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상자에서 범죄자, 이제 파산자로"
        2010년 09월 30일 02: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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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년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단 한 차례도 건강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은 적이 없다. 1원 한 푼 틀리지 않고 건강보험공단이 돈을 빼갔는데, 정작 쌍용자동차 사태 당시 내가 크게 다치자, 말 한마디 없이 (치료에 소요된)건강보험료를 환수 조치하라는 독촉장이 통보되었다. 이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판단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범죄자, 조현오는 치안총수"

       
      ▲최성국 씨(사진=이명익 기자 / 노동과 세계) 

    30일 국회 기자회견장을 찾은 쌍용자동차 해고자 최성국(39)씨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공포의 도장공장 안에서 77일간 ‘옥쇄파업’을 했고 경찰의 강제진압 당시 고무총을 맞아 두 번을 기절했다. 결국 허리를 다쳤고 정신과 치료도 1년을 받았다. 그는 그 1년 동안 큰 원인 없이 일어서지 못했고 휠체어 신세를 졌다.

    일을 하려 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잠을 두 시간도 못자는 날이 태반이었다. 아픈 허리를 붙잡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두 달을 버텼지만,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집에 몸을 뉘어도 아픈 몸은 여전했다. 비가 오면,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는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지만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의사는 앞으로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신경마비가 오거나 발부터 신경이 죽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정밀검사를 거부했다. 어차피 둘 중의 하나라면, 마음이라도 편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건강보험공단에서 편지가 왔다.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범죄행위에 기인한 때에는 보험급여를 하지 아니한다’며 그에게 500여만 원 상당의 건강보험료를 다시 내놓으라는 통고장이다. 그는 범죄자가 되었고, 강경진압의 총 책임자였던 조현오 당시 경기경찰청장은 치안총수로 승진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건강보험급여 환수조치 철회 촉구 기자회견이 열린 30일 오전, 최성국씨와 인터뷰를 나누었다. 최씨는 1남 1녀의 자제와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다음은 최성국씨와의 일문일답.

                                                      * * *

    "1년 정도 이유 없이 못 일어나"

    –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강제진압으로 다친 것인가? 얼마다 다쳤으며 병원진단은 무엇인가? 본인 외에도 건강보험 환수 통보를 받은 4명의 증상은 어떠한가?

    = 나 같은 경우는 잡혀간 뒤 경찰서에서 호흡질환을 일으켰고 그게 첫 입원이었다. 일주일 만에 깨어났는데 신문기사를 보니 공황장애라고 보도가 되었더라. 이후 정신과 치료도 받았는데 1년 정도를 별다른 원인 없이 일어서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계속 치료를 했다.

    그 와중에 내가 병원에 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집으로 갔다. 거기서 집사람과 애들과 함께 재활치료를 했고 그러면서 이렇게 나름대로 걸어 다니게 되었다.

    옥쇄파업 당시 옥상에 있다가 경찰이 쏜 고무총에 맞아 두 번을 기절했었다. 그 와중에 당시 주변을 보니 다른 동지들도 경찰과 옥신각신하고 있더라 이러다가 맞아죽겠다 싶었다. 옆에 떨어진 봉을 주워 휘둘렀다. 그런데 그게 방송을 탔다. 처음에는 그걸 쇠파이프라고 했는데 알고보니 그게 경찰봉이었다.

    제일 크게 다치신 분은 지금 일반적인 일도 거의 못하고 집에서 지부나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격증을 따러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그 형은 이번에 건보공단에서 2,000만원 환수조치가 내려졌다. 수술비만 1,500만원이라 하더라. 뼈와 뼈 사이에 물렁뼈가 파열돼 주저 앉은 상태라고 했다.

    그래도 그 형은 그나마 수술 이후 완쾌로 가고 있는데 나 같은 경우는 계속 통증을 갖고 살아야 한다. 허리가 전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계속 통증이 이어지고 비가 오면 잠을 못 잔다. 의사는 디스크라고 하면서 하체를 정밀검진 했는데 앞으로 신경마비가 오거나 발부터 신경이 죽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척추 혈액을 빼서 장애가 될지 안 될지 검사를 해보자 했는데 내가 반대했다.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정답이라면 내 병을 모르고 가더라도 내 의지대로 사는 게 낫지 싶었다.

