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잡아먹어 봐라, 두환아"
        2010년 10월 17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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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한밤중 너의 가위질 소리를 듣는다 / 네가 끊어 내고 있는 것은 / 피가 묻은 욕망의 태(胎)줄 / 길다랗게 자란 부자유(不自由)의 가시덤불 / 너는 벽(壁)을 넘는다 / 한밤중의 내게도 오고 / 이 나라의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 아 날이 밝으면 / 삼손 너는 큰 소리로 울 수 있겠구나.” (이근배 시 ‘벽(壁) : 아우 근성에게’ 중에서)

    두 명의 사촌형

    위 시는 사촌형이 쓴 시다. 또 다른 사촌형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가서 무기징역 형을 받았을 때 쓴 시로 알고 있다. 당시에는 ‘아우 삼손에게’라는 부제를 달았었다. 감추어야 했으니까. 구약성경에 나오는 삼손의 이야기를 비유한 시다. 머리가 잘려서 힘을 잃은 삼손. 

    감옥 얘기는 그 정도로 하자. 이후 징역 1년 6월이 확정되어서 공주교도소에 있다가 83년 12월 23일인가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만기를 2개월 조금 넘게 남겨 두었을 때니까 1년하고도 3개월 정도를 갇힌 채 지냈다.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군사독재정권은 걸핏하면 특별사면 조치를 통해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 쉬운 일이었다. 또 잡아들이면 되니까. 내가 석방된 때를 ‘유화국면’이라고 했다. 감옥에서 나온 학생들을 복학도 시켜 주었다. 너무 많은 학생들이 감옥에 가기 시작하니까 전두환으로서도 부담이 된 것이다.

    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1983년 12월까지 학원사태로 제적당한 학생은 전국 65개 대학, 총 1363명이었다고 한다. 1983년 한 해만 327명에 달했다. 학생 시위 역시 1981년 56건에서, 83년 134건으로 크게 늘어났다. 감옥에서 나오니까 이미 많은 후배들이 생겨 있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올바른 외침은 또 다른 외침들을 계속 만들어 낸 셈이다. 나와 같이 평범하게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감옥으로 달려갔다.

    전두환은 무언가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인권탄압국가라는 이미지를 가지고는 다가오고 있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르기 힘들겠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이명박 대통령이 보여 준 “대운하를 하지 않겠다.” “민영화를 하지 않겠다.”고 ‘대국민 사기극’을 한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살인마의 은혜(?)

    그래서 나는 석방될 수 있었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도 있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살인마에게서 은혜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석방되자마자 우리는 모였다.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후배들도 있었다. 내가 감옥에 가 있는 1년 6개월 사이에 친구들과 후배들 10여명이 시위를 주동하고, 감옥을 다녀왔던 것이다. 대부분 1년 징역형이었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고 보고, 학교별로 ‘복학대책위원회’ 등을 구성했다. 우리는 학교에 복교하기 전에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요구했다. 몇 명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학교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공장으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전두환은 84년 10월 다시 경찰을 학교 안에 투입했다. 원래 사기란 오래가는 게 아니다. 

    전두환이 ‘유화국면’을 한다고 했지만 그 이면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전두환은 모두 다 감옥으로 보내기 힘들어지자 그들이 보기에 불온하다고 본 학생들을 군대로 강제 징집하기도 했다. 졸지에 군대에 끌려간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군대에서 학생들이 죽기 시작했다. 

    82년 7월 연세대생 정성희, 83년 5월 성균관대생 이윤성, 6월 고려대생 김두황, 7월 한양대생 한영현, 8월 동국대생 최온순, 12월 서울대생 한희철 등이 죽었다. 전두환은 보안사를 시켜 학생들의 머리에 들어 있는 ‘붉은 사상’을 푸르게 ‘녹화’해야 한다고 가혹한 탄압을 했던 것이다. ‘녹화사업’이라고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군대라는 밀폐된 공간을 이용하여 휴가 등을 이용하여 해당 학교에 있는 총학생회 및 운동권 친구를 찾아가 ‘정보를 물어오게’ 하는 프락치로 활용했던 것이다. 1981년 11월~1983년 말까지 447명이 그 대상자가 되었다. 이를 거부한 학생들이 의문의 죽음을 계속해서 당했던 것이다. 84년 5월 고려대에서 강제징집 당했다가 죽은 학생들의 합동위령제가 열려 이런 사실을 폭로했다. 

