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핵 뿌리’, 미국의 대북 협박에 있다
        2010년 10월 14일 09: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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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핵 위협은 북한에게 핵무기를 개발·보유할 구실을 주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친북주의자의 주장처럼 들리겠지만, 위의 발언은 일본 외무성에서 핵군축 및 대북정책을 담당했다가 현재는 캐논글로벌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미네 요시키가 미국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것이다. 이 통신은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들을 분석해 “1950년대부터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반복적으로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해왔고, 계획해왔으며, 위협해왔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AP 통신의 보도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미국의 비밀해제된 문서를 통해 많은 연구자들이 밝혀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P의 상세보도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오늘날 한반도와 동북아는 물론이고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북핵 문제에 대해 보다 균형적이고 역사구조적인 이해의 필요성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11차례의 연재글을 통해서 밝혔듯이 ‘북핵의 뿌리’는 한국전쟁 때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미국의 대북 핵 위협에 있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하고 나선 오바마 행정부마저도 핵선제 공격 대상에 북한을 계속 남겨두었고, 최근 한미동맹은 핵우산를 비롯한 확장 억제를 강화하기 위해 별도의 협의기구까지 만들었다. 과연 이러한 핵 패권주의를 유지·강화하면서 ‘북핵의 뿌리’를 캐낼 수 있을지 강한 의문이 드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왜 핵 공격을 안했는가?

    한국전쟁은 미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정전협정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Mark W. Clark)는 1954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나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한 최초의 미군 사령관이 되었다는 부끄러운 이력을 갖게 되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15만명이 넘은 미군 사상자를 냈을 정도로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미국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당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혹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존 루이스 가디스는 트루먼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북한 내에 핵무기를 투하할 만한 마땅한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상 대도시나 대규모 산업시설, 군사기지 및 보급로 등이 핵공격 대상이지만, 북한에는 이러한 것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는 중국을 응징하고 추가적인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중국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도 고려되었으나, 이는 소련의 개입까지 야기하면서 유럽으로까지의 확전을 비롯한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있었다.

    셋째는 핵무기 사용이 진지하게 고려되었던 1951년 상반기에 유엔군의 반격이 본격화되고 서울을 재탈환하는 등 전선에서 일정 정도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핵무기 사용의 시급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트루먼 행정부가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핵무기 보유량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개전 당시 292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었지만, 그 핵심 역할은 소련의 미국 본토 공격 억제와 미국의 사활적 이해가 걸려 있던 유럽에서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는데 주어졌던 것이다.

    더구나 이 정도의 수량으로는 유럽을 방어하고 억제 실패시 소련군을 격퇴하는 데에도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에 따라 당시 한반도를 중요한 지역으로 간주하지 않은 미국은 이 지역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여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차관보였던 맥네일(Wilfred J. McNeil)의 회고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그는 펜타곤의 강경파들과 달리 “육군과 공군의 상당수 인사들은 한반도에서 원자폭탄 사용을 고려한 트루먼 행정부의 방침에 반대했다. 미국은 소련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에 대응할 충분한 분량의 핵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부 장관이었던 페이스(Frank Pace Jr.)는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 사용을 지속적으로 검토했지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한국전쟁은 원자폭탄 사용이 요구될 만한 전쟁이 아니었고 생산적인 결과도 자신할 수 없었다.” 둘째는 “작은 나라를 상대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인 부담을 느꼈다.” 셋째는 “만약 원폭 투하가 비효율적인 것으로 드러나면, 유럽 방어에 있어서 원자폭탄의 기능은 최소화되거나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핵무기 불사용 이유에 대해서는 피커링(Trent A. Pickering)이 비교적 자세히 정리했다. 그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거나 못한 이유를 6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북한의 남침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고, 미국이 동북아에서 핵무기를 소진하면 동북아보다 훨씬 이해관계가 큰 유럽에서 소련에게 밀릴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에는 핵무기를 투하할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개전 당시 군사 및 산업 시설 자체가 미비했고, 개전 이후에는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대규모의 공습이 진행되어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100만회 이상 공습을 단행했고, 이에 따라 북한에는 “폭탄으로 날려버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북한 지형의 80% 가까이가 산악지형이라는 점 역시 핵무기 사용 효과를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간주됐다. 

