 개입해야 비로소 그 이론의 내적구성을 온전히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상이 기반한 민중적 에토스가 바로 그 사상의 합리적 핵심을 형성한다고 한다면, ‘주체사상’의 합리적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사회주의 변혁운동의 문제가 남북한 민중 모두의 문제이며, 분단 상황 하의 사회변혁에의 전망 속에서 남북한 민중이 모두가 일종의 ‘운명공동체’로 묶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한 사회 속에서 여전히 ‘민중’을 정치적 주체로서 호명해야 한다면, 그 민중에는 당연히 ‘북한’의 인민 역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한의 인민 모두가 동일한 목표를 향해 강렬한 민중적 파토스 안에서 ‘묶여 있는’ 한에서만 비로소 한반도 내에서 실천적 변혁사상이 유의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감수성 자체가 남한에서 받아들여진 주체사상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것이 냉전구도 속에서 고착된 분단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는 강한 유토피아적 열망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다시 주체사상의 의미를 진지하게 회고하는 것은 지금 남북한 모두에서 (단지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짓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북한에서도 주체사상은 이미 철 지난 유행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진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와 달리 지금의 고착된 분단상황에 대해 남북 양자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어쩔 수 없다’는 공통의 합의에 도달했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그러한 합의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분단문제가 국가관료들나 열강들이 아닌 당사자 민중의 처분에 맡겨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김일성과 당 관료들의 수사에 불과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남한 내 일부 운동부문에서 호응을 얻은 것을 단순히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함으로만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주장’을 담은 사상이 김일성으로부터 먼저 나왔다는 것을 유감스러워해야 할 따름이다. 따라서 주체사상이 무반성적으로 남북한 양측에서 사장되어버린 사태는, 동시에 분단상황에 대해, ‘그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논의될 문제이다’, ‘남북한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손 쓸 도리가 없다’라는 식의 상호양해가 양측의 지배계급에 의해 더욱 고착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러한 때일수록 주체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일파에서 그러한 ‘합의’를 돌파하고자 했던 시도가 지닌 본연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위험(이 위험은 단지 탄압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을 감수하고서라도 주체사상이라는 악명 높은 이론이 한때 변혁운동의 한 부문의 세계관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던 배경에 대해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일은 남한사회에 득세한 자유주의적 사고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우리 젊은 세대에 있어 더욱 요구되는 작업이다.

    4. 새로운 주체사상을 위하여?

    좋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현실을 모르는 ‘위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지금 내 이야기가 그렇게 들린다 해도 별 수 없다. 사실 주체사상과 그것에 경도된 NL 자주파의 세계관은 역사적 오류에 불과했으며 그것들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80년대 후반 당시에 막 엄마 젖을 뗐던 풋내기가 섣부른 말을 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훌륭한 진보적인 어른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 경험하는 ‘진보’라고 불리는 내부 판도의 상황을 보자면 이것이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전에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과거 80년대의 구시대적 유물보다 더 ‘퇴행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일전에 ‘진보의 종언’에 관한 테제를 제출한 바 있다. 계급적인 현실과 일정부분 동떨어진 측면에서 요청되는, 소위 ‘진보’적인 가치가 다수의 대중들 사이에서 ‘사상적인 힘’을 가지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다음의 사실, 더 이상 유의미한 방식으로 북한의 인민들을 정치적으로 ‘호명’하지 못한 채, 단지 진부한 반공주의적 관념 말고는 북한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도 개입하지 못하는 진보세력 자신의 사상적 무능력이다. (만일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면) ‘남북한 민중’ 모두에게 ‘분단’만큼 커다란 문제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 문제에 관한 주체적 기획을 모두 상실한 채 그것을 6자 회담 따위의 기술관료들의 논의에 모조리 내맡겨 버리고도, 그러한 방관자적이고 논평적인 입장에서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종언’을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사례가 아닌가?

    예컨대 민노당의 핵심간부들이 정말로 ‘자주파’라고 한다면 그들 자신이 북한세습 문제에 대해 북한 민중의 시각으로 접근하고자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았겠는가? 오늘날 ‘주체사상’을 새롭게 계승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닌가?

    진보적인 가치가 요청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나아가 그것이 민중을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로 호명하는 실천적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분단상황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위기에 처하게 된 것도 동구권의 몰락 이후 급변한 분단상황 때문이다.

    오늘날 분단상황 자체가 제 국가들에 의해, 단지 주변 열강들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당사자인 남북한 당국에 의해, 즉 당사자의 관료적 이성을 통해 보다 더 성공적으로 ‘경영’되는 지금 상황에서, 남북양자의 공통적인 민중적 파토스에 기반한 진보적 기획 전반이 파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논리에 불과하다. 그것만으로는 진보의 종언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진보가 ‘끝났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사태의 주체적이고 사상적인 측면에서이다. 만일 ‘진정한 주체사상의 관점’으로 이 사태를 비판하자면 보다 중요한 사실은 진보파들이 급변한 분단상황 속에서 남북한 민중 모두에게 새로이 요청되는 ‘영도적 사상’을 ‘주체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일례로, 진보적 사상가들이 북한 사람들을 보는 시각이 탈북자 인권센터나 선교단체에서 북한 사람들을 보는 동정적 시각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남한의 민중이 그들과 연대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감 자체를 그들 자신부터가 상실했다는 것이다.

    북한 사람들이 더 이상 ‘주체’로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지 폭압 아래 신음하는 불쌍한 백성들 이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분단상황 자체에 관한 남한 운동세력의 정치적 접근 역시 상황논리 속에서 – 혹은 정당정치의 논리 속에서 – ‘탈주체화’된 것이다.

