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일가와 백혈병 노동자는 한 민족?
        2010년 10월 17일 12: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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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 학과의 일본학 석사과정에 계시는 한 학생 분은 일본을 중심으로 해서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중, 고등학교 인권 교육의 현주소에 대해 논문을 쓴다고 하여 제게 한국 국내의 사회, 도덕 교과서를 구해달라고 최근에 청을 한 적은 있었습니다.

    한국의 사회 도덕 교과서

    저야 그걸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지도 오리무중이었지만, 국내의 고마운 친우들의 덕택에 그 교과서들을 구해, 학생에게 주기 전에 본인도 쭉 읽어냈습니다. 물론 예상한 대로, ‘인권’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약자 보호, 소수자 보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집단(의 대표자/상위자)의 요구를 거절할 개인의 권리까지 거의 언급되지 않아, 이쪽(노르웨이)에서 생각하는 인권과는 아주 딴 판이었습니다.

    즉, 예컨대 교실에서 반말을 해대는 교사에게 "반말를 쓰지 마십시오, 공석에서 공적인 언어 형태를 쓰는 것은 공인으로서의 도리이입니다"라고 학생으로서 일갈하는 것도 당연한 인권이라는 사실을, 이 교과서를 다 읽어도 절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뭐, 인권을 집단 생존권과 집단 안에서의 약자 보호 정도로 이해하는 북한의 공식 담론과 대동소이한 것이니 놀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표피적인 부분이라든가 국제적 질서에서의 위치라든가 등등이 서로간에 다르지만, 남한 사회 운영의 기본적 원리가 많은 면에서 이북과 상통한다는 것은 제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바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본적 생리, 즉 보수적인 위계서열성 같은 걸 바꾸자면, 교과서 수정 정도도 아니고 젊은이들을 위시하여 현재도 미래도 빼앗긴 모든 이들의 대대적인 반란, 일종의 (민주적이고 미래 지향적)’문화 혁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자면 지금보다 훨씬 더 절박하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이들이 그 입장의 절망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인권은 그렇다 치고, 그 교과서들에서의 ‘민족’의 담론적 위치는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일단 1990년대 후반 이전의 교과서와 판이하게, ‘민족’ 정의에서 ‘단일’이라는 말은 삭제됐죠. 아무래도 남한 지배자의 국제적 위신에도, 남한 무산계층이 가면갈수록 피부색이 다양해지는 가시적 현실에도 맞지 않으니 그리 된 셈입니다.

    멋이 있어진 민족 이야기

    그리고 민족의 이야기는 다소 ‘멋이 있어졌다’고 하고나 할까, 가일층 복합화됐다고나 할까, 어쨌든 과거의 단순한 "우리 모두 한 핏줄"과 아주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한 교과서는 <상상된 공동체>의 앤더슨부터 과거의 민족주의 연구 대가인 한스 콘 등등까지 다 두루 인용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의 성장에서 시민사회와 언론자본의 역할까지 언급하는 등 거의 대학교재와 같은 냄새를 풍겼습니다.

    이 정도의 텍스트를 읽으면, 학생들이 아마도 ‘민족’과 ‘국민’이 다르다는 점이라든가, 근대적 민족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유관하다는 점이라든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진일보라고 호평할 부분이겠지만, ‘민족’ 이야기의 또 다른 부분들은 거의 예전 교과서 그대로이었습니다.

    한국 국민의 중핵으로 당연히 고대에 이미 그 형성과정이 시작된 ‘우리 민족’이 등장하며, 그 문화의 ‘우수성’, 그 ‘수난의 역사’, 그리고 우수하면서도 수난적인 역사의 당연한 귀결로서의 자본주의적 중진국인 남한의 발전과 ‘세계적 위상의 상승’, 또한 남한에 충성을 바쳐야 하는 ‘해외동포들의 뛰어난 활약’ 등등은 그대로 다 나타납니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이루었다는 남한은, 오천년 민족사의 절정이기도 하고, 그 민족적 우수성의 결정체이기도 하죠. 교과서 담론 속에서 말씀입니다.

    ‘계급’을 살짝 빼버린 이 ‘민족사’ 이야기는, 북한의 김일성 빨치산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걸, 굳이 따로 설명 안해도 자명하게 보일 듯합니다. ‘수난’의 주체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임진왜란 때에 백성들은 수난을 당해도 다수의 의병장과 공신 등을 배출한 재지사족(在地士族. 토착 양반들-편집자)들은 오히려 그 영향력을 증가시켰으며, 전후에 그 노비의 수를 많이 늘리기도 했죠.

