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 선배들이 구속되기 시작했다"
        2010년 09월 28일 09: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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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옥신각신 밀리다가 관악에서도/ 안암동에서도 신촌에서도 광주에서도/ 수백 명 학생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 묻은 작업복으로 밤늦게/ 술취해 돌아온 너를 보고 애비는/ 말 못하고 문간에 서서 눈시울만 뜨겁구나

    반갑고 서럽구나/ 평생을 발붙이고 살아온 터전에서/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 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너더러 정직하게 살라 하면/ 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가 무서워서/ 애비는 입을 다물었다마는…” (정희성 시 [아버님 말씀] 중에서)  

    1981년 첫 번째 연행

    여기저기서 저항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아까운 젊음들의 죽음들로 출발했다. 80년 5월 30일 서강대에 다니던 김의기씨가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옥상에서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유서를 살포한 후 투신한 것을 시작으로 정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죽어갔다. 물론 신문에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1981년, 2학년이 되고 나서 얼마가 지났을까? 하루는 강의실에 제일 먼저 도착했는데, 선배 둘이서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받아 보니 동요들의 가사를 바꾸어서 전두환 정권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내용이 적혀있는 한 장짜리 유인물이었다.

    문학도라는 특성을 활용해서 구전(口傳) 동요를 만든 셈이었다. "거 참 재미있네"라는 정도의 생각으로 가방 속에 넣었다. 마침 그 날은 몸이 아파서 수업을 다 듣지도 못하고 오후에 집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등교하니 경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들이 50여장을 복사해서 돌린 유인물을 거의 다 수거한 경찰은 나머지를 찾다가 마침 나에게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노량진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유인물 한 장 준 것까지도 경찰에게 말한 순진하고, 착하디착한 선배들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런 세상이었다. 아무튼 그 사건을 계기로 학교에 상주하고 있던 경찰의 눈에 띄게 된 셈이었다. 

    지금이야 다 번역돼 있어도 안 읽지만…

    그리고 그 해 5월 선배들의 시위가 학교 안에서 있었다. 모두 끌려가서 구속이 되었다. 앞으로 5월은 결코 조용히 넘어갈 수 없는 ‘항쟁의 계절’이 될 것임을 예고한 듯했다. 

    학교 쪽의 선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 학년 위의 선배를 만나게 되고, 본격적으로 학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른 과 친구들도 만났다. 물론 중간에 떠난 사람도 있었다. 학습이라야 이미 교회를 다니면서 읽었던 책들을 다시 보는 것이었지만 체계적인 인식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학습은 일본어 강습을 통해 일어 책을 보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모든 책이 다 번역되어 있어도 거꾸로 안 읽는 세상이지만 그 때는 정말이지 책이 귀했다. 조금이라도 읽을 만한 책은 모조리 판매가 금지된 금서(禁書) 였다.

    김지하의 시도, 이영희의 책도, 심지어 김민기의 노래까지도 금지곡이었다. ‘혁명’ ‘변증법’ ‘마르크스’ ‘계급’ ‘노동’ 이라는 단어 하나라도 있으면 그 책은 판매금지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단시간안에 일본어를 배우고 선배의 강독 아래 일어책을 읽어야만 했다. 더욱이 내가 다닌 학교는 학생운동의 전통이 약한 관계로 1학년 신입생을 조직하여 배우는 동시에 가르쳐야 하는 처지였다. 

    두번 째 연행

    그러던 어느 날 선배로부터 잠시 피신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 선배는 다른 학교와 연결되어 학교 안에 조직을 만드는 중이었다. 소위 ‘학림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을 갈 때마다 그 생각이 난다. 이 조직은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전국민주학생연맹’으로 불리어졌다.

       
      ▲경찰이 그린 조직도

    선배를 만나서 알리바이를 맞추었다. 만일 잡혀갈 경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고, 무엇을 얘기했는지 등에 대한 각본을 만들었다. 그것을 우리는 당시에 “이빨을 맞춘다”고 했다. 처음이라 무척 당황하긴 했지만 어차피 한 번은 들어가서 정리할 문제였다. 언제까지 도망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어느 날인가 술이 만취되어 집에 들어섰다. 당시 우리는 수유리에 살았다. 통행금지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대문 열쇠를 열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 마루에 있던 낯선 두 형사가 나를 맞았다. 더 피해있어야 하는 데 긴장을 풀어버린 결과였다.

    결국 1주일 동안 순화를 위한 정신교육을 받았다. 말을 잘하면 똑똑한 놈으로, 주동자로 몰리는 시기였다. 최대한 순진하게 보여야 했고, 이빨을 맞춘 대로 진술했다. 잡힌 사람들을 대충 등급을 나눴는데 나는 군대입영으로 결정되었다. 나중에 역시 잡혀 들어온 너희 엄마도 일주일을 경찰서에서 보내야 했음은 물론이다.

    이 때 잡힌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끌려갔고, 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졸지에 나의 대학 2년은 그렇게 2번의 연행으로 지나가고 있었고, 덕분에 노량진 경찰서와 국가안전기획부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고 말았다. 

    선배, 동향 안기부 직원의 회유와 압박

    당시 경찰과 안기부는 아예 학교 안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이후 처리 과정에서 학교의 실수로 군대에 바로 가지는 않게 되었을 때 안기부 직원을 만났다. 대학교 선배이면서 동시에 같은 충청도 출신임을 강조하던 그는 군대에 바로 안 가게 된 것을 자신이 애를 써서 그렇게 된 것으로 얘기하면서, 소위 ‘프락치’가 될 것을 압박하였다. 순진한 척하면서 이후 공부만 하겠다며 넘어가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학림사건으로 모두 25명에게 실형이 선고 되었다. 

    그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는 지는 다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1심에서 사형을 그리고 이후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던 이 사건의 주모자 이태복은 이후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복지노동수석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수석비서관과 장관을 하면서 그 때 그 마음을 가지고 잘 했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게 맞겠다. 덧붙이자면 그는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자유선진당 충남도지사 예비후보이기도 했다.

    다만 학생조직의 책임자로 징역 7년을 받았던 이선근은 진보정당 운동에서 ‘민생’을 중심으로 아직까지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이후 자주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겠지만 이런 사람은 아주 드문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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