    그러한 순간부터 북한 사람들은 ‘진보’를 자임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 조선일보의 논리와 매우 동일하게 – 의회 민주주의의 수혜를 받아야 할 벌거벗은 동물적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 불과한 게 되어버렸다.

    여기서 북한체제 문제에 접근하는 진중권 식 논리의 정치적 올바름이 노정하는 오류가 존재한다. 그의 대북관은 한 가지 무반성적 가정에 기초해 있다. 가장 큰 것이 북한정권과 북한 인민을 손쉽게 분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 좋았던 옛날 식 표현대로라면 ‘반민중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점에 관해서는 과거 구시대적인 NL들이 진중권보다 더 못할 게 없다. 오히려 ‘진보’를 자임하는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북한 정권을 마지못해서라도 지지하는, 그리고 더 나아가 김일성을 그리워하는 북한 인민들의 심정에서 어떤 최소한의 ‘주체성’을 인정했어야 한다.

    일견 북한 사람들의 처지에 절대적으로 동정적인 것 같아 보이는 그의 휴머니즘적 접근방식은 그 이면에서는 북한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자유의지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선교단체나 통일부 직원의 시각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대북관은 사실은 진보의 고유한 정치적 포지션의 상실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가 절감했어야 할 문제는 민노당이나 기타 등등의 단체에 아직도 잔존해 있는 구세대적 주사파들의 존재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자기만족적 비판을 수행하기 이전에, 북한인민들 자신의 주체적 요구를 재발견하고 이와 연대할 수 있는 고유의 진보적 개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러한 기획을 추구할 진보적 주체들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큰 위기감을 느꼈어야 마땅하다.

    여기서 나는 여기서 좀 더 ‘위험한’ 방식으로, 정작 진보세력 자신들이 방기하고 있는, 지금의 진보세력에 걸려 있는 위기 내지는 사상적 내기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싶은 유혹이 든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고유의 진보적 기획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남한 측의 새로운 ‘주체사상’을 ‘재발명’하는 것이 아닌가?”

    과거의 주체사상은 북한 측에서 제국주의적 종속 하에서 무력한 상황에 놓인 남한 민중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의 표명이었다면, 지금의 정세 속에서는 남한 내의 어려운 처지에 처한 ‘좌파’들이 똑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북한의 민중과 연대하겠다는 또 다른 형태의 ‘주체사상’을 ‘계승’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주체사상을 받아들이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고유의 좌파적인 개입의 형태를 재발명하는 것의 현실적 어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유로 그러한 기획을 방기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진보정치의 위기를 재차 실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5. 만일 북한정권이 붕괴한다면…

    최근 시사IN에 연재 중인 굽시니스트는 자신의 시사만화에서 북한정권 붕괴 시나리오에 대한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만일 당장 북한 정권이 무너진다고 한다면 거기서 가장 큰 혜택을 누릴 정치적 세력은 민노당도 민주당도 아닌 한나라당이라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굽시니스트 자신이 든 논거 (오랫동안 국가에 대한 종속과 노예상태에 길들여져 온 북한 민중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그 종속과 굴종의 형태에서뿐만 아니라 그 굴종에 대해 지배계급이 약속하는 보상에 있어서도 유사한 형태의 지배에 순응할 것이다, 등등) 외에도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는 따로 있다.

    현재 북한 체제 내부에 가장 활발한 개입을 시도하는 단체들은 다름 아닌 남한의 교회들과 연계한 국제 선교단체들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그들을 후원하는 보수 정치세력이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위안거리가 되지 못한다.

    최근에는 선교활동을 하던 한 한국계 미국인 청년이 죽음을 무릅쓰고 압록강을 넘어간 일이 뉴스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를 후원한 정치적 세력이 무엇이든 간에 만일 ‘사상적 힘’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와 같은 행위에서 실증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세력은 그를 비웃기보다는 오히려 더 칭찬을 해야 마땅했다. (게다가 이를 비웃는 것은 과거 북한으로 넘어갔던 학생운동가들을 비웃는 것과 섬뜩할 정도로 닮아 있지 않은가?)

    당장 북한정권이 무너진다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 혼란상에 누구보다 더 먼저 뛰어들어 상황에 개입할 사람들은 민노당도, 진보신당도 아닌 바로 그 선교단체들이다. 정작 북한 사람들 입장에서 ‘민족적 동질감’을 느낄 대상이 있다면 바로 그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과 그들을 이끌어온 종교적 신념, 그리고 그들을 후원한 보수정당과 대형교회일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정작 ‘진보세력’이 그러한 상황에 대해 전적으로 무력할 것이라고 너무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주사파들도, 주사파들을 그 동안 열심히 비판해온 사람들도 사태를 넋 놓고 방관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러한 사태에 대한 준비를 해오지도 않았으며, 정작 북한의 민중적 처지에 대해 선교단체들 만한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진보적 사상이 민중에 대한 혹은 민중으로부터 오는 신뢰감에서 출발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신뢰감은 이런 저런 남한 내부에서의 정치적 당위로서 뿐만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접근방식에서도 실증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지금 상황에서야말로 단지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왔던 ‘주체사상’을 그 사상적 측면에서 새롭게 재발명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이다.

    북한에 대한 ‘진보적 개입’은, 단지 의회민주주의를 결여한 데서 오는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흡수되지 않는 북한 내부의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을 촉발시킬 개입의 방식들을 모색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북한의 인민을 정치적-민중적 ‘주체’로서 새롭게 호명하는 연대의 방식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진보의 미래를 걸 작정이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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