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운동 '땡처리'할 시기가 온다"
        2010년 10월 15일 09: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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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전 쯤, 어느 호프집 화장실에서 양복을 잘 차려입은 아저씨가 시비를 걸어온 적이 있었다. “니들이 무슨 고생을 아냐”면서. 아마도 그는 자신의 뒷세대가 자기 세대보다 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억울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고생을 모르는 세대”에게 자신의 고생스런 젊은 시절을 가르치며 뽐내는 것으로 그 시절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반말 ‘찍찍’ 내뱉는 권리에 대하여

    여기서 당시 내가 실제로 고생을 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가 젊은이들에게 책임을 지울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고교시절, 아직 50줄이었던 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서 반말을 하고는 했다. 아버지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자식 같은 놈인데 어떠냐”는.

    시간이 지나고 세상이 달라졌을까. 대통령은 방송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일면식도 없는 수영선수에게 전화를 걸어 웃는 낯으로 반말을 찍찍 내뱉는다. 식당 알바에게 습관적으로 반말을 내뱉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반말로 길을 묻는다.

    “그들에게 그럴 권리는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당위와 현실은 다르다. 사실은 그들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 사회가 그 권리를 옹호하며, 또 권장하고 있다. 이 사회는 거대한 혈연가족의 형태를 미약하게나마 취하고 있다. 이걸 부정할 수 있을까. 사회는 그렇지 않은데, “그들이 개념없어서”라고, 그런 개인들을 돌연변이로 취급할 수 있을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격에 대해 어떤 지분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지배관계, 혹은 소유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소유관계가 친구나 애인, 혹은 부부와 같이 서로의 동의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동의와 관계없이도 발생한다면 그것을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부모자식의 관계라든가, 더 나아가 “자식 같은 놈”들과 “부모 같은 분”이라는 연령계층 사이에서도 보편적으로 발생한다면 말이다.

    만약 이 관계들이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이 글은 당신의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호하게 ‘백스페이스’를 눌러주기 바란다. 그러나 만약 조금이라도 부당하게 느낀다면, 다시 하나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지배 혹은 소유당하는 위치에 선 자는, “사회적 약자인가?”

    기성운동의 부름에 대한 ‘복창’

    지난 몇년간, 2007년 대선과 『88만원 세대』의 출간을 축으로 청년실업 문제가 하나의 화두로 떠올랐다. 청년실업이라는 짧은 말은 체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맹신해온 ‘인서울 4년제’를 졸업해도 노동시장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은, 분명 신분상승 사다리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분명 이것은 노동계급 전체의 보편적 위기이지, 청년이라는 계층을 청년이 아닌 계층과 대비시킬 수 있는 상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좌우를 막론하고 청년실업이 하나의 사회적 문제로 별 저항없이 다루어지게 된 것은 청년 당사자들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 다수의 현실인식에 대한 동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동기는 다르겠지만.

    88만원 세대 대변자를 자칭하고 나선 진보정당의 20대 총선후보들이 나타났고, 청년유니온을 비롯해 새로운 시기의 청년운동담론이 생겨난 점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입증한다. 그러나 그 모든 목소리들은 청년주체의 목소리라기보다, 기성운동의 호명에 충실한 복창에 지나지 않았다.

    “4년제 졸업한 청년들조차” 피할 수 없는 보편적 노동 불안정화에 대한 것이건, 혹은 “청년들 만큼은” 걱정없이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저연령층에 대한 온정주의 건 말이다. 청년의 세대적 특성은 그들이 처한 사회적 모순으로 정의되기보다는 상표로 전락했다.

    주체를 가장한 역량으로 호명된, 그리고 상표로 전락한 청년이라는 이름이, 역량으로서는 충실한 값을 했을까? 글쎄. 임금노동의 불안정화 등 보편적 문제들을 세대적 특성으로 간주하는 방식은 보편적 문제에 대해 선별적 해답을 도출하도록 요구했다.

