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선 지는 싸움해선 안된다"
    2010년 10월 12일 09:46 오전

Print Friendly

"여기가 내집이어요 어머니 / 굴 속 같지요 꼭 음침하고 눅눅한 분위기가 / 냉방 같지요 꼭 바늘끝처럼 한기가 살 속을 파고드는 것이 / 이 곳 사람들은 이 곳을 시베리아라고 그런답니다 / 살아있는 송장이 죽어 산다 해서 / 납골당이라 부르기도 하고요

어머니 이쪽으로 오셔요 / 이것이 내 방이어요 철문에 붙어있는 표찰에는 / 0.7평에 정원3명이라 씌어져 있지만/요즘은 나 혼자 쓰고 있어요 / 셋이 함께 써야 하는 경우도 있는 데 그 때는 / 밤에 잠을 잘 때 번갈아 가면서 자야 한답니다 / 앉아 자는 사람이 누워 자는 사람을 깨워서/ 누어 자는 사람이 앉아 자는 사람을 깨워서/ 저녁잠 밤중잠 새벽잠으로 번갈아 가면서 자야 한답니다

이걸 보세쇼 어머니 / 식구통이라고 하는 구멍이랍니다 / 아이들 머리통만 하지요 밖에서 / 이 구멍으로 밥을 넣어 준답니다 조막막한 콩밥을 / 이걸 보세요 어머니 / 감시통이라고 하는 구멍이랍니다/ 밖에서 열렸다 닫았다 하게 되어 있는 데 / 안에서 무얼 하고 있나 하고 엿보는 구멍이랍니다 / 가령 내가 좀 누워 있기라고 하면 / 어느새 그걸 알았는지 철문을 퉁퉁 두드리며 일어나라 그러고 / 가령 내가 담요라도 한 장 깔고 앉아 있으면 그 담요 치우라 그러고 / 가령 내가 옆방과 통방하면 못하게 하는 구멍이랍니다 / 통방이 무엇이냐고요 처음 듣는 말이겠지요 어머니는

이곳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인간의 목소리로 / 말이란 것을 주고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데 그것을 어기고 / 우리가 인간의 목소리로 몰래 몰래 말을 주고 받거나 / 똑 똑똑 똑똑똑 벽을 두드려 아침 저녁으로 / 잘 잤소 잘 자소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거나 하는 것을 / 이곳 문자로 소위 통방한다고 그런답니다

어머니 이쪽으로 와 보세요 / 여기가 오줌도 싸고 똥도 누는 변소랍니다 / 바로 코 앞에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는 하지만 / 그래도 이곳은 내가 유일하게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랍니다 / 어머니 여기를 찬찬히 보세요 / 보자기만한 철판에 수없이 뚫어져 있는 이 바늘만한 구멍을 / 이 구멍으로 어쩌다 운수 좋은 날이면 파란 하늘을 보게 되는데 / 그런 날이면 어머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답니다 / 고향의 하늘을 본 것 같기도 하고 날아가는 새라도 보게 되는 날이면 / 어머니 나는 기쁨에 숨이 막힐 지경이랍니다/ .. 이하 생략 " (김남주 시 ‘어머님에게’ 중에서)

감옥에 대해서는 돌아가신 김남주님의 시로 대신하자. 그만큼 잘 묘사한 글을 찾지 못하겠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가고, 법무무 시계는 가둬두어도 돌아간다”는 우스갯말처럼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그 사이 검사는 내게 징역 5년을 구형했고, 판사는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판결문은 대동소이했다.