    가슴 아픈 죽음들

    그런 시대가 있었다고 기억하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픈 죽음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 두어야 한다. 물론 이런 사실들이 당시에 밝혀진 것은 아니다. 언론은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학생들"라고 우리를 비난했었다. 그러나 진실은 시간이 걸릴 뿐 밝혀지게 되고 만다. 

    부모님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좋았지만 하나의 씁쓸한 기억도 있다. 친척 중에 한 분이 축하한다고 오셨다. 그리곤 말했다. 

    “전라도 그 빨갱이들”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빨갱이라는 말은 정말 무서운 말이다. ‘빨치산’은 ‘파르티잔’이라는 말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말은 다른 나라에서는 욕이 아니라 억압에 맞서 비정규전을 치른 또 다른 부대를 얘기한다. 정규군인 군대에 맞서 투쟁한 사람들이다. 남미의 ‘체 게바라’ 같은 사람들이다.

    ‘빨갱이’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공산주의자와 빨치산 등을 한데 묶어 불렀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는 ‘찢어 죽일 적’일 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처형당했을까? 그런 무서운 표현을 광주에 대해서 썼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냐?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이제부터 정신 차리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다가 싸울 뻔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계속 치다보면 흔적이 남고, 그 흔적이 언젠가 바위도 깰 수 있다”고 얘기했지만 돌아보면 그건 단순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믿음이 ‘바위를 깰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가 되다

    그 살벌했던 전두환을 불과 20년도 안되어 감옥에 보낼 수 있었으니까. 전두환은 96년 1월 구속된다. 그 이후 나는 우리 역사를 보면서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뚜렷한 근거를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 왔다. 촛불도 그런 역사의 한 흐름이다. 

    감옥에서 나온 나는 공장에 갈 준비를 했다. 당시에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학생들의 힘만으로는 전두환을 물러나게 할 수 없다는 자각이 생겼다.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했다. 학생운동에 비해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시기였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장에 취업했다.

       
      ▲민주화의 길 1호. 표지. 

    통계에 의하면 90년 초까지 약 10,000명 정도가 공장에 갔다는 얘기도 있다. 학생들이 공장에 본격적으로 취직하기 시작하자 전두환은 공장에도 감시의 눈길을 돌렸다. 해서 자기 신분으로 취업하기가 힘들어서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위조하거나 빌려서 취직했다. ‘위장취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공장에 가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막 성장하고 있는 학생운동도 조금 지켜보아야 했다. 마침 그 때 선배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라는 곳에서 일해 보라고 했다. 민청련으로 불리는 그 조직은 내가 석방되기 직전인 83년 9월에 만들어진 청년 조직이었다.

    설립총회를 마치자마자 19명이 안기부의 조사를 받았을 정도로 탄압을 많이 받은 조직이다. 나는 ‘민주화의 길’이라는 기관지 1호를 만든 후 공장에 갈 준비를 하기 위해 떠났기 때문에 잘 모른다. 다만 두 가지 기억이 있다. 

    그 전에 잠시. 기관지 1호 표지에 대한 설명을 잠시 해야겠다. 두꺼비는 산란철이 되면 뱀을 약 올린다고 한다. 독사는 두꺼비가 독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선뜻 잡아 먹으려 하지 않는다. 두꺼비는 계속 약을 올려 결국 잡아 먹히고, 두꺼비 독에 의해 뱀도 죽는다. 두꺼비의 알은 뱀의 양분을 먹으며 그 안에서 성장한다는 민화가 있다고 했다. 표지는 전두환보고 우리를 잡아 먹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럼 다시 두 가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

    ‘감히’ 안기부 요원 멱살잡고 호통치던 이해찬

    어느 성당에서인가 모임을 가지려고 하는 데 안기부가 미행을 했다. 그런데 한 회원이 다가가더니 그 안기부원의 멱살을 잡으며 마구 혼을 내며 싸우는 거였다. 감히 안기부와 대놓고 싸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이란 사람이다.