       
      ▲청년유니온이 주최한 ‘청년실업 극복 콘서트'(사진=청년유니온 홈페이지)

    ‘청년’ 브랜드의 ‘신상’

    그 불가능한 지향은 결국 이미 기존 노동계급의 요구에 “청년”이라는 ‘씰’을 붙인 가짜 신상품을 양산해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오는 다시 역풍을 불러오고 있다. “청년”이라는 화두가 의미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세대분열을 조장하는 반동적 행위라는 비판 말이다.

    결국 청년을 호명한 이들과 호명에 부응한 청년운동은 이상한 합작품을 내고 말았다. 맞다. 이건 처음부터 합작품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합작품이 오작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세대의 문제가 존재하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하기 위해서.

    맞다. 그것은 완벽한 오작동이었다. 이들이 주장한 모든 문제는 청년을 주체로 보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 흐름들은 결연히 혈연가족사회의 존재를 외면해왔고, 그러면서도 세대적 계급을 자칭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어느 진보정당의 모 캠퍼스 학생위원회는 “대학생은 사회적 약자다”라는 자극적인 슬로건을 내기도 했지만, 대학생을 사회적 약자로 만드는 사회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청년”이라는 전선을 쳐두고 있을 뿐, 전선 건너편에 대한 공격은 절대로 시도하지 않는 운동이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노사화합”이란 슬로건으로 집회를 하는 노동조합의 모습과 닮았다. 청년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주워들라는 윗세대의 요구도 그 사회적 관계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다.

    하나의 역량으로서 청년을 호명하지만, 주장하는 것은 보편의제다. 물론 그것들은 “청년실업”이니 “청년빈곤”이라는 다분히 사기적인 “청년” 스티커를 통해 부문 의제로 멋지게 둔갑했다. 그것들을 “청년의 목소리”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 목소리의 주인들이 청년들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어도.

    청소년 ‘사육’을 정당화하는 사회

    세대적 권리를 주장하는데에 그들이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이 세대적 갈등 자체가 조작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저연령층에 대한 억압을 지적하고 그것에 반대해왔던 운동은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주로 “청소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소년운동들 말이다.

    그 운동들은 주로 학생 인권이나 학교의 문제들을 지적하는 동안만 부각되며, 세대의 보편적 갈등이 아니라 환경적 요인에 의한 갈등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왔지만, 실제로 소년운동의 의제에는 언제나 노동권의 문제와 자립권의 문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탈학교·탈가족 청소년의 권리 문제, 후견인의 강제 등 재산처분권과 가족구성권의 문제들은 언제나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주류 운동에서 하나의 인권적 의제로 취급받지 못했다. 주류운동은 학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훈육의 합리성을 중심에 두었고, “소년의 권리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가 아닌 “소년의 권리를 얼마나 덜 비정하게 억압할 것인가”에 시선이 맞춰져왔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가정 혹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 때때로 둔기를 사용한 – 폭력들에 ‘체벌’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등급을 매기고, 기존의 가족으로부터 탈주하는 청소년들에게 ‘가출’이라는 말을 부여해 청소년에 대한 사육을 정당화하는 문법은 소위 진보적이라는 공간 안에서도 당연하게 쓰여왔다.

    민법은 후견인이 소년의 재산처분권은 물론 그의 인격권과 노동권, 이동의 자유와 주거의 자유까지 특정수준 안에서 제한하고 몰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우리의 진보적인 부모들과 진보적인 교사들은 각자의 권한영역 안에서 소년들을 좀더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권리가 없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세상에는 착한 고용주도, 착한 정치인도 당연히 존재하는 법이다. 그래서?

    사회가 강요하는 차별들

    청소년의 문제가 만약 제도적으로 부모에 의해 사육(나는 이 표현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되고 있는 것이라면, 청년의 문제는 뭘까. 비혼의 청년들은 민법적 구속의 테두리에서는 벗어났으나 여전히 기존의 관계를 강제하는 사회적 구속하에 있다.

    비혼의 청년이 학업 등의 이유없이 별개의 가구를 구성하는데에는 여러가지 제약이 따르며,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정상가족’의 틀을 벗어나는 순간 복지에서도 벗어난다. 심지어 가구를 구성하기 위한 기본적인 주거 마련에도 제약이 따른다.

