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해고자다. 세 아이 아빠다
    22번째 죽음, 나는 도망을 쳤다"
    [투고] "19일 오후 4시, 세 아이 손잡고 여러분 기다리겠습니다"
        2012년 05월 15일 09:34 오전

    Print Friendly

    나는 세 아이의 아빠다. 10살 큰딸과 8살, 4살의 아들을 둔 세 아이의 아빠. 그리고 나는 쌍용차에서 해고된 해고자 아빠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반응은 보통 두 가지다. “아이고~” 또는 “어떻게?” 뭘 그렇게 많이 낳았냐는 놀라움의 ‘아이고’와, 아이들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걱정해주는 의미의 ‘어떻게’다.

    요구가 없는 아이로 바뀐 큰 애

    2009년 5월 8일 쌍용자동차는 2646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하겠다고 노동부에 신고했다. 그해부터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버이날에 부산에 홀로 계신 어머님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린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손수 만든 종이 카네이션과 삐뚤빼뚤 “사랑한다.”가 적혀 있는 카드를 바라봐도 헛헛한 마음 또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고자들은 무슨 기념일이 될 때마다 마음의 짐들이 늘어간다.

    모란공원에서 세 아이와 엄마.(사진 제공=고동민)

    큰아이는 77일 동안 공장 점거 파업할 때 가족대책위 대표를 했던 아내가 데리고 있기 힘들어 어머니와 고모가 있는 부산으로 두 달 가까이 내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파업으로 구속된 뒤 한참 후에야 알았던 이야기이다.

    그 천진하고 밝았던 아이가 출소 한 뒤 까닭 없이 눈물을 보이거나 한밤중에 깨어나 너무나도 섧게 울었을 때도, 나는 감수성이 보통 아이보다 예민하구나 하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의 행동은 그 후로 더욱 심해졌다. 어느덧 말수가 적어지고, 부모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갔다. 지금 평택에 있는 심리치유센터 ‘와락’에서 놀이치료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아이의 요구는 드물다.

    둘째 아이는 워낙 아빠를 잘 따라서 주위에서 ‘껌 딱지’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공장 점거 파업이 시작되는 5월 22일, 공장 앞마당을 놀이터처럼 뛰놀던 녀석을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서는데 이별을 직감했던 그 녀석, 미친 듯이 목 놓아 “아빠”를 부르며 내 다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가족대책위 일정 때문에 바쁜 아내 대신 파업 중인 공장에서 낮에 녀석까지 돌보는 일이 심심치 않았는데, 같이 놀아줄 친구 하나 없는데도 아빠랑 있으니 신난다며 노조사무실을 누비던 기억도 새롭다. 그 녀석에게 아빠는 지금도 신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막내, 그 녀석은 파업할 때는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었다. 임신을 해서 배가 부른 채 해고를 철회하라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호소하던 아내는 파업이 끝나고 내가 구속된 후 혼자 아이를 낳았다. 병원에서는 큰 아이 둘만 있고 아이 아빠가 찾아오지 않아 남편 없는 여자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날 구치소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참 서럽게 울었었다. 그렇게 태어난 젖먹이 가온이 벌써 우리 나이로 네 살이다. 그리고 그 녀석, 저희 형처럼 아빠만 보면 딱 달라붙는 ‘껌 딱지’다.

    “아빠 없는 생활이 익숙해졌다”

    그런 생떼 같은 아이들과 헤어진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쌍용차 희생자 추모를 위한 대한문 분향소 상주를 자처한 뒤다. 아니 사실은 해고된 지 3년 전부터 정상적인 아빠의 역할은 없었다. 얼마 전 아내가 했던 말 중 충격적이면서 가슴 아팠던 말은 “아빠 없는 생활이 익숙해졌다.”라는 말이었다. 가끔 투쟁이라는 것도 사람 살자고 하는 것인데 이렇게 가족 간 관계의 단절이 이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 필자 부부(사진 제공=고동민)

    하지만 내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평생 아빠를 잃어버린 채 살아야하는 아이들 때문이다. 또한 겁나지만 아빠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아이들 때문이다.

    해고로 인해서 가족 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이혼을 하고, 일자리는 찾기 힘들어지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급기야 자살을 하고, 아니면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을 한 이들이 무려 22명이다. 너무나도 무서운 일이지만 이런 집단적인 냉대와 무관심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23번째의 영정 앞에서 무력감에 눈물만 주억 거릴지 모른다.

    22번째 죽음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들은 날 나는 사실 도망을 쳤다. 투쟁을 계속 한다는 것이 그런 무력감과 기막힘 가운데 놓이는 것이 납득이 되질 않았다. 또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는지,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온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물을 흘리는 것, 소리 내어 우는 것도 창피해 숨죽여 우는 것 밖에 없었다. 밥도 넘어 가질 않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슬픔을 혼자 간직한 것 마냥 ‘난 슬프니 건드리지 마라’는 무언의 압박감을 온몸에 풍기고 다녔다.

    22번째 죽음, 나는 도망을 쳤다

    연락을 끊고 도망 나온 지 이틀 만에 다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 놓여있는 22번째 살인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를 쳐다본 순간 솟구치는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참 한없이 울었다.

    사람들이 묻는다. 무슨 방법이 없겠냐고. 글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해고되고 3년 동안 해고자들은 방법을 찾기 위해 그렇게 헤맸던 것 같다. 공장으로 다시 돌아갈 방법, 더 이상 죽음이 이어지지 않을 방법, 아이들과의 일상을 회복하는 방법.

    쌍용차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대한문 분향소도 그 방법을 찾기 위한 하나의 결의였다. 대한문 분향소 차리는데 열 명이 연행되고, 열 명이 입원했었다. 고인을 추모하는 것을 불법 운운하며 난리치던 경찰들을 보며, 용역깡패와 구사대를 동원해 고인의 영정을 짓밟은 쌍용차 경영진들을 보며 이 사회적 학살의 실체는 더욱 명확해졌다.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사진 제공=고동민)

    2009년 쌍용차 도장 공장 옥상에서 벌어진 잔인무도한 진압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던 ‘조현오’ 경찰청장과 그걸 승인하고 잘했다고 칭찬했다던 ‘이명박’ 대통령, 노동자들의 어떤 양보에도 해고를 꼭 시켜야 회사가 정상화 될 수 있다 강변했던 당시 법정 관리인이자 현재 쌍용차 대표이사인 ‘이유일’이 그 학살의 1차적 피고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죽음들에 대한 가해자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 해결책 또한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죽음의 책임은 슬프게도 오롯이 우리 모두에게 남겨져있다.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된 사람들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더 이상 해고하지 말라며 싸우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게 인간을 쓰다만 폐기물처럼 취급하지 말라며 스스로의 존엄함을 외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해고로 목숨을 잃어야만 하는 이 야만적인 사회에서 생명의 저지선을 함께 만드는 것이다. 쌍용차 해고자들과 함께하는 발걸음은 더 이상 해고문제는 노동자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반드시 함께 싸워나가야 할 우리의 문제라고 동의하는 이 사회 구성원으로의 발걸음이다.

    5월 19일 서울역 늦은 4시. 그 방법을 찾기 위한 사회적 발걸음을 시작한다. 더 이상의 죽음을 막고, 해고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간절한 외침, “살인정권 규탄! 정리해고철폐!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범국민대회”에서 세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여러분을 기다리겠다.

    * 이 글은 쌍용자동차 해고자 고동민씨가 투고해주신 글입니다. 

    필자소개
    쌍용차 해고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