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심히 일하면 부자 되는줄 알았어요”
    By 나난
        2010년 11월 03일 03: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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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저는 열심히 일만하면 부자 되는지 알았어요.”

    빨라진 작업속도에 비질 땀을 흘리며, 80만 대째 ‘모닝’을 만들고 있던 나이 어린 동료가 히죽히죽 웃으며 내게 말했다. 한 달에 150만 원. 이중 100만 원 이상을 적금 붓는 그는 음료수 한 번 안사는 지독한 짠돌이였다. 일주일에 60시간 일한 것도 게으르다고 생각해서인지 일요일에 있는 청소특근까지 빠지는 일이 없었다.

    종교無, 취미無, 오락無, 연애無인 그가 유일하게 밝은 얼굴을 내미는 날은 월급이 들어오는 매달 15일이었다. 부랴부랴 퇴근하고 좁은 현금CD기에서 통장에 찍힌 잔고를 보는 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의 가장 큰 기쁨의 날이었다.

    어린 친구가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 죽어라 일만한 게 억울해 죽겠어요. 오늘 술이나 먹어요. 내가 쏠게요.”

    뭐가 그렇게 억울할까? 정규직에 비해서 급여나 노동조건이 열악한 것이 억울할까? 아니면 일도 안하고 놀고먹는 바지사장들 꼴보기 싫어서 억울할까? 죽어라 일해서 월급을 떼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술을 한잔 들이키며 정리되지 않은 불만을 들어보았다.

    “모닝은 진짜 잘 팔리는데 어쩐지 이상하더라고요. 그렇다고 눈 딱 감고 아무리 특근 뛰어도 생각만큼 돈이 되질 않아요. 3년 동안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네.”

    모닝을 만드는 동희오토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삶의 방식은 이렇다. 어차피 돈도 안 되니 막 쓰고 막 놀자라는 식과 어떻게는 잘 살아보려고 허우적대며 소비를 줄이고 노동을 늘리는 방식. 그런데 두 번째 방식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라는 게 씁쓸하다. 뼈 빠지게 일을 해서 돈을 모은다고 직업을 바꿀 만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 자료=금속노조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집 한 채를 산다고 하더라도 어느덧 장가갈 나이가 되어 가정을 꾸린다면 돈 들어갈 곳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그러면 계속해서 잔업과 특근에 허우적 될 수밖에 없고,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해고가 되지 않을까 회사 눈치를 봐가며 더욱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은 잘사는 사람은 드물고 잘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즐비하다.

    나도 허우적거리기 싫어 민주노조활동을 시작했다. 부당한 대우를 선전물로 뿌리고 회사동료들을 조직해나가기 시작했다. 입사한 지 6개월도 안되었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를 해주었다. 절판된 『전태일 평전』 4권을 어렵게 구해 현장 동료들에게 주었다. 반응은 내가 느낀 감정과 같았다.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하며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결국 회사 관리자들이 책을 몰래 회수해 갔지만 많은 동료가 돌려보았다는 것에 만족했다. 무슨 이유때문인지 두세 달 사이에 내가 일하던 업체의 분위기는 반 바지사장, 반 어용위원장으로 흘러갔다. 달아오른 분위기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일했던 도장반 업체는 현장유인물 홍수가 되었고 조반장들도 현장의 힘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임단협 직권조인에 항의하며 어용위원장에게 사퇴하라며 주먹다짐까지 하는 일도 발생했다. 결국 어용위원장은 순전히 현장노동자들의 압박에 의해 회사를 그만두었고 업체사장은 현장을 통제하지 못하는 책임으로 하루에 5번씩 원청사무실에 올라가 조인트를 까였다고 한다.

    현장의 분노와 기세가 한창일 때 회사에서는 비정규직의 최대 약점인 업체폐업과 계약해지를 무기로 들고 나왔다. 노조탄압에 능숙한 동희오토에 맞서기에 우리 업체 동료들은 경험과 용기가 부족했다. 현장은 얼어붙기 시작했고 그 틈을 노리고 구사대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결국 나 자신도 계약해지를 막지 못하고 지금까지 양재동 현대기아 본사 앞에서 해고자 투쟁을 전개 중이다.(11월 3일,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은 회사 측과 조인식을 갖고 공장 복귀를 약속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현장 동료들이 회사를 상대로 뭐를 믿고 그렇게 까불었나하는 생각도 든다. 길게는 5년 동안 일하던 동료들이 하루 이틀 회사의 부당함을 당한 것도 아닌데, 왜 그 시기에 현장투쟁들을 이뤄냈는지는 크게 고민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 분명한 것은 민주노조운동의 기본인 1)생각하는 것 2)행동하는 것의 조건을 당시 동희오토 해고자들이 충족해 주었다. 미디어와 선전물, 선무방송을 통해 동희오토 노동자들이 어떻게 판단해야 되는지를 알려주었고 중식집회 투쟁, 현장 진입투쟁을 통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보여주었다.

    올해가 전태일 열사 40주년이라고 한다. 40주년을 기념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지들도 지금의 노동현실에 대한 죄스러움이 앞설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는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사업장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법을 이용해 노동조건을 후퇴시키는 방법을 자본가와 정권들은 일삼고 있다. 비정규직, 전임자임금지급금지, 단협해지, 파견법확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동희오토 같이 100% 비정규직을 편법적으로 운용하는 사업장도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그룹 앞에서 농성을 벌인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자료=금속노조)

    이제 전태일은 없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가 무엇을 하라고 우리에게 손짓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다. 비정규직 철폐하자!라는 구호를 수천 번 외쳤지만 아직까지 비정규직은 줄지 않고 오히려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면 비정규직 철폐의 꿈은 꿈으로만 남을까?

    우리의 미래를 알 순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비정규직은 국민의 절대 다수가 되어버렸다는 것. 이것은 40년 전 평화시장의 시다공들이 지금의 시대 산업전반에 걸쳐 비정규직이란 이름의 명찰을 달고 미싱을 돌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답답한 현실이지만 실망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평화시장이 생겨난 것처럼 제2의 제3의 전태일도 나타지 않을까.

    앞서 어린 친구가 억울하다는 것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꿈(잘사는)을 지금의 처지로는 이뤄 낼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는 것이다. 이제 이 친구는 동희오토에서 민주노조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노동자로서 의식을 성장해 나가고 주변 인물들에게 전태일을 알려 나갈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제주도부터 서울까지 평화시장의 수많은 전태일을 찾아내기만 하면 비정규직 철폐는 물론 탐욕스런 자본을 끝장내는 총자본 대 총노동의 대투쟁을 승리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 주최로 3일 개최된 ‘전태일 열사 40주기 대토론회-전태일을 말한다, 전태일이 말한다’에 발표된 김주원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교선부장의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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