진실의 근거와 범죄의 근거는 같았다

“피고인들은 1982.4.19 오전에 서울 도봉구 우이동 소재 4․19 묘소에서 중대생을 참배하다가 서로 만난 후 같은 해 5.7부터 6.11경까지 사이에 피고인들 집 등지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국경제 전개과정』,  『지식인을 위한 변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등 현실비판 성향이 내포되어 있는 책자를 탐독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현실 비판의식을 심화하여 오면서 현 정부는 군사정권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고, 경제적으로는 잇다른 경제정책의 실책으로 민중이 핍박받고 있으며, 학원내에서는 학도호국단이라는 관제단체를 앞세워 학생들의 자율적 활동을 제한하고 학원사찰을 계속하고 있다고 판단한 나머지 학생들을 선동하여 반정부 시위의 감행을 유도할 것에 서로의 의시가 합치되어 1982.8.14 14:00시경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소재 이화여자대학교 입구 상호미상 주점에서, 피고인 임재선이 2학기 개학을 하면 학원자유를 보장하라는 등 내용의 유인물을 작성, 살포하고, 중앙대학생들에게 시위를 선동하자고 제의, 이에 피고인 이근원이 승낙하여, 같은 달 21.부터 29.경까지 사이에 강원도 정선군 주천면 소재 요선정으로 함께 캠핑을 떠나 1982년도 조선일보 및 1970년대 경제현황 분석이라는 책자를 기초로 하여 유인물의 초안을 마련하고, 상경하여 같은 해 9.1. 16:00시경 서울 중구 소재 남산 8각정에 모여 선동시기를 같은 해 9.9로, 유인물 제목은 “의에 죽고 참에 사는 중앙학우여”, “학우들에게 보내는 글”이라고 각 정하고, 같은 달 5. 11:00시경 북한산으로 올라가 시위 선동시에 대비하여 밧줄에 매달리는 연습을 시도한 후 같은 달 8. 21:00시경 서울 서대문구 소재 홍익대학교 앞 홍익여관 11호실에 함께 투숙하여 다음날 08:00경까지 피고인 이근원이 필경한 등사원지 2매로 “학우들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현 정권은 반민중적이며, 물리적 폭력과 비민주적 제도를 통해 실현하고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 400매와 “의에 죽고 참에 사는 중앙학우여”라는 제목하에 “현 정권은 언론통폐합, 언론기본법 제정으로 그 대변자로 만들고 있으며, 민중을 우롱하고 대학의 민주성을 말살하고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 400매를 8절지 갱지의 양면에 등사하여, 미리 준비한 가방에 피고인 임재선이 300매, 피고인 이근원이 500매를 넣은 후 같은 달 09:00시경 위 여관을 나와 메가폰 1개를 구입한 다음, 각 중앙대학교로 등교하여, 그 날 11:50경 피고인 이근원은 같은 학교 도서관 4층 어학학습실 창틀에 밧줄을 매고 그 밧줄에 매달려 바깥으로 나와 소지한 위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메가폰으로 “중대 학우들이여 모여라”고 외치면서 유인물 내용을 읽어내려가고, 그 시경 피고인 임재선은 위 도서관앞 잔디밭에서 위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중대생들은 모이자” “학원자유 보장하라”는 등 구호를 외침으로서, 공동하여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시위를 선동하였다”(1982년 12월 11일 판사 이우근)

많이 웃기는 판결문

지금 보니 많이 웃긴다. 전두환을 배려(?)하여 일부러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전부 삭제한 노력이 가상하다. 다른 학교에서도 시위가 있어 영등포 구치소에는 점차 학생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12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다. 우리는 이날 기념집회를 하기로 했다. 인간의 권리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감옥생활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집회라고 해야 모일 수가 없으니까 통방을 통해 연설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재소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내용도 포함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취침나팔이 끝나자 우리는 모두 변기통으로 가서 창문에 매달려 구호를 외치고, 노래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군화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감옥에는 경비교도대라는 게 있다. 전투경찰처럼 감옥을 지키는 게 임무였다. 간수들과 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창문을 떼었다. 감옥에는 유리창이라는 게 없다. 모두 비닐로 한다. 창문을 떼어 위협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로 한 번도 사람을 때려 본 적이 없는 나는 결국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더 심하게 맞아야 했다. 그들은 우리 모두를 징벌방이라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런 곳이 있다는 얘기만 들었었다.

먼저 그들은 우리를 꽁꽁 묶었다. 가슴을 땅에 대고, 다리를 반으로 접게 하더니 포승줄로 얽어맸다. 가슴을 X자로 묶고, 다리는 엉덩이에 붙어있도록 했다. 손을 뒤로 해서 다리와 함께 묶었다. 소리를 지를까봐 얼굴에는 방성구(防聲具)라는 걸 씌웠다. 포승줄은 움직일수록 조여들었다.

