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주값 8천원과 오뎅값 2천원 사이
        2010년 09월 29일 12: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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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싱사 언니가 막 야단을 친다 / 자꾸 슬퍼지고 눈물이 나온다 / ..(중략) / 이제 믿을 수 없다 세상을 / 우리 식구 모두가 / 배신당했다 이 사회 속에서 // 난 이제 눈물도 / 말라버린 인간이 되어 버렸다 / 열심히 일했건만 / 열심히 살았건만” (지은이 모름. 시 [배신] 중에서) 

    검정고시 야학과 노동야학

    그때 쯤 야학을 시작했다. 지금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바로 앞 ‘성 베다’라는 성공회 교회였다. 검정고시를 가르치는 곳이었다. 당장 마음이 급했던 우리는 검정고시가 아니라 노동법 등을 가르치는 ‘생활야학’ 내지는 ‘노동야학’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그들에게는 배움과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가지는 게 중요했지만 철부지 내 눈에는 그런 과정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졌다. 그 때문에 성당 쪽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고, 결국 그 때문에 야학이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자신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 모든 조직을 싫어한다. 특히 노동조합을 탄압한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가 노동조합에 대해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80년 봄, 노동자들도 투쟁에 나섰다. 1980년 3월 4일 서울 구로공단의 남화전자 노조결성 투쟁을 시작으로 5.17 계엄확대 전까지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전두환은 사회정화라는 미명 하에 1981년부터 70년대의 대표적인 민주노조들의 활동을 중지시키거나 해체해 버렸다. 

    1981년 청계피복노조, 1982년 원풍모방노조가 탄압으로 강제 해산되고 반도상사, 남화, 콘트롤데이타 노조 등도 노조활동에 맞선 회사의 폐업으로 노조가 소멸되고 말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용 상급단체인 한국노총 민주화 운동도 중지되었다.

    전두환은 민주노조의 말살을 필두로 하여 160여 개의 노조를 강제해산시키고 노조활동을 강력히 규제했다. 112만명이었던 조직노동자는 95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자음접변, 구개음화보다 중요한 삶

    아울러 노동운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산별노조를 기업별 노조로 바꾸고, 노조설립과 합법적인 파업을 불가능하게 하는 각종 규제와 노동운동에 대한 지원과 연대를 차단하는 제3자개입 금지조항등의 신설을 통해 민주노동운동을 압살하려 했다. 80년과 81년에는 실질임금이 감소하였고, 월간 총 노동시간은 1980년의 230.6시간에서 1986년 237.7시간으로 늘어났다. 

    전두환 군사독재와 맞서기 위해서는 학생만이 아니라 노동자도 조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들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일부는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두고 직접 공장으로 향하기도 했다. 나는 야학에서 국어를 가르쳤지만 사실은 내가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자음접변’ ‘구개음화’보다 더욱 중요한 ‘삶’이 거기에 있었다. 당시에는 노동자라는 말조차 없었다. 공돌이, 공순이가 그들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야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내가 몰랐던 세계를 접하기 시작했다. 학생이라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들도 많았다. 

    하루는 수업이 끝난 늦은 밤 집에 오는 길에 7~8명과 함께 거리에서 오뎅을 사 먹었다. 2,000원도 채 안되는 돈을 내가 지불하자 모두들 고맙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것도 몇번이나.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그 전날 종로에 있는 ‘상중하’라는 맥주집에서 여학생 2명과 먹은 술값은 8,0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누리는 자유로운 시간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자유를 희생해서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16시간을 일함으로 인해 나는 8시간 이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처음으로 가졌던 것 같다. 그런 의문은 야학 학생이었던 진경이라는 아이를 만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당시 너희 또래였던 그 애는 시다였다. 

       
      ▲ 당시 봉제공장 모습

    "이 경쾌한 노래가 금지곡이었다"

    영화 <친구>에서 "내가 니 시다바리가?" 라는 대사가 있었지? 시다라는 것은 봉제공장에서 미싱사를 돕는 사람을 말한다. 영화 전태일을 보면 많이 나온다. 그 아이는 하루 15시간을 곰 인형을 만드는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시다였다. 5명의 미싱사에게 재봉을 하기 좋게 곰 인형을 날라 주는 게 주된 일이었다. 물론 그러면서 미싱을 배우는 것이다.

    박노해의 ‘시다의 꿈’이라는 시가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종일을 자기 키만한 곰 인형을 나르고, 미싱사에게 이런저런 욕을 먹다보면 하루가 간다고 했다. 한번은 화장실에서 자다가 엄청 욕을 먹었다고 하면서 울기도 했다. 너무 어려서부터 일을 해서인지 키도 작았다. 수업시간에는 졸기 일쑤였다. 어쨌든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게 할 수 있었다. 

    아마도 너희들은 <사계>라는 노래를 알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불렀고, ‘거북이’라는 그룹이 불러서 유명해졌으니까. 내 핸드폰 컬러링이기도 하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봄부터 시작하여 겨울까지 1년 사시사철 쉴 틈도 없이 미싱을 돌려야 했던 노동자들을 다룬 노래다. 이 경쾌한 노래가 당시에는 부르는 게 금지되었던 노래라면 이해할 수 있을까? 4계절 내내 미싱을 돌려야 하는 노동자들의 힘겨운 일상을 다룬 이런 노래를 군사정부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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