    우리 집은 지금 집사람이 돈을 벌고 있는데 생계비를 유지하는 정도다. 그나마 그걸로 유지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고, 그래도 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진 이후 심리적 안정을 가질만했는데 다시 건보공단에서 보험료를 환수하라는 통보가 온 것이다.

    솔직히 그 돈 돌려줘버리고 싶지만…

    – 보험료 얼마는 되돌려줘야 하나?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인 상황에서 이를 돌려줄 상황이 안 될 텐데.

    = 500만원이 조금 안 나왔다. 아이들도 자라고 있고 집에 융자도 있어 내가 더 누워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을 하기 위해 시도를 해본 적이 있는데 낮에 일하면 밤에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잤다. 태어나서 꿈을 꿔본 적이 거의 없는데 (쌍용차)사태가 끝나고 난 뒤에는 하루에 많이 자면 2시간 30분이었다.

    그래도 그냥 알바식으로라도 기술도 배우고 내 몸의 상태도 확인해보려고 에어컨 수리, 설치 일을 하게 되었는데 후유증이 더 심해졌다. 낮에는 일이 고된데 밤에는 잠을 못잤다. 그렇게 두 달은 악착같이 버텼는데 두 달을 잠을 못자니 몸이 좋지 않았고 덩달아 집사람도 잠을 못 자게 되니, 집사람이 이제 그만두라 하더라.

    솔직한 마음 같으면, 사실 건강보험료 돌려줄 형편이 되면 줘버리고 아예 마음을 털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지금 집사람과 내가 융자를 받아 집을 산 것이 꿈을 이룬 것이다. 이 융자금이 나가고 생계유지도 하고 환수금까지 내면, 난 파산이다.

       
      ▲사진 = 이명익 기자 / 노동과 세계 

    – 건강보험 환수 통보를 받았을 때의 심정은

    = 세상 모든 존재 중에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는 누구를 믿어야 하나? 이런 조직(나라)에서 나 같은 하찮은 사람 하나를 인정하겠나? 그냥 그렇게 혼자 한탄했다. 내가 40년간 살아오면서 느껴보니 이 나라는 1원 한 장 틀리면 바로 차압 들어오더라, 그러면서 나라에서 실수한 것은 묵인해버린다. 그러니, 이제 나라의 존재도 못 믿겠다.

    – 건강보험 환수의 근거가 ‘범죄행위에 기인’했다는 것이다. 또 다시 쌍용차 투쟁이 정부에 의해 불법화로 낙인찍히는 상황인데. 심정은?

    = 안에 있었을 때 (당시 쌍용차 파업현장에)청와대 실장이 내려와서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면서 진두지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결국 우리를 죽이려는 거다’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나는 그동안 노동계 쪽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내 가족, 조직을 어떻게 잘 이끌어 나가 부응할 수 있느냐, 내가 열심히 일만하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살아왔다. 그게 완전히 깨져버렸다.

    – 쌍용차 파업 후, 또는 부상 후, 생활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 두 가지로 나누면 우선 적금과 보험을 다 해약했다는 것이다.(웃음) 두 번째는 가족끼리 더 화목해 졌다. 서로의 존재감을 더 많이 느꼈다. 그 전보다 지금 더욱 서로 위로 해주고 무엇인가 하나라도 더 챙겨준다. 그런 이해심이 서로가 서로에게 더 많아졌다.

    – 본인을 포함한 건보료 환수조치 노동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는가?

    = 그건 모르겠다. 나는 간부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어서 이야기하는 상황이 아니다. 그냥 오늘 뭐 있고, 뭐 있다 이런 통보만 받기 때문에 그 선까지는 잘 모르겠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 동지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차피 지금 다 먹고 살기 힘들다. 우리 투쟁 열심히 해서 빨리 복귀했으면 좋겠다. 그게 바램이다.(그는 기자회견 당시 “국가가 이런 조치를 취한다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누굴 믿고 의지하며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나”며 “우리 같은 사람들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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