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소득은 좌파적인가?
        2010년 10월 19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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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점화되고 있다.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진보세력 혹은 좌파세력의 피할 수 없는 의제가 될 이 기본소득의 모토란 바로 ‘모든 시민들에게 미약하나마 무조건적 소득을 지급하고, 시민들이 여기에 다른 소득을 더하여 총소득을 늘리게 하라’는 것이다.(필리에 반 빠레이스,「기본소득: 21세기를 위한 명료하고 강력한 아이디어」)

    국가가 정기적으로 시민들에게 현금을 지급한다는 점은 기존의 수급제도와 다를 바가 없으나, 이 모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소득이 자산조사나 근로조건 등의 기타 조건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급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지급대상은 바로 ‘시민’이다. 박원익이 지적했듯이 이런 발상은 보편적 복지의 개념을 시민권의 외연으로까지 확장하여, 시민권을 법적/제도적 권리영역을 넘어선 물질적 기본소득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려는 시도인 것이다.(http://blog.naver.com/paxwonik/40112769985)

       
      ▲ 사진=사회당

    모든 시민에게, 아무 조건 없이

    또한 이 모토는 소득의 지급은 물론 노동자의 총소득 증대까지를 포함하여 복지국가의 폐해라고 신자유주의자들이 공격하는 복지병에 대해(아무도 일하려 하지 않을 거야!!) 반박하고 있다. 즉 기본소득의 제안자들은 ‘노동하지 않음’의 원인을 ‘노동하지 않아도 생기는 소득’이 아닌, ‘노동해도 생기지 않는 소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기본소득은 좌파적인가? 다시 말해 기본소득은 이 사회에서 가장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아도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만큼 ‘충분히’ 급진적인가? 내 생각은, 한마디로 말해 ‘그렇진 않아도 해볼 만하다’이다.

    먼저 기본소득 논의가 맑시스트들에게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지점에 대해 논해보려 한다. 가장 중요한 논점은, 기본소득이 (복지국가 모델과 다르긴 하지만)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려 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보편적 복지’는 복지를 빈곤층에 대한 수혜가 아닌 모든 이가 누려야 할 권리의 차원으로 파악하여 이 권리를 보장받을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패러다임이다. 또한 이를 위해 시장에서 이루어진 분배로 인한 불평등의 결과를 제도적 차원에서, 더 나아가 사회 차원에서의 재분배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

    맑시스트라면 이러한 보편적 복지에 대해 여전히 사회적 부의 분배문제를 ‘분배’에서 해결하려 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모순이란 결국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문제인데 이것을 자유주의적인 ‘분배’의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00907141834§ion=02)

    분배적 복지에 대한 맑시스트들의 인식

    또한 ‘보편적 복지’ 담론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순, 즉 계급모순을 은폐하는 기능으로 작동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모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은폐가 동일한 매커니즘 하에 몇 가지 상이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하는데, 그 중 하나인 ‘모순의 희석’은 개량과 화해를 통해 근본적인 사회적 모순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해결책을 의미한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야권 세력에서 무상급식을 공약으로 내걸자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부자들에게도 무상으로 밥 주자는 공약’이라며 비난했다. 물론 한나라당이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것은 그 자체로 코미디지만, 이 말에는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는데 바로 ‘보편적 복지’라는 패러다임에 부자와 빈자라는 계급모순이 은폐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지 동맹’이라는 연합론은 한편으론 보편적 복지라는 담론이 얼마나 다양한 세력을 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면 한편으론 이것이 얼마나 많은 정치적 입장 차이를 은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이 ‘복지 동맹’에는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조차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박근혜마저 ‘아버지가 원한 것은 복지국가’라며 복지국가 담론에(!) 뛰어들었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박근혜의 복지는 ‘시혜적, 선별적 복지’라며 ‘보편적 복지’와는 다르다고 주장했으나, 문제는 ‘보편적 복지’라는 담론은 담론 자체가 보편적이어서 ‘선별적 복지’와 그것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박근혜가 다양한 성장 전략을 제시하고 이를 통한 복지 재정의 확충을 주장한다면 이는 증세를 외치는 것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일 것이다.(이상이 씨는 박근혜의 줄푸세와 복지국가가 모순된다고 했지만, ‘줄푸세와 복지국가’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박근혜의 최대 강점이 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15914)

