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펄펄 끓는 물을 그의 다리에 부었다"
        2010년 10월 04일 07: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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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 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 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가라.” (강은교 시 ‘무엇이라고 쓸까’ 중에서)

    미국문화원 방화로 시작된 1982년

       
      ▲1982년, 불타는 부산 미문화원. 

    1982년은 미국문화원에 대한 방화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광주항쟁 당시에도 카톨릭 농민회원들에 의해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계엄당국의 보도 통제로 보도되지 않았다. 당연히 나도 몰랐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하고 있는 걸 보면 전두환 시절을 흉내내는 것 같다. 그때처럼 방송과 언론 장악이 완벽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언론을 차단한다고 해도 “밤 말은 쥐가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 법”이다.

    이 사건에 대해 전해들은 사람들은 몰래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광주의 참상과 독재자들의 만행, 그리고 광주항쟁에 미국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상징적 의미로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하기로 결심했다.

    3월 18일 4명의 여학생이 문화원에 직접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지르는 방화조로, 3명의 남학생은 부산 시내에서 유인물을 뿌리면서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학생들은 방화만 한 게 아니라, 근처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이른바 ‘반체제’ 유인물을 뿌렸다. 이 사건으로 모두 15명이 구속되었다. 

    1982년 3월21일자 <조선일보>는 ‘누구를 위한 방화인가-미문화원 소실과 민족적 수치’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양국간의 안보협력체제는 공고하고 긴밀한 형편이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더욱더 한미관계를 이간하려 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망상과 다름없다”고 썼다. 물론 방화의 이유나 배경은 전혀 없었다.

    ‘운동권’이라는 괴상한 사투리

    촛불을 매도해 온 현재의 모습은 그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광주에서의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을 묵인함으로써 사실상 전두환 군사정권을 지지한 미국에 대한 본격적인 투쟁은 이때부터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오면서 시작된 셈이다.

    이후에도 미국 대사관과 문화원은 미국에 대한 항의를 표현하기 위한 주요 대상이 된다. 왜 전경들이 미국 관련 건물들을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는지 알겠지? 그것은 결코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 때문만은 아니다. 

    촛불시위에 결합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누구나 처음부터 ‘운동’을 생각하는 건 아니다. 도대체 ‘운동’이란 게 무엇일까? 당시 지배층은 ‘운동권’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듦으로서 우리와 다른 사람을 구분하려 했다. 한국전쟁 직후의 ‘빨갱이’와 비슷한 용어로 하고 싶었겠다.

    우리는 왜 걷거나 달리거나 운동을 하지? 바로 건강해지기 위해서다. 운동권이라는 이 괴상한 사투리는 그렇기 때문에 ‘사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이라고 바꾸어야 할 것 같다. 80년 광주항쟁의 기억은 아주 소심한 사람까지도 운동의 근처에 머물도록 만들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분노와 저항이 아니면 자책밖에 남을 게 없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수업시간에는 소설은 김동리 교수가, 시는 서정주 교수가 강의했다. 문학적으로 보면 아주 유명하신 분들이었지만 나는 무관심했다. 밖에서는 사람이 죽어가는 데 뜻도 모를 언어를 나열하고 그걸 ‘시’라고 하는 동기들이 한심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김동리, 서정주, 법정…나를 화나게 만든 사람들

    나중에 어느 잡지에서 법정이라는 스님이 쓴 글을 보고도 화가 났던 기억이 새롭다. 시골에서 아침 길을 나서면서 농부가 잘라 낸 풀에 대해 절망하고, 개탄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광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수많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한낱 풀포기의 베임에 대해 분노하는 법정에 대해 분노했다. 

    2번의 연행으로 경찰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조직 활동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뱁새눈을 뜨고 감시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잡아낼 수는 없었다. 신입생들을 몰래 모집하는 한편 학습을 계속 이어갔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 리영희 교수의 글을 통해 그동안 받아 온 반공 교육이 얼마나 허구였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진실과 중국에 대한 얘기를 통해 고등학교 때까지 배운 모든 반공 교육이 온통 거짓투성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당시 판매 금지된 책이었지만 몰래 복사라도 해서 돌려 보았다. 변증법 등의 내용이 들어있는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통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 수 있었다. 야학을 통해 노동하는 사람들의 힘듦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게 큰 자극을 준 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투쟁하던 선배들의 얘기였다. 우리는 재판기록 등을 통해 그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것만은 합법적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기록이다.

