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평에 갇힌 청춘
        2010년 10월 11일 03: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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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청청한 하늘 / 저 흰구름 저 눈부신 산맥 / 왜 날 울리나 / 날으는 새여 / 묶인 이 가슴 //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이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 (중략) // 청청한 하늘 끝/ 푸르른 저 산맥 너머 떠나가는 새 / 왜 날 울리나/ 덧없는 가없는 저 눈부신 구름 / 아아 묶인 이 가슴.” (김지하 시 ‘새’ 중에서)

    9월 9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다. 학교 앞의 작은 병원으로 갔다가 대학 부설병원으로 옮겨졌다. 20바늘 가까이 꿰맸다. 그들이 나를 작은 창문 틈으로 잡아채면서 유리창에 베인 상처였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실제 그 이후 밧줄 데모를 하다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83년 11월 16일에는 서울대생 황정하가 나처럼 도서관 6층 난간에서 시위를 하던 중 추락하여 죽기도 했다. 치안본부에서도 왔다. 이들은 이후 87년 6월 항쟁을 불러 온 박종철을 고문으로 죽인 놈들이다. 한갓(?) 교내 시위를 가지고 그들이 온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왜 9월 9일에 데모를 했나? 9월 9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라는 그들의 질문 자체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알고 보니 북한의 8대 명절의 하나인 북한정권 창건일로 99절이라고도 부른단다. 

    조사는 쉬웠다. 나와 친구는 이미 알리바이를 닳고 또 닳도록 외우고 있었다. 4.19 탑에서 참배 도중 우연히 만나서, 시국에 대한 개탄을 하고, 같이 술을 마시면서 시위를 하자고 내가 제안하고, 동의해서 준비에 들어갔다는 그럴듯한 얘기를 우리는 이미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의사가 반대했지만 나를 노량진 경찰서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거기서야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시위는 예상했던 것만큼 힘차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 때부터 “조금 더 버텨야 했다”라는 자책이 시작되었다.

    수번 1594 

    1주일인가를 경찰서에 있다가 영등포 구치소로 옮겨졌다. 내무부 관할에서 법무부로 옮겨진 것이다. 당시 경찰서 밥은 정말 형편 없었다. 깡 보리밥에 단무지 하나 정도. 쉰 밥 냄새가 나서 거의 먹지 못할 정도였다.

    촛불 시위 때 나는 화물연대와 함께 용인에 있는 냉동창고에서 쇠고기 반출을 저지하려다 다시 연행되어 성남 경찰서에서 하루 밤을 자게 되었다. 그 때 1982년도와 2008년도의 밥을 비교해 보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사식(私食)을 넣어 주는 바람에 관식(官食)을 비교하지 못했다.

       
      ▲영화 빠삐용의 포스터.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같은 종(種)을 감옥이라는 곳에 가둔다. ‘빠삐용’(Papillon)이라는 영화를 너희들은 잘 모를 것이다.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탈출을 기도하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을 다룬 감동적인 영화다. 

    모든 갇혀 있는 생명체들은 탈출을 꿈꾼다. 영등포 구치소에 도착하여 처음 들어간 방은 내 발로 재어보니 가로가 4발자국, 세로가 11발자국이었다. 내 발 크기가 260밀리미터다. 한 사람이 누우면 딱 끝이었다. 빠삐용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0.72평이라고 했다.

     

    마지막에는 조그만 화장실이 있었고, 화장실은 비닐로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자살을 방지한다는 것이었다. 감옥에 갇힌 이후에는 이름이 없어진다. 1594. 이곳은 모든 것이 번호로 통했다.

    "옷을 벗는다. 실시"

    “1594 편지 왔다, 1594 면회 왔다, 1594 나와!” 등등.
    처음 들어와 0.72평에 갇히던 밤을 잊을 수 없다.
    “전부 옷을 벗는다. 실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익숙하게 옷을 벗는 사람들. 나는 쭈뼛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 있었다.

    “뭐야, 이 새끼들. 말이 말 같잖아?”
    말 한마디가 끝나자 웅성거림은 멎고, 순식간에 옷을 벗는 소리만 났다.
    나는 거기서 무슨 용기가 났던 걸까? 옷을 벗지 않았다. 교도관이 쫓아왔다. 오른 손의 깁스를 쳐다보고, 죄명을 확인했다.