    또 한번은 4.19 탑에서 기념행사를 하는 데 경찰이 치고 들어와서 최루탄을 쏘고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담을 넘어 가정집 장롱에 숨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민청련 회원 중 한 명이 집중구타를 당해 등의 실핏줄이 다 터져 병원에 엎드린 채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사람이 국회의원을 했던 장영달이라는 사람이다.

    민청련의 당시 의장은 김근태라고 경찰에 끌려가서 이근안이라는 사람에게 아주 심한 고문을 당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치떨리는 고문의 기록이 남아있다. 노무현 정부 때 장관도 하고 국회의원도 많이 했다.

    유시민이라는 사람도 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항소이유서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고, 너희가 읽는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그도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했다. 

    내가 왜 갑자기 사람들 이야기를 할까? 그들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우리나라 정치를 얼마 전까지 이끌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80년대 치열하고 영웅적인 투쟁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부의 요직에 있을 때, 그들이 국회의원을 계속하고 있었을 때, 집회 도중에 농민 2명과 노동자 1명이 경찰에 의해 맞아 죽었다. 집회 도중 경찰의 폭력에 의해 죽어야 했다. 대낮이었다. 

    그들의 정권

    그들이 국회의 다수를 차지했을 때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국가보안법도 폐지하지 못했고, 이라크에는 다시 우리 군인들이 파병되었다.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악법이 통과되고,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제약하는 법이 새로 생겼다.

    그들이 꿈꿨던 세상이 무엇인지, 그들이 국무총리와 장관과 국회의원을 수차례 하면서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잘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는 데 큰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들의 좌절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라는 얘기만 하고 넘어가자. 한편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은 이후 붙잡혀 감옥에 갔고, 석방된 이후 최근 반성하고 목사가 되었단다. 

    공장에 가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 직업훈련소를 찾았다. 3개월 동안 용접을 배웠다. “다른 기술을 모두 자르고, 베고, 나누지만 용접은 붙여먹고 산다. 세상을 붙인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배워라”라던 교사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 번도 기계 앞에 서지 않았던 내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미도 있었다. 3개월의 직업훈련을 마치고 이천에 있는 조그만 공장에 갔다. 큰 공장에 가려면 경험이 필요했다. 직업훈련소에서 배운 용접은 두꺼운 것을 붙이는 것이었다. 14mm 정도의 두께였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1mm 혹은 0.8mm 정도였다. 당연히 무척 힘들었다.

    용접을 하다보면 ‘아다리’라는 게 있다. 어떤 경우에는 용접불빛을 막아주는 바가지를 쓰지 못하고, 두 손을 모두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눈에 빛이 들어가는 경우를 말한다. 처음 아다리가 되었을 때 두 눈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쓰리고, 아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나오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경험자가 찾아와서 소주를 사주고, 사과즙을 낸 가제를 눈에 붙여 주었다. 

    “원래는 처녀 젖이 최고인데 처녀가 젖이 나오능감. 해서 사과즙을 썼네” 

    출근 3일만에 손가락 3개 잘린 선배

    과묵한 선배 노동자의 위안과 술에 취해서야 비로소 잘 수 있었다. 원래 용접에서 나오는 유독가스를 많이 마시기 때문에 용접공들은 돼지고기를 많이 먹는다. 해독작용을 한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낸 후 본격적인 취업을 위해서 반월공단으로 갔다.

    이미 서울 구로공단과 인천 쪽은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이 적기도 했고, 여자 선배 중의 하나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에 남자 선배 하나와 같이 자취방을 얻어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대문을 만드는 조그만 공장에, 그리고 그 선배는 프레스를 하는 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 선배는 출근한 지 며칠 안 되어 프레스에 손가락 3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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