"교도관이 움찔했다"

그 상태로 반짝 들어서 징벌방에 가두었다. 개구리가 생각났다. “고향이 동해 출신이냐? 동태 묶듯이 잘 묶네”라고 내가 말했다. 바닷가에 일렬로 묶어 말리는 동태 생각이 났다. 묶다말고 한번 움찔한 교도관은 조금 살살 묶었다. 

   
  ▲홍성담의 판화 중에서. 

징벌방은 딱 한사람이 누우면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변기통도 없고, 다만 구멍이 하나 뚫려 있을 뿐이었다. 고통스러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즐거울 경우의 얘기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은 결코 쉽게 흐르지 않는다.

책도 없었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엎드린 채로는 잠이 오지 않는다. 몸을 직각으로 세워 조금 자다보면 온 몸이 쑤셔서 잘 수가 없다. 다행인 것은 가두면서 그래도 방성구는 벗겨 준 것이었다. 아마도 숨이 막혀 죽을까봐 그런 지도 모르겠다.

모두 4명이 잡혀 왔다. 우리는 그 와중에도 변기통 구멍에 대고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버티게 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사람으로 인해 힘을 얻는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 것인지 모른다. 저들이 반응이 없을수록 더 불안했다. 하루가 지나갔는지 식사를 가져왔다. 엎드린 채로 ‘개처럼’ 먹으란 얘기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의도하지 않은 단식투쟁이 되어 버렸다. 저들은 항복을 요구했다. 반성문을 쓰라는 얘기였다. 모든 싸움은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우리가 만만하게 보인다면 저들은 이후 마음대로 할 것이다.

당시 구치소에는 책이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고, 5권 이하로만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 물론 신문은 꿈도 못 꾸었다. 지금은 신문도 들어오고, TV도 본다고 한다. 연필도 물론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수시로 저들은 방 검사를 했다. 한번 싸움에서 지면 수개월 동안을 어려운 조건에서 생활해야 했다.

징벌방과 라디오

마음과 몸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몸이 힘들수록 정신이 더 강해져야 하지만 거꾸로인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변기통 구멍을 통해 통방하고 있다는 것을 안 저들은 라디오를 흘러 보냈다. 라디오에서는 젊은 여자 진행자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연말을 맞아 연인과 함께 어디론가 낯선 곳으로 떠나자” 어쩌고 하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세상은 나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우리는 그 와중에도 토론을 했다.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항복하느냐, 아니면 계속 하느냐. 이기든 지든 함께 해야 한다. 그렇게 3일을 지냈다. 결국 누구의 승리라고도 하지 못할 어정쩡한 타협으로 우리는 풀려났다.

김남주는 어떤 시에서
“지는 싸움을 해서는 안된다
감옥에서 특히 첫 싸움에서는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지지 않기 위해서는
싸움의 스물 네가지 측면을 검토해야 하고
준비없는 싸움을 시작해서는 아니된다”고 말하고 있다.

바깥에 있는 가족들과 대응을 준비하고, 다른 일반 재소자들과의 교감을 가진 싸움이어야 한다는 교훈이 남았다. 바깥세상과는 다르게 감옥에서의 싸움은 금방 승패가 결정된다. 덕분에 감옥에서의 투쟁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다시 내 방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풀려나는 걸 알고 일반 죄수들이 너무 좋아했다. 내 방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 위층에서 나를 부르는 통방 소리가 들렸다. 

“고생했습니다. 이거 받으세요.” 

알아서 해주는 곳이 아무것도 없는 곳

창문 쪽으로 가보니 2층에서 줄을 단 컵라면이 내려오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살면서 사소한 것에서 감동을 많이 받는다. 나는 역사는 민중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동학이 그랬고, 3․1 운동이 그랬고, 4․19가 그랬다. 5․18로 시작된 살벌한 군사독재의 시대, 감옥은 더욱 강하게 사람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투쟁들을 통해서 우리는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었다. 때로는 재소자들의 반찬 문제로, 때로는 운동시간 문제로, 때로는 서신에 대한 검열문제로 완강한 관료사회와 부딪쳤다. 알아서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곳이 감옥이다.

내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조건도 누군가 앞 사람이 싸웠기에 확보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당시에 싸웠던 많은 것으로 인해 지금은 그보다 조금은 나은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앞으로 조금씩 나가는 것 아닐까?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