    우리가 만약 실질적 가족구성권을 청년세대의 의제로서 인정한다면, 한국사회로부터 그들이 “정상가족”을 문화적 뿐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강요당하고 있다는 점을 모른 척할 수 없다. 35세 미만 1인가구에 대한 국민주택기금 수요자 불인정 문제, 근로장려세제의 자녀부양조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 등, 이성부부와 혈연자녀로 이루어지지 않은 예외적 가구들은 명확하게 복지로부터 배제되어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 청년에게 사회가 강요하는 차별은, 결혼을 하지 않고는 스스로 가구를 이룰 자유가 제한되며, 가구에 대한 급부가 부모에게 제공됨으로써 부모의 지배를 일정 정도 받아들여야한다는 점이다. 청년이 처한 사회적 위치는 소년과 양적으로는 다르되, 질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청년"은 분명 같은 차별을 당하고 있는 "청소년"이란 계층 안의 소집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큰 운동의 틀 안에서 상대적으로 더 소수자들이 독립적 자세와 내부 견제를 유지하는 보통의 방식과 달리, "청소년" 문제 안에서 상대적 강자인 "청년"이 분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년"에 대한 배제는 "소년 문제에 대한 배제", 즉 청년이 청년 스스로의 문제를 포함한 "청소년 문제"를 배제하게 만든다. 이는 청소년 내부에서의 청년에 의한 소년 차별이며, 더불어 연령차별을 정당화하는 모순적 상황을 만든다.

    청년에 의한 소년 차별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청년"이라는 이름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청년 운동이 소년 운동을 포괄하지 않는 이상은, 또 자립권과 가족구성권, 재산처분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은 오작동을 계속할 수 밖에 없거나, 일종의 비주체적이고 헌신적인 역량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하는 것들, 정상가족의 강요와 독립 불가능성을 직시해야 한다. 소년운동의 의제를 포괄하고, 사회진입 비용에 대해 사회에 요구하고, 실질적 가족구성권을 요구해야 한다. 개인이 아닌 가족을 기준으로만 책정되는 사회보장에 대해서도 대안을 이야기해야 한다. 기본소득 얘기냐고? 맞다. 안될 거 있나?

       
      ▲김슷캇 블로그 이미지. 

    청년운동이 소년운동을 포괄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20년대에 어린이의 경제적 해방과 윤리적 해방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며 선포된 ‘어린이날’을 조직했던 것도 결국 청년운동이었음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또 다수의 청년들이 ‘청소년 운동가’로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음을 모른 체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교육감 선거 당시, 청소년 운동가들이 벌였던 “기호 0번 청소년 교육감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벌였다기 보다는 질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른들만의 정치”를 끝장내겠다는 구호를 들고 나온 그들은 “생리, 임신, 출산, 양육 휴가”라느니 “학생 임금, 청소년 기본소득”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요구들을 거침없이 하고 있었다.

    이 주장들은 분명히 사회에 대한 요구였지만, 그 전선 건너편에서 기존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충실히 해온 사람들이 있었다. 사육자들이다. 청년은 사육자와 사육당하는 자의 경계에 서있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그들이 어느 쪽에 포함되기를 선택하건, 여전히 일정한 물음들에 대해 답할 필요는 있다.

    지금, 여기의 전태일

    어차피 기성세대에 결코 각을 세우지 않으면서 사회보편의 문제를 마치 세대적 특성을 가진 의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청년운동들은 슬슬 헤드라이트에서 비껴나고 있다. 청년을 부르는 목소리들은 확연히 줄어들었고, 그 말에 반색하는 이들도 없다.

    끝물에 찾아온 ‘전태일 40주기’라는 성수기를 지나면, 청년이라는 상표를 단 운동의 조류들은 떨이로 팔려나갈 운명이다. 부인할 수 없는 땡처리의 시기가 온다. 전태일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유인물이나 책 등에서 자주 써먹는 전태일이 어린 여공들에게 차비로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걸어다녔다는 일화 말이다. 그가 결국 누구와 함께하고 있었는지, 또 지금의 전태일(이고 싶어하는 이)들은 누구와 함께 서있는지 고민해보는 것도 필요한 것 아닐까.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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