    데모와 아버지

    76년에 결성되어 박정희가 죽기 바로 직전에 검거된 이 사건으로 2명이 사형이 확정되고, 무기징역 5명 등 41명이 구속되었다. 이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이미 돌아가신 시인 김남주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너희들이 그의 시를 한번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적에 대한 분명한 분노가 표현되어 있다. 촛불 때 많이 불렀던 ‘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래도 그의 시다. 반면 가장 크게 배신한 사람은 지금 이명박 대통령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의원이다. 이재오에 대한 얘기는 민중당 얘기할 때 또 나오니까 그 때 하도록 하자. 

    그러나 그렇게 책을 읽는다고 해서 갑자기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내 방은 공동의 공간이 되었다. 2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누었다. 당시 통행금지가 있어 걸핏하면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학습만은 내 방에서 하지 않았다. 감시도 감시였지만 방에서 마당으로 바로 이어지는 공간이 비밀스런 얘기를 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다른 자취방이나 심지어 중국집에서 세미나를 한 적도 있었다. 

    데모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결심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병으로 쓰러지신 아버지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자식이 감옥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평생 가지고 살게 될 죄책감을 생각했다.

    이미 노량진 경찰서로 잡혀 갈 때, 그리고 석방될 때 부모가 와서 데려가도록 조치하는 바람에 다 알고 계신 상태였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감옥생활을 아버지 모르게 어떻게 해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이 고민은 형들과의 논의를 통해 해결되었다. 군대에 가 있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친한 사람 죽여야 한다면 혁명은 무슨 소용인가?

    다른 하나는 실존적인 내 고민이었다. 러시아 혁명사를 공부하다 보면 혁명 성공 이후에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죽이는 과정이 나온다. 물론 당시에는 제대로 된 혁명사가 번역이 안 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됐다. “혁명이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인데 설령 혁명이 성공하다고 해도 가장 친한 사람들과 동지들을 죽여야 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고민이 생겼다.

    거기에 덧붙여져 내가 하는 행동이 ‘젊은 날의 치기’가 아니라 나이가 60이 되어서도 정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술을 먹고 또 먹어도 대답을 찾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거의 한달 가까이를 술로 지새웠다. 옆에 있는 동료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돌아보면 ‘실존과 공존’에 대한 고민이었다. 내 문제에 집착하면 역사가 안 보였고, 광주 항쟁 등 세상을 보면 내가 안 보였다. 선배들과 얘기한다고 풀릴 문제도 아니었다. 무엇으로 그 고민을 해결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만 그렇게 연일 술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내 방으로 찾아 온 하나 밖에 없었던 여학생 동기와의 대화를 통해 길을 찾은 것 같다. 그리고 이후 그 여학생과 나는 결혼을 했다.

    또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고, 죽어갔다. 82년 3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데모 준비를 시작했다. 데모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같이 할 친구를 찾아야 했다. 워낙 사람이 많지 않은 관계로 일단 같이 조직을 하는 사람은 빼야 했다. 후배들을 교육시킬 사람이 필요했다.

    "한 번만 더 부어라"

    그렇게 찾던 중 같이 학습을 한 것은 아니지만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체육과의 한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태권도와 합기도 등을 합쳐 7단이라고도 했다. “우리 결혼하자”라는 한마디 말로 흔쾌히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데모를 준비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 눈치를 채셨는지 그 친구의 부모님이 휴학원서를 내버렸다. 당시 많은 부모들이 그런 방법을 쓰기도 했다. 데모는 2학기 초에 하기로 했는데 8월 경 군대에 가는 일정이 잡혀져 버렸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군대에 가되 다시 돌아오는 길’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술을 먹고 다리를 부러뜨리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 못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거꾸로 정신이 또렷해지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택한 건 화상(火傷)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삼청동에 있는 학 여학생 집의 지하실에 앉았다. 소주를 마시는 한 쪽에선 버너에 물을 끓였다. 술을 마셔도 제정신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른쪽 다리는 써야 했으므로 바지를 걷어 올리고 왼쪽 다리 무릎 위쪽을 수건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그리곤 펄펄 끓는 물을 부었다. 살갗이 벌겋게 불어 올랐다. 내 친구는 눈을 질끈 감고 불어 오른 살을 밀어 버렸다.

    “한번 만 더 부어라” 그 말대로 했다.
    친구는 마지막에 눈물을 보였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낳으시고 기를 때 무엇보다 제 몸을 잘 간수하라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불효냐?”라던 그 말이 지금도 남는다.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하고, 그래도 불안해서 머리까지 삭발한 채로 입영시켰다. 다행히 그 친구는 3개월 이후 입영하라는 통보를 받고 돌아왔다. 우리는 그 친구의 부모님에게 비밀로 한 채 당시 여자 친구가 그림을 그리던 홍대 앞 아틀리에에 숨기고 본격적으로 데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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