    박근혜의 복지도 가능하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본소득을 지금-당장 실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기본소득이 공산주의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으로는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계급모순이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관계에서 나오는 모순을 의미하는 것으로 크게 1) 착취당하는 노동자, 자기 삶의 수준을 위해 필요한 이상으로 노동하고 그 잉여가치를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현실, 2) 소외된 노동, 자신이 행하는 노동과정과 결과에서 소외당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포함한다.

    이러한 계급모순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른 권력불균형에 근거한다. (에릭 올린 라이트,「기본소득, 사회적 지분 급여, 계급분석」) 우리는 기본소득을 통해 이러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일부분 완화할 수 있으며 조금 오버하자면 공산주의를 위한 혁명의 역량을 기를 수 있다.

    일단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필요 이상으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를 불신하는 좌파들에게 매달 80~100만 원이 주어진다고 생각해보자. 이 좌파들은 상품화되지 않는, 즉 시장 지향적이지 않은 생산적인 일에 기여할 수 있다.

    자립 음악가는 생계가 어려워 M.net에 자신을 팔지 않아도 되고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먹고 살기 위해 취업시장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고, 독립영화감독은 대자본에 자신을 맡기지 않아도 되고 이 땅의 20대는 우파 부모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립할 수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조금 더 꿈꿀 수 있고 조금 덜 절망해도 되며 조금 더 ‘한 때 철없던 시절의 운동’을 이어나갈 수 있다. 기본소득은 우리에게 고용관계에서의 탈출구를 제공해준다.

    조금 더 꿈꿀 수 있다

    이는 미래의 노동자들, 잠재적 노동자들뿐 아니라 현재의 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은 문제이다. 노동자들은 ‘짤릴 각오’를 하고서라도 자본가들과 투쟁할 수 있다. 파업하는 동안 겪게 되는 물질적 고통은 조금 더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되고, 노조는 조금 더 증대한 일반 노동자들의 참여로 그 조직의 힘을 늘려 불균형의 추를 조금이나마 균형에 가깝게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사회보장시스템의 구축으로는 생겨날 수 없는 ‘현금 지급’으로만 가능한 효과이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당장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양해 줄 마법의 칼은 아니지만, ‘해볼 만하고, 하면 정말 정말 좋을’ 기획이다. 그러나 이 기본소득 논의가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기본소득은 자유주의적 분배라는 담론에 포섭될 가능성이 높은 의제이므로, 좌파들은 그 안에서 계급적대라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드러낼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이는 기본소득의 재정 마련을 위해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자는 식의 문자 그대로의 ‘적대’를 넘어서, 기본소득이라는 논의를 등장하게 만든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적 모순에 대한 담론 투쟁을 의미한다.

    즉 기본소득은 결국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지양을 위해 도입된 제도적 해결책이라는 것은 분명히 하되, 그 모순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이며,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좌파적으로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와 관련되어 복지국가 모델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해야 한다. “왜 시스템 구축이 아닌 현금 지급인 기본소득이냐”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면 복지국가 담론에 휩쓸려 가버릴 것이다. 적대를 하든 연대를 하든, 무엇에서 연대할 수 있고 무엇에서 적대해야 하는 지를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세 번째는 (두 번째와 연계되어) ‘어떻게 집권할 것이냐’이다. 나는 의회주의적 발상에 별로 동의하지 않으나, 기본소득은 이를 실행할 강력한 국가 권력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공산주의 혁명의 역량을 다지기 위해서 기본소득은 50년 100년을 내다보고 실행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지속적인 권력 창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만일 특정 당이 그 역할을 한다면 그 당은 그들의 기반을 노동자계급에 두어야 한다.

    노동자계급과 국가가 자본가계급을 이중으로 압박해서 기본소득이라는 제도를 쟁취해야 한다. 이 연대는 또한 기본소득의 기능인, ‘혁명의 역량’을 위한 전초적인 연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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