    “좋아, 옆으로 빠져”
    운이 좋게 빠질 수 있었다.
    “모두 벗었으면 손으로 발목을 잡는다. 실시”  

    “실시” 한마디가 가지는 위력. 모두들 항문을 위로 쳐들고 교도관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항문에 담배나 마약을 가지고 오는 것을 검사하는 것이라 했다. 이제부터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포기하라는 경고로 보였다. 그런 절차들을 마친 후에야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방이 배정되고, 친구와도 헤어졌다. 철문이 닫히고서야 나는 갇혔다는 것을 실감했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은 무서운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와 세면, 운동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갇혀 있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되었다.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되풀이되는 악몽

    ‘나는 왜 그 순간 비겁했을까? 더 버틸 수도 있었는데, 왜 그렇게 쉽게 끌려 들어갔을까? 답사를 하면서 본 그 작은 유리창 속으로 어떻게 끌려 들어갈 수 있었을까? 뒤에서 잡아당길 때 몸을 흔들기만 했어도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왜 그 순간 저항을 포기했을까? 나란 놈은 원래 그런가? 그렇게 비겁한가? 다만 10분이라도 더 버텼더라면…’ 하는 후회가 시작되었다. 밤이면 악몽을 되풀이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상소리로 감옥을 "6조지"라고 했다. ‘조지다’라는 말은 국어사전을 보면 “일신상의 형편이나 일정한 일을 망치다”라는 뜻으로 ‘신세를 조지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경찰은 패어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때려 조지고, 간수는 세어 조지고, 가족은 팔아 조지고, 죄수는 먹어 조진다.”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경찰은 사람들을 잡아다 패니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검사들은 걸핏하면 불렀다. 검사에게 불려나가는 날은 재수가 없는 날이다. 하루 종일을 김옥보다 더 좁은 유치장 비슷한 곳에서 대기해야 한다.

    그것도 집이라고 구치소로 빨리 돌아갔으면 하지만 그날 나간 사람에 대한 조사가 모두 끝날 때까지 책도 못보고, 운동도 못하면서 그냥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인간으로 보면 정말 ‘싸가지 없는’ 그들을 만나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설령 검사가 아니고 그 밑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시종일관 반말이다. ‘권력의 앞잡이’인 그들은 전두환 시절에는 더 했다.

    판사는 “피고를 징역 0년에 처한다.”라고 형량을 마구 때린다. 지금 돌아보면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로 판결문도 똑 같다. 나는 지금도 적어도 검사와 판사를 하려면 최소 3개월 이상은 감옥 생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아무런 죄책감과 현실감도 가지지 않은 채 징역을 마구 때리는 일이 줄어 들 것이다.

    감옥에서 1년, 아니 6개월, 아니 한 달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무조건 구형을 하고, 선고를 내린다. 그렇게 감옥에 오면 간수들은 아침저녁으로 죄수들의 숫자를 센다. 아침이면 방마다 점호를 한다. 그들의 일과는 죄수들의 수를 세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감옥생활에 적응하다

       
      ▲감옥의 모습. 

    반면 갇혀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가족들은 애가 탄다. 끊임없이 면회를 오고, 맛있는 것을 사서 넣는다. 물론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감옥에는 잘 나가는 ‘범털’과 지지리 궁상인 ‘개털’이라는 상반된 용어가 또 있다. 마지막으로 갇혀 있는 사람은 딱히 할 일도 없으므로 끊임없이 먹어 치운다. 그게 감옥이었다. 

    내게 주어진 죄명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죄’였다. 감옥에서는 줄여서 ‘집시법’ 위반이라고 불렀다. 다른 죄수들과 구분하기 위해 수번에는 붉은 칠을 했다. 덕분에 면회를 가거나 운동을 하다가 수번에 색깔이 있는 사람들로 금방 구분할 수 있었다.

    서서히 많은 사람들이 양심범으로 감옥에 오기 시작했다. 80년부터 83년 사이에 집회 및 시위로 구속된 학생들의 숫자만 1,4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갓 스무살은 넘긴 젊은이들이 갇힌 채 청춘을 보내야 했다. 어쩌면 뜻이 맞는 사람들이 있어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얼굴도 잘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죄목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반가웠다. 그리고 우리는 감옥에서도 투쟁을 계속했다. 그런 투쟁을 하면서 나는 자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루 종일을 갇혀 지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갑자기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안절부절 하기 일쑤였다. 평상심을 유지해야 했다. 특히 우리는 일반 죄수와 격리하여 독거(獨居), 즉 혼자 있도록 했다. 그리고 서로 말하지 못하도록 띄엄띄엄 양심수들을 격리했다. 그나마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같은 죄명을 가진 다른 친구들과 간수 몰래 하는 통방(通房)이었다. 통방이라는 것은 창문을 통해 서로에게 크게 말하는 것이다. 

    “어이 5하 7방. 000 형 잘 자요”
    “그래 밥 잘 먹었나? 좋은 꿈 꿔라”
    하는 식으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감옥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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