    셋째는 영국 등 유럽 동맹국들의 반대도 한몫했다. 대표적으로 트루먼이 중국군의 참전 직후인 1950년 11월말 기자회견을 통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자, 영국 수상 애틀리는 부랴부랴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루먼을 만류했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들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원폭 투하가 확전을 야기해 유럽 방어에 차질을 줄 수 있고, 또한 소련의 핵보복이 유럽에까지 미칠 수 있다는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넷째는 1949년 8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은 자신의 핵공격이 소련의 핵보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갖기 시작했다. 개전 당시에는 미국이 압도적인 핵 우위에 있었지만, 소련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핵무기와 전폭기 수를 크게 늘렸다.

    이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미국 본토가 소련의 핵공격에 취약하다고 인정했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53년 1월 소련의 핵 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미소간의 핵군비 경쟁은 본격화되었고, 역설적으로 ‘공포의 균형’이 나타나면서 핵전쟁을 억제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냉전시대 미-소 양국의 핵전략이었던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의 역사적 뿌리로 작용한 셈이다. 

    다섯째는 트루먼 개인의 거부감이다. 일본을 상대로 최초로 핵무기를 사용한 바 있는 트루먼은 “원자폭탄은 민간인을 대량살상할 수 있기 때문에 독가스나 생물무기보다 훨씬 사악한 무기”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은 핵무기는 ‘승전의 무기’인 동시에 그 무기를 또 다시 사용하는 순간 ‘도덕적 패배자’가 될 것이라는 상호충돌적인 인식을 트루먼에게 안겨준 것이다. 

    끝으로 당시 미국은 원폭 투하의 결과로 중국과 소련으로 전선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고, 확전시 이들 나라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즉, 원폭 투하는 ‘3차 세계대전 예방’이라는 본래의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았고, 미국은 3차 세계대전을 수행할 능력도 부족했다.

    이에 따라 트루먼 행정부보다 핵 공격에 훨씬 적극적이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공산군에 대한 핵 공격 ‘디 데이(D-day)’를 1954년 5월로 잡았다. 그 사이에 핵 전력을 비약적으로 증대해 소련의 핵 보복에도 대비하겠다는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D-day 10개월 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국의 핵 공격도, 이에 따른 ‘글로벌 아마겟돈’의 위험도 현실화되지 않았다. 

    NSC-68와 세계 냉전의 고착화

       
      ▲ 북한이 개발한 노동미사일과 대포동 1,2호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 일컬어진다. 미국이 파시즘으로부터 자유세계를 구원했다는 2차 대전과 미국이 역사상 최초로 패배한 베트남 전쟁 사이에 끼어 있는 수준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미국 현대사의 전환점이었다. 베트남 전쟁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인도차이나 반도 개입의 토대를 제공했다.” 

    이러한 분석이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가 있다. 1950년 4월 트루먼에게 제출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68) 문서는 한국전쟁을 포함한 냉전사에서 각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문서는 미소 냉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48년부터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봄까지 변화된 국제정세에 대한 미국의 인식 및 대응 전략을 집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수십년간 미국 안보전략의 토대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소련의 군사 모험주의를 경고한 NSC-68의 예언을 입증한 것처럼 간주되어 트루먼의 신속한 개입 결정의 전략적 근거가 되었다. 반대로 한국전쟁은 NSC-68 승인을 꺼려한 트루먼의 마음을 돌려놓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 주미 캐나다 대사인 롱(Hume Wrong)은 50년 8월 1일, “한반도 문제의 최선 결과는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미국의 책무를 가능케 하는 군사력을 만드는데 그 짐을 짊어지는 것을 동의하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서의 채택 즈음, 미국은 국가안보를 둘러싼 백가쟁명이 벌어지고 있었다. 트루먼은 군비 ‘억제’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지만, 49년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의 공산화가 연이어 발생하고 50년 2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한 훅스(Klaus Fuchs)가 체포되면서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 광풍이 일어났다.