    마찬가지로, 식민지 시대는 수확의 70%까지 소작료로 바쳐야 했던 소작인들에게야 수난이었지만, 마산 근방의 엄청난 땅을 사들여 그 소작인들이 수확한 쌀을 마구 일본에 수출했던 이병철이라는 와세다대 출신에게는 엄청난 기회이었죠.

    IMF가 수난이 아닌 국민도 있었다

    IMF는 ‘김삼식, 이영자’들에게는 수난이었지만,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비롯한 주요 재벌들은 지난 12년간 오히려 이윤율을 많이 늘렸다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우수성’의 정확한 뜻은 무엇입니까? 월성의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들을 보면 신라는 백성들에게 거두어진 쌀을 정확하게 재고 적는 우수한 필기 문화를 자랑했지만, 그렇다고 그 쌀을 빼앗기고 각종 전쟁에 동원돼야 하는 백성들은 과연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남한의 산업화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면들도 있지만(적어도 외국 재벌의 국내 직접 진출을 막았으니 정말 다행이지. 멕시코 꼴 나지 않았으니…) 무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산업 구조의 미래 전망은 깊어지는 세계공황 속에서 극도로 불투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도적 민주화도 평가되어야 할 면들이 많지만, 그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이북처럼 군인들을 4대강 공사에 동원시킨다면 아무래도 문제는 아주 심각합니다. 단순히 제도적 민주화만 가지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죠. 한 마디로, 삼성가부터 백혈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노동자 가정까지 다 뭉뚱그려 ‘민족’이라고 호칭하고 계급적 모순을 제외한 그 ‘역사’를 쓴다는 것 자체는 웃기는 일에 불과하죠.

    그건 다 그렇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문제는 남아요. 남한이라는 커다란 착취공장의 주인님들이 이 낡아빠진 ‘민족’의 틀에 왜 이렇게 애착이 깊을까요? 본인들이 여유가 날 때에 중세국어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휴가 때에 경주에 가서 첨성대 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퇴계의 제자처럼 투호를 즐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국제 귀족에게 ‘민족’의 용도

    다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익히고 성인이 되면 골프치고, 적당한 시기에 미국에 건너가 그 상류층 문화, 언어, 가치관을 철저하게 익히는 ‘국제 귀족’들인데 말입니다. 이들에게 ‘민족’은 과연 모슨 소용이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답변은 약 세 가지일 수 있습니다:

    1. 그렇지 않아도 주인님들이 이미 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 머슴들과의 ‘연대감 키우기’ 차원입니다. 즉, ‘민족’을 이용하여 머슴들에게 주인님까지도 "우리 모두 다"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걸 주입시켜야 하기 때문이죠.

    2. 해외 교포와의 관계 관리용입니다. 교과서들은 교포들의 충성이 오로지 남한 국가에 가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죠. 재미교민들에게 병역 등 남한 국가의 권위주의적 요소들이 무거운 짐이 되는 반면, 재중 교포들에게 남한 자본은 무자비하고 오만한 착취자 이상으로 보이지 않죠. 이 모든 모순들을 무마하기 위해 그 ‘민족’은 절실히 필요하죠.

    3. 북한 영토와 주민들을 확보할 명분입니다. 남한 지배자들이 이북의 ‘적화야욕’을 갖고 떠들지만, 북한이 약해질 경우 본인들도 분명히 그 영토와 남은 주민을 확보할 생각을 갖고 있는 모양입니다.(물론 대중 관계상 가능하다면)

    그쪽 자원도 있지만, 일단 고령화돼가는 남한 사회에 다수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편입돼야 중국 기업들과의 제대로 된 경쟁이 가능해질 것이지 않습니까? 흡수 통일과 같은 시나리오가 이루어진다면 이북 인구의 절대 다수가 거의 ‘세습 천민’이 되어서 대대로 남한 지배자들을 살찌워야 할 것이지만, 이 모든 야만과 모순들이 다 ‘민족’의 이름으로 합리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님들이 아무리 캘리포니아에서 집 몇 채를 갖고, 집에서 영어를 쓰고 추석 때에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에 가서 골프친다 해도, ‘민족’이라는 말을 교과서에 꼭 삽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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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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