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하바'를 찾아 떠나자
        2010년 10월 18일 08: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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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초딩 2년 우리 딸내미와 우리 동네 도서관 디지털 자료실에서 <미래소년 코난>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어제 코난과 라나, 그리고 포비가 ‘인더스트리아’를 탈출해 드디어 ‘하이하바’에 정착하는 과정을 보고 왔는데, 하이하바의 공동체가 예사롭지 않더군요. 인더스트리아를 탈출해서 도달한 평화로운 섬 하이하바가 무슨 뜻일까? 혹시 ‘하이 하버(high hobor)’의 일본식 발음이 아닐까 생각해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제 짐작대로 보다 이상적인 항구라는 뜻의 ‘하이 하버’가 맞았습니다. 빙고!

    미래소년 코난의 원작은 미국 작가 알렉산더 케이가 1970년에 발표한 『멸망의 파도 The incredible Tide』라고 합니다. 코난에서 설정이 바뀌긴 했지만 두개의 공간은 산업 문명의 도시 인더스트리아와 수백만 명의 소년 소녀가 환란을 피해 살아남은 하이 하버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랍니다(cafe.naver.com/miyazaki). ‘미래소년 코난’에서 인더스트리아가 자본주의의 지옥으로 그려졌다면 하이하바는 공산주의적 공동체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인더스트리아와 하이하바

       
      

    하이하바에서의 일상은 제게 뜻하지 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하이하바에 도착한 코난 일행은 노란 보리밭을 지나 풍차언덕을 둘러 보는데 보리를 빻아 빵을 만드는 공장, 대장간, 방직공장 등 하이하바의 공업지구를 안내하는 분으로부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도 있지"라는 이야기를 새겨듣습니다. 코난과 포비의 인상은 또 얼마나 진지하던지… 후훗…

    코난도 포비도 당연히 하이하바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 포비는 사냥을, 코난은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라나요? 라나는 원래 이곳 방직 공장에서 방직기의 북을 익숙하게 날리는 방직 노동자였더군요. 고기를 잡으러 간 코난이 가두리 양식을 하고 있는 어부와 나누는 대화도 인상적입니다.

    코난이 "이 많은 고기가 아저씨 거예요?"라고 묻자, 그 어부는 웃으며 "나는 농사를 짓지 않지만 보리빵을 먹고, 옷을 짓지 않지만 옷을 입고 있다. 대신 나는 고기를 잡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것들을 얻는다. 이 고기는 내것이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 것이기도 하다" 자본론의 사회적 생산 과정과 공공적 소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을을 내 손으로 만들고, 지켜내겠다는 ‘의지에 찬 다짐’도 담겨 있었습니다. 이곳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더 이상적인 항구인 하이하바인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노동의 교향곡이 울리는 듯 합니다.

    보리빵과 옷과 물고기

    이에 비해 인더스트리아는 한 줌도 안되는 지배세력이 관료제와 상비군으로 인민을 통제하며 2등시민, 3등 시민으로 나누어 산호세 광산과 같은 깊은 지하에서 노예 노동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더스트리아의 형식적 지배기구인 ‘위원회’를 무시하고 전횡을 일삼는 레프카라는 테크노크라트는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은 전쟁기계를 부활시키기 위한 야망에 사로잡혀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습니다. 인더스트리아는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의 악몽입니다.

    하이하바의 아름다운 풍광이 여전히 생생한 어제 저녁 내 귀를 의심할만한 충격적 소식을 들었습니다.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이 삼성전자와 공동대응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 삼성측 변호인들이 근로복지공단과 한패가 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도 칠레에서 33명 광부를 구출한 감동적 드라마의 여진을 전한 뒤에 이어지는 뉴스였습니다. 우리 정부는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 노동자들을 저 칠흑의 암흑에서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생존 루트를 폐쇄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삼성전자의 근로복지공단

    무오류, 무결점의 신화를 창조한다는 삼성전자. 그들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의 몸을 마치 부재료처럼 이용하고 결국 백혈병으로 시들어버리는 노동자들을 쓰레기 취급했습니다. 순결하게 태어난 인간이 삼성이라는 삼각탑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지는 인더스트리아의 디스토피아입니다.

    여기에 근로자의 이익을 옹호해야 할 근로복지공단은 삼성전자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충실한 하수인 구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이 삼성에 보낸 공문은 ‘소송 결과에 따라 사회적 파장이 클 것’을 우려한 대목이 있습니다. 백혈병 피해자가 무결점, 무오류의 삼성전자를 상대로 산재 인정을 받은 것이 걱정이었나 봅니다.

    산호세 매몰 광부들의 생환 드라마가 세계에 타전될 때 칠레의 우파 대통령조차 "칠레의 위대한 재산은 구리가 아니라 광부"라고 했습니다. 한국 근로복지공단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재산은 노동자가 아니라 삼성 반도체"라고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성의 인더스트리아로부터 우리를 하이하바에 데려다 줄 코난과 라나, 그리고 포비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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