    ‘안보파’로 분류된 애치슨 국무장관과 니츠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이 ‘경제파’의 핵심인 존슨(Louis Johnson) 국방장관을 따돌리고 NSC-68 작성을 주도했다.

    핵심적인 요지는 이미 원자폭탄을 손에 넣은 소련이 머지않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해 1954년에는 미국에 선제공격 능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특히 54년까지 미국에 대한 핵 선제공격 능력을 확보한 소련은 미국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핵 위협을 가하면서 유럽을 침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러한 위협 인식을 바탕으로 이 문서는 미국의 군비증강 및 대대적인 핵 전력 증강, 동맹국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 확대, 정보 능력 및 선전전 능력 강화 등으로 권고했다. 그러나 경제와 복지에 우선순위를 두고 미국의 지나친 군사주의를 경계한 트루먼은 NSC-68 승인을 유보했다.

    바로 이 시점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사장될 위기에 처한 NSC-68를 구해냈다. 안보 시험대에 오른 트루먼은 50년 9월 NSC-68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존슨 국방장관을 해임하고 조지 마셜을 기용했다. 동시에 NSC-68도 공식 승인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대리전으로 인식한 트루먼 행정부는 NSC-68를 통해 소련 위협에 대처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소련이 냉전 체제에서 미국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그가 조속한 종전보다는 정전 협상 지연을 선호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스탈린의 기대와 다르게 나타났다.

    미국은 한국전쟁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구적 차원으로 공고해진 냉전 체제에서 대소 봉쇄 정책 및 유사시 승리할 수 있는 군사력 건설과 동맹 체제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NSC-68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군사비도 대폭적으로 늘렸다. 그리고 유럽에서 서독의 재무장을 추진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강화시켜 나갔다. 동아시아에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및 일본의 재무장을 통해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동맹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전범국이었던 서독과 일본의 재무장을 통해 동서 양쪽에서 소련에 대한 포위와 봉쇄망을 강화시켜 나간 것이다. 

    ‘북핵의 뿌리’를 캐내기 위하여 

    이처럼 한국전쟁은 세계사의 중대 분수령이었다. 여명기에 있었던 세계 냉전체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본격화되었고, 인류 생존을 담보로 한 미-소간의 핵군비경쟁도 격화되었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핵무기를 ‘종이호랑이’에 비유했던 중국은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핵무장에 성공했고, ‘일성양탄(一星兩彈)’, 즉 하나의 인공위성과 두 가지의 핵폭탄(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현대화의 군사적 토대로 삼았다. 미국은 공산군의 재래식 공격에도 핵무기로 보복한다는 ‘대량보복 전략’을 천명하고는 한국과 유럽에 대거 핵무기를 배치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세상도 많이 변했다. 한국전쟁의 핵심적인 교전 당사자였던 미국과 중국은 1970년대 들어 전격적으로 관계 정상화에 나섰고, 중국은 이에 힘입어 개혁개방을 선택했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했던 레이건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와의 수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냉전 종식의 길을 텄다.

    미-소간 냉전 종식에 힘입어 아버지 부시는 한국에서 전술핵무기를 철수했고 이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남북 기본합의서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터진 한반도 핵 위기는 20년 가까이 한반도를 짓눌러온 악재로 작용해오고 있다.

    문제 해결의 기회가 여러 차례 유실되면서 한반도는 북한의 ‘핵 억제력 강화’와 한미동맹의 ‘핵우산 강화’가 맞서면서 지구상에서 핵전쟁 발발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로 분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거꾸로 이제야말로 ‘북핵의 뿌리’를 캐내는 것이 대단히 시급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뿌리는 바로 한반도 정전체제에 있고, 정전체제의 핵심에는 60년 동안 지속되어온 미국의 대북 핵 위협이 있다. 북핵의 뿌리를 캐낸다는 것은 이러한 한국전쟁의 유산, 냉전시대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핵이 진정 존재론적 위협이고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에 사활적인 이해가 걸려 있다면, 한미동맹도 그에 